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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미술

춘추전국시대 미술 春秋戰國時代美術

주周는 수도 종주宗周(서안 부근)를 견융犬戎에게 빼앗기고 성주成周(낙양 부근)로 천도하였는데, 이후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의 전국통일까지 550년간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고 한다. 각 나라들이 부국강병에 힘써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사상과 학문이 번성하였다.
건축: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의 연하도燕下都, 평산현平山縣 중산국고성中山國故城 산동현山東縣 임치의 제성齊城, 등현鄧縣의 설성薛城 등에서 전국시대의 도성터가 발견된다. 이들 도성은 대부분 방형(方形) 평면으로 주위를 흙담으로 둘러싸고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며 내성에는 성문, 도로, 하수 등의 설비가 있고, 궁전지구, 수공업지구, 일반주거지구로 구분되어 있다. 궁전건축은 판축법(版築法)으로 굳힌 흙단 위에 세운 목조 건물로, 주초(柱礎)로 석재를 쓴 것이 있다. 또 처마를 받치는 두공*(斗拱)의 원형이 이미 나타났고 지붕은 박공*이거나 평지붕이다. 그리고 기와를 이었고 전국시대에는 둥근기와의 처마 끝에 와당*을 달았다.
공예:청동기* 기종은 서주西周 후기와 거의 같으나 춘추 말기부터 기마 유목민족과의 접촉으로 동물 의장을 주제로 하는 문양이 더해진다. 또 하남성河南省의 정국鄭國, 산서성山西省 진국晉國, 안휘성安徽省의 초국楚國, 하북성河北省의 중산국中山國 등에서 출토된 청동기들은 지역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납형(蠟型)에 의해서 정교한 청동기도 주조(鑄造)하였으며, 유금, 금은착(金銀錯), 옥, 유리, 송록석(松錄石) 상감* 등 다채로운 장식이 이루어졌다. 금문*(金文)은 주명(鑄銘)에서 각명(刻銘)으로 변하고, 조서(鳥書) 등의 장식문자들이 유행하였다. 옥기*는 춘추 후기부터는 절탁(切琢)기술이 현저히 진보하여 용*(龍)이나 봉황 등의 동물형을 투조(透彫)로 나타낸 장신구나 용기가 제작되었다. 칠기*는 실용기나 제사 용기가 중심이 되었고, 관, 악기, 무기의 자루로도 쓰였다. 칠기의 문양으로는 운기문(雲氣文)이 대표적이며 신선(神仙), 영수(靈獸), 괴조(怪鳥)도 있다.
회화:청동기에서 상감이나 선각으로 한 회화적 표현을 찾을 수 있다. 그림의 주제는 연회, 수렵, 동물, 신선 등이 S자형, C자형의 문양 사이에 배치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회화는 1949년 2월 장사진가대산초묘長沙陳家大山楚墓에서 발굴된 인물용호도(人物龍鳳圖)의 내용을 담고 있는 백화*(帛畵)와 1973년에 재발굴이 이루어진 장사자탄모초묘長沙子彈牟楚墓에서 출토된 인물어용도(人物御龍圖)의 백화이다. 이것은 모두 가는 필선으로 되어 있으며, 인물은 측면묘사이다.

출행도

출행도 出行圖

동양 풍속화*의 한 화제(畵題). 군왕(君王)이나 귀족들의 장엄하고 눈부신 행렬 광경을 그린 것이다. 순행(巡幸) 수렵 선유(船遊) 참배 등을 위해 수레나 가마를 타고 행차하는 대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대(漢代)의 화상석*과 요양遼陽 한묘漢墓 벽화*의 <출행도>, 당대(唐代)의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 벽화* 등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중 특히 요양의 한묘벽화에 그려진 <출행도>는 급히 달리는 말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고, 자세와 동세(動勢)를 나타내는 윤곽선에 의해 생동감있는 인물형상이 표현되고 있어, 고대회화가 고졸하고 간략한 단계를 벗어나 정밀하게 묘사되는 단계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출행도는 계속 그려져 원대(元代)의 화가 유관도劉貫道(리우 꾸완따오)가 그린 <원세조출렵도元世祖出獵圖>(대북臺北 고궁박물원) 등과 같은 작품들이 남아있다. 청대(淸代)에 오면 강희제康熙帝(재위 1662~1722)가 당시 강남지방의 반청운동(反淸運動)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여섯 차례의 남순(南巡)을 행하였던 과정을 기록한 <강희남순도권康熙南巡圖卷>과 같은 대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에는 고구려 고분에 출행도가 보이고 있다. 357년에 축조된 안악 3호분의 주실 회랑(主室廻廊)에 그려진 <대행렬도大行列圖>는 출행도의 일종이다. 우차(牛車)를 탄 묘주인과 호위하는 인물이 250여명이나 되는 인물구성이 장대한데, 길이가 10m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 벽화는 소재나 그 표현방법에 있어 중국의 한과 요양 고분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 408년에 만들어진 덕흥리德興里 고분에 그려진 <행렬도>가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왕이나 왕세자들의 행차를 그린 그림들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것도 넓은 의미의 출행도로 볼 수 있다.

취미

취미 趣味 Geschmack(독) taste(영)

미적 대상*을 감상*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능력. 이 능력은 인간의 감정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관적이다. 따라서 취미에 법칙을 세우는 것은 곤란하다. 시대성과 인간성으로부터 현저히 떨어진 취미는, 쓸데없이 표면적이고 완고한 자기 자랑이 되기 쉽다. 통속적으로는 개인 생활에서의 여기(餘技)나 오락 등을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원래 독일어의 ‘Geschmack’나 영어의 ‘taste’는 미각을 뜻했지만, 이것이 바뀌어 넓게는 일반에 대한 판정 능력, 좁게는 미의 판정능력의 의미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취미는 가지가지Chacun a son goût’ 라든가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없다’는 말로 일컬어지듯 미적인 의미에서의 취미 내지는 그 판단에도 큰 차이가 있음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차이로 보는가, 혹