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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법

준법 皴法

산수화*를 그릴 때 산이나 바위, 토파(土坡)의 입체감과 명암,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을 처리하는 기법. 중국 진한(秦漢)시대의 산악문(山岳文)을 구성하는 평행곡선에서 비롯되어, 성당대(盛唐代)에 일어난 산수화의 자연주의적 경향에 의해 다양화되었다. 오대(五代), 북송北宋 무렵에 남북 각지에서 출현한 산수화가들이 실경에 입각하여 작품을 제작하면서 나름대로의 준법을 창안하였다. 북송 말기의 한졸韓拙(한 주어)이 지은 《산수순전집山水純全集》에 보이는 피마준*, 점착준(點錯皴), 작쇄준(斫碎皴), 횡준(橫皴), 균이연수준(勻而連水皴)은 가장 오랜 명칭이다. 원말(元末)에 남종화*가 성립한 이후, 그 종류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으며, 명대(明代)의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는 《이고록妮古錄》에서 ‘준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화가의 이름과 준법을 함께 언급하였다.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여러 화론서에는 해삭*(解索), 부벽*, 우점*, 하엽*, 귀면*, 절대준* 외에 30가지 이상의 준법이 열거되어 있다. 또 《개자원화전*》 등은 준을 구사하는 법을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줄리앙 아카데미

줄리앙 아카데미 Académie Julian(프)

1860년 줄리앙Rodolph Julian이 설립한 미술학교. 설립한 지 얼마 안되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사립 미술학교의 하나가 되었다. 이 학교는 대상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엄격하게 학구적이었고, 자연주의*의 문학적, 감정적 형식에 보조를 맞추었다.
이 학교의 가장 유명했던 선생은 부게로Adolph -William Bouguereau(1825~1905)였다. 1888년 당시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세루지에Paul Sérusieur(1863~1927),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랑송Paul Ranson, 발로통Félix Vallotton(1865~1925), 루셀Ker-Xavier Roussel(1867~1944), 이벨스Henri Gabriel Ibels 등은 졸업 후 곧 나비파*를 형성했다. 줄리앙 아키데미가 초기의 실험장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였다.
이들 외에 코린트Lovis Corinth(1858~1925),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놀데Emil Nolde(1867~1956), 라 프레네이Roger de la Fresnaye(1885~1925), 드랭André Derain(1880~1954)과 레제Fernand Léger(1881~1955) 등이 있고, 뒤샹Marcel Duchamp(1887~1968), 바젠Jean Rene Bazain 등도 이 학교에서 수학했다.

중국 고대 문양

중국 고대 문양 中國古代文樣

신석기시대의 토기 문양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채도(彩陶)의 문양이다. 직선, 호선(弧線), 소용돌이 등을 조합시킨 기하학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새, 개구리, 물고기의 사실적인 형태 또는 그것의 변형 문양도 있다. 은殷, 서주西周 시대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보다는 동물문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즉 자연에 서식하는 맹수나 파충류, 조류의 신체 부분을 조합한 상상의 동물형으로 자연신이나 조상신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서주 후기에서 춘추(春秋)시대에는 이러한 문양은 분해되어 원형을 상실하거나 되풀이되는 바탕무늬의 소단위로 소형화된다.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시대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금수(禽獸) 형태의 신상*(神像)이 자연에 서식하는 동물에 가까운 형태로 묘사되고 또 실재하는 동물들과 함께 운기문*(雲氣文) 속에 뛰노는 모티브*가 출현한다. 이렇듯 중국 고대의 문양은 동물문, 운기문, 기하학문이 압도적으로 많고 식물문은 많지 않다.
그리고 단위 문양을 즐겨 반복하여 연속 파상문도 훼룡문*(虺龍文)에서 자주 보이는 C자형을 기본으로 하여 그것을 연계시킨 유운문(流雲文)을 사용하였다. 식물문양의 초기 사례 중 하나는 후한後漢 말께의 기남沂南 화상석*묘에 사엽문(四葉文)과 간단한 덩굴문양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 오리엔트에서 기원한 순수 식물 문양이 언제 중국으로 들어왔는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고 불교와 함께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고 추측된다. 불교미술에서 특히 성행한 식물문양은 특히 당초문*을 비롯하여 팔메트*, 포도당초문,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화려함과 장식성을 더해가는 가운데에서도 운기문은 항상 존재하는 등 독자적인 개성을 지녔으며 이러한 경향은 한국과 일본에까지 파급되었다.

중국 근, 현대 미술

중국 근, 현대 미술 中國近現代美術

19세기 말에 중국은 아편전쟁(阿片戰爭, 1839~1842) 등 열강의 침략에서 비롯된 격동기를 맞이하면서 근대기가 시작되었다. 중국 근대는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던 1840년대부터 5•4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까지로 설정된다. 이 시기의 문학 미술 문화계에서는 중국 전통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서양 문화의 장점을 가미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서구화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미술계에서 새로운 근대 미술교육 기관이 탄생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1906년 남경양강사범학당南京兩江師範學堂과 북경 북양고등사범학교北洋高等師範學校에 서구식 미술 학과가 설치되었다. 남경양강사범학당은 교장인 이서청李瑞淸(이 루이킹)이 일본의 예술교육을 시찰하고 온 뒤 학부에 도화수공과(圖畵手工科)를 개설할 것을 요청하여 생겼다. 도화과에서는 소묘*화(素描畵), 수채화*(水彩畵), 유화*(油畵), 용기화(容器畵), 도안화(圖案畵), 중국화(人物, 山水, 花卉)를 가르쳤고, 수공과에서는 금공(金工), 목공(木工), 죽공(竹工), 칠공(漆工) 등이 있었다.
또한 일본이나 유럽 등으로 유학해 구체적인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이들 유학생들 중 1920년대 중기 서비홍徐悲鴻(쉬 뻬이홍)은 남경으로, 유해속劉海粟(리우 하이수)은 상해上海로, 임풍면林風眠은 항주杭州로 돌아와 정착하여 중국 화단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초 일본의 침략이 목전에 이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상해에서는 현대화가 방훈금龐薰琴이 창립한 국제적인 도몽사都夢社(La Societe des Deus Mondes)가 해체되고 대신 결란사決瀾社(The Storm Society)가 발족되었다. 미술가와 문인들은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자유개방주의자들은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이라는 원리를 내세웠고, 현실주의자들은 좌경화하여 인민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중국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이어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국민당이 패배하기 전 몇 년간 미술은, 방훈금, 목판화가 황영우, 그리고 조무극趙無極(자오 오우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도전에 가까운 서정주의로 특징지워진다. 항주 미술학교 임풍면의 제자인 조무극은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혼미한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풍부한 감수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그의 양식은 중국회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조무극은 1948년 파리로 건너가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시기에 또한 주목되는 사람은 전후 북경에서 스승 부금傅金의 화풍을 따라서 화원풍의 작업을 하던 여류화가 증유하曾幼荷이다. 그녀는 호놀룰루에 이주하여 서구 미술의 가장 발전된 운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건축:19세기 중반이후 외국인들이 들어선 곳은 어디나 서구식 상점건물, 학교, 교회가 세워졌다. 중국적인 요소와 서구적인 요소를 결합한 혼합 양식이 곧 출현하였으나 좋은 작품의 예를 거의 찾아 볼 수는 없다.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고 전통 양식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려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1930년 건축가들이 중국건축연구협회中國建築硏究協會를 창립하였다.
30년 동안 중국 건축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양사성梁思成(량 시쳉)이 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들 건축가들이 세운 작품들은 남경, 상해, 북경의 정부 청사나 대학 건물이다. 이 건축물들은 지붕 형태를 중국 전통식으로 만들고 세부는 회색 콘크리트로 나무를 대신한 것이나 본질적인 구조는 서구식이었다. 1949년 중국이 본토를 장악한 이후의 관청 건물은 러시아 건축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양식은 1950년대 공공건물, 특히 중국 인민 혁명 군사 건축양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회화:최근 백년간의 회화는 근대 중국을 형성하는 전통적 관념과 새로운 관념, 토착 양식과 외래 양식간의 갈등의 연속이었다. 궁정 화가들은 낮은 지위로 전락하였고, 문인 화가들 역시 20세기 초 왕휘王絮(우앙 후에이, 1632~1717)의 학구적인 문인 화풍을 계승한 정통파의 후계자인 재희載熙(1801~1860)와 탕태분湯胎汾(1778~1853)을 제외하면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그 양상이 차츰 변모되어 갔다. 민중예술에서 다른 한편은 상해와 같이 번창한 해안 도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사조에서 영향받은 임백년任伯年(1840~1895)의 힘찬 화풍이 등장하게 된다.
이 새로운 풍조는 조지겸趙之謙(자오 즈지앤, 1829~1884)과 같은 몇몇 작고한 오파*吳派 후계자들에게서 나타났다. 조지겸은 바위틈의 포도나 화훼로 주목을 받은 유명한 화가로 구도나 필치는 근대의 거장 제백석齊白石(자오 츠지앤, 1863~1957)에게 영향을 주었다. 조지겸의 후계자 오창석吳昌碩(우 츠앙스, 1844~1927)은 주로 대나무, 화훼, 암석을 그린 다작 작가(多作作家)로 서예를 곁들여 상당히 효과 있게 작품을 구성하였다.
전통적인 화풍을 주장한 20세기 화가 중에는 화가, 교사, 감정가인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도 있다. 이들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를 보인 인물은 장대천張大千(즈앙 따지엔)으로 1899년 사천성四川省에서 태어나 청말(淸末)의 문인 화풍을 익힌 바 있다. 이러한 흐름과는 반대로 서구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중국 현대미술에 힘쓴 인물로 고검부高劍父(까오 지앤푸)가 주목된다. 그는 도쿄로 유학해 음영법이나 명암법과 같은 서구적인 기법들과 현대적인 소재를 도입하는 일본화운동(日本化運動)의 영향을 받았다. 고검부의 영남파*嶺南派 작품들은 너무 강한 일본 정서와 의도적으로 이룬 종합화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전통적인 기법을 현대적인 주제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 이후 들어서는 현대 사회주의 강국으로 변모시키는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술도 정치와 국가에 봉사하게 되었다. 인민에게 봉사하라는 모택동毛澤東(마오 쩌뚱)의 훈계에 영향받은 1950년대 미술가들은 노동자와 함께 살고 ‘이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농장과 공장으로 들어갔다. 전송암錢松嵒(치앤 송안), 이가염李可染(리 크란) 등과 같은 활동파는 이념적인 내용을 그렸다.
1960년대 교육, 학문, 미술에 만연하던 ‘부르주아적’ 경향을 일소한 1966~1969년 문화대혁명기에서 미술 문화의 통제는 가혹하였다. 대학, 미술학교, 박물관, 미술 전시는 폐쇄되었다. 이 시기에는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미술 활동의 중심지는 도시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장과 시골 공동체로 옮겨졌고, 교육받은 미술가들은 서로를 일반 대중과 일체감을 갖도록 강요받았다. 노동자, 농민, 군인 등 거대한 군중이 아마추어로서 미술 활동을 하였다.
장식미술:장식미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외국 양식과 침체된 정통 양식간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장인의 기술 수준은 높았지만, 1950년대 이전에 제작된 자기*, 칠기*, 옥기* 등의 공예품은 독창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본토를 점령한 후 전통 공예 기술은 북경 수공업연구소手工業硏究所 후원으로 활발해졌다. 또한 경덕진景德鎭의 대규모 공장들은 점차 기계화되었고, 디자인에 대한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중국 신석기시대 미술

중국 신석기시대 미술 中國新石器時代美術

신석기시대에는 인류가 수렵과 채집 등 자연계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농경, 목축에 의한 생산 경제로 편입되었고, 또한 농경에 의한 생산 활동은 정착생활로 진전되었으며, 본격적인 미술의 창조라고 간주되는 토기가 생산되었다. 중국의 신석기 토기에는 앙소仰韶문화의 홍도*(紅陶)와 채도(彩陶), 하모도河姆渡문화와 대문구大汶口문화의 흑도*(黑陶)와 채도, 용산龍山문화의 흑도, 청련강靑蓮江문화의 홍도와 채도 등이 있다.
앙소문화는 스웨덴의 지질학자 안데르손J. G. Anderson이 발견한 하남성河南省 지현의 앙소유적에 의해 명명되었다. 앙소문화는 중국의 원시 모계 씨족사회를 바탕으로 농경업을 주로 하여 채집, 어로, 목축을 병행하였다. 현재 발굴된 앙소문화의 유적은 1천개 이상에 달하는데, 이중 방사성동위원소 C14에 의해 측정된 37개의 표본에 따르면, 기원전 4515~2460년에 걸쳐 번성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반파유적을 보면, 원형의 도랑으로 둘러싸인 취락지와 도랑 밖의 공동묘지 및 토기가마로 생겨났다. 취락지는 원형, 방형, 장방형의 세 가지인데, 초기의 반지하식 수혈주거와 후기의 지상식 주거가 있고, 저장용 구덩이가 붙어 있다. 토기는 가는 모래로 만든 홍갈색 도기가 가장 많고 진흙으로 만든 홍도도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앙소문화의 토기는 다양한데 식기, 물그릇, 취사그릇으로 나눌 수 있다.
채도의 문양에는 기하학적 문양 외에 동물문이 많고, 사람의 얼굴, 물고기, 사슴 등의 형상이 단독으로 그려진 예가 많다. 앙소 문화기의 채도는 정제된 양질의 도토를 원료로 하는데, 작은 그릇은 손으로 빚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윤적법(輪積法)으로 성형되었다. 채색 안료는 흑색과 적색의 광물질 물감으로 돌을 갈아 분말로 만들어 물에 녹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문양을 그린 도구는 식물성 섬유로 만든 붓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채도의 소성 온도는 일반적으로 1,000도 안팎으로 보인다.
용산 문화는 광택 있는 흑토를 특징으로 하는데, 산동성山東省 역성현歷城縣 용산진龍山鎭의 성자애城子崖 유적을 표준 유적으로 한다. 용산문화는 산동, 하남 외에 하북河北, 산서山西, 섬서陝西, 강소江蘇의 각 지역에도 분포되어 있고 그 지역성의 차이가 지적되고 있다. 주거지는 반지하식의 수혈 주거이며, 벽과 바닥에는 짚을 섞은 흙을 바르고 바닥을 석회로 발라 굳힌 것이 특징이다. 주거지 근처에는 주머니 형태의 저장용 수혈을 따로 설치하였다. 토기는 회도의 흑도를 주로 만들고 홍도는 감소하였다. 녹로의 사용에 의해 기벽이 대단히 얇아졌고, 조형적으로도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대문구문화의 용산 문화기에는 동물의 특징을 생생하게 잘 포착하고 있는 동물형의 정*(鼎) 등이 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순동의 칼 등이 출토됨은 물론 동을 녹였던 흔적도 발견되어 석기에서 청동기로 이행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생산이 향상되어 씨족공동체가 와해되고 노예제 사회가 도래하였다.

중국 청동기

중국 청동기 中國靑銅器

중국에서는 은殷 시대 초부터 청동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기물이 제작되었지만, 미술품으로서는 당唐, 송宋 시대까지의 것이 중시된다. 청동기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구분되는데, 은殷, 주周 시대와, 진秦, 한漢시대 이후는 기물의 종류나 용도가 모두 다르다. 은, 주시대의 청동기에는 이기*와 병기(兵器)가 있다. 이기는 제기(祭器)로서의 주기(酒器), 식기(食器), 수기(水器), 악기(樂器)로 분류되지만, 각각 여러 종류의 다양한 기물이 있으며, 공예적으로도 매우 뛰어나 세계의 청동 제품 가운데에서도 최고 수준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주나라 때에 청동은 ‘길금(吉金)’이라고 불렸으며, 그러한 기물들에 새겨진 문자, 즉 금문*(金文)은 그 시대의 역사나 예악을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이며, 그것을 연구하는 금문학(金文學)이 성립하였다. 병기도 은시대부터 제작되고 있는데, 과(戈), 극(戟), 모(矛), 검(劍), 촉(鏃), 부(斧), 월(鉞), 두(兜) 등이 있으며, 또 호미(鋤), 낫 등의 농기구도 있다. 진, 한시대 이후에는 청동기가 중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물의 종류는 많아, 검, 극, 노기(弩機) 등의 무기, 용기(容器), 취사도구, 화로, 초두(鐎斗), 거마구(車馬具), 화폐, 거울, 대구*, 인장*, 도량형기(度量衡器), 불상*, 병부(兵符) 등 다양하다.
청동은 동(銅), 주석, 납을 주성분으로 하며, 기타 미량 성분을 포함한 합금인데, 기물을 제작하는 데는 정련(精鍊), 제범(製范), 주조(鑄造)의 각 공정이 있다. 장군회(將軍盔)라고 불리는 토기*는 제련용의 도가니(坩堝)이다. 범(范, 주물틀)에는 점토형(粘土型)과 석형(石型)이 있는데, 직접 주형을 만들어 주조하는 직주법(直鑄法)외에, 처음에 흙으로 만든 모형(실물과 같은 형태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주형(鑄型)을 만드는 모범법(模范法), 혹은 내범(內范)을 핵으로 하여 그 표면에 밀랍*을 입혀서 모형을 만드는 납형법(蠟型法) 등의 주조법이 있다.
주형은 상하 두 주물틀을 합친 간단한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내형과 외형으로 나누어지며, 양자 사이에 간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틀보조물을 둔다. 외형(外型)은 몇 조각으로 나뉘어진 것을 짜맞춘다.
문양이나 명문*은 주형에 직접 새겨넣는 일도 있지만, 단위 문양을 스탬프처럼 눌러 찍기도 하고, 모형 위에 부조*나 선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귀나 손잡이 또는 본체의 장식은 별도로 주조하고, 본체를 만들 때에 주조해 넣는 수법은 이미 은시대부터 사용되었다. 녹송석(綠松石)을 새겨넣는 상감*의 기법은 은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전국(戰國)시대 이후에는 금, 은, 동, 옥, 유리 등의 상감이나 도금술 등이 출현하였다.

중봉

중봉 中峰

필획에 있어서 중심이 흐트러뜨리지 않는 용필 방법의 하나. 글씨를 쓸 때 붓끝이 항상 글자의 점획(點劃)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고 해서 중봉이라 한다. 역대 대부분의 서예가들이 글씨에 있어서 이를 중요시하였다.

중앙식 교회

중앙식 교회 中央式敎會
central-plan church(영)

평면이 다각형이거나 원형으로 된 교회. 또는 네개의 똑같은 길이로 된 부속 건물을 구심적으로 배치한 교회 또는 성당. 교차 부분은 일반적으로 돔*으로 덮여 있다. 서양 기독교 성당의 기본형이었던 바실리카* 식에 대립하는 형식 용어로, 그리스식 십자형 교회(Greek-cross church)라고도 함.

중앙아시아 미술

중앙아시아 미술 Central Asian Art(영)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미술로 이 지역은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하여 동쪽의 타림 분지 주변 지역인 동투르케스탄과 고원 이서(以西) 지역인 서투르케스탄으로 나뉘어진다. 동투르케스탄은 중국의 신강新疆 위구르자치구 지역으로서 서역이라고도 한다. 서투르케스탄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이 위치한 지역을 말한다. 중앙아시아를 동, 서투르케스탄으로 부르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대부분 투르크 계통의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9세기 이전에는 이란 계통의 민족들이 오아시스 도시들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고대에는 동서무역로인 실크로드*가 이 지역을 지나갔기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번성했으나 해로(海路)의 발달로 점차 역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러시아의 올덴부르그S. F. Oldenburg, 스웨덴의 헤딘S. Hedin, 영국의 스타인A. Stein, 독일의 그륀베델A. Grünwedel과 르 코그A. von Le Coq, 프랑스의 펠리오P. Pelliot,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 등 각국의 탐험가들이 동투르케스탄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였다. 또한 서투르케스탄 지역의 유적도 러시아 학자들과 각 지역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고 있어 과거 이 지역 미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대부터 민족과 국가의 교체가 자주 있었으며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에 역사, 문화적으로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미술 역시 동서 여러나라의 미술이 혼합되어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적인 양식*도 발전시켰다. 파르티아*의 수도였던 니사Nisa(기원전 2세기~서기 10), 소그디아의 도시인 아프라시압Afrasiab(현 사마르칸트)과 피안지켄트Piandjikent 등 서투르케스탄의 유적지에서는 궁전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굴되었다.
동투르케스탄의 건축물은 평지에 건립된 불교 사원과 석굴 사원 그리고 주거지로 구분된다. 투르판 지역의 불교 사원은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어졌는데 스투파*를 둘러싼 형식이다. 또한 쿠차 지역에는 키질, 쿰트라, 쇼르축 등 많은 석굴 사원이 남아 있다. 도읍지였던 카라호자(高昌故城)와 야르호토(交河故城)에는 관공서, 주택, 사원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회화는 나무판, 종이, 비단 위에 그림을 그린 예들도 남아있으나 대부분은 벽화*이다. 쿠차 지역의 석굴 사원이나 미란, 투르판 지역의 불화*(佛畵)들은 불전도*와 본생도*가 주된 주제이다. 화풍은 로마, 인도, 중국 등 주변 지역의 영향을 받아 다채로운 양식을 보여주지만 서투르케스탄 지역은 이란의 영향을 받았다. 누란樓蘭에서는 ‘연년익수(延年益壽)’ 등 길상어(吉祥語)를 짜 넣은 한漢의 비단과 금속기, 칠기*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헤르메스 신을 표현한 모직물도 발견되어 이 지역이 동서문화가 교류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 작품의 대부분은 소상(塑像)이며 동투르케스탄에서는 청동, 주조*, 목조가, 서투르케스탄에서는 석조 유물이 약간씩 출토되었다. 소상은 점토로 형태를 만들어 구운 테라코타*, 회반죽으로 만든 스투코*, 점토에 동물 털이나 볏짚을 섞어서 만든 소조상(니상(泥像)이라고도 함)으로 나누어진다. 동투르케스탄의 남쪽 지역과 북쪽의 툼슉에는 3~6세기 초에 해당되는 것들이 많고, 키질과 쿰트라에는 6~8세기, 쇼르축에는 7~8세기, 투르판 지역의 조각들은 8~10세기에 속하는 예들이 많다. 처음 남쪽 지방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에는 그레코-로만 양식이 나타났으나 그 후의 조각에서는 간다라* 후기나 이란, 중국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서투르케스탄의 조각 중에는 틀을 사용하지 않고 제작한 아지나 테페의 것이 유명하다.

중층 주식

중층 주식 重層柱式
colossal order(영)

하나의 원주*, 대주* 또는 편개주가 건물의 2층 또는 그 이상의 층에까지 걸쳐 있는 주식*. 건물의 기념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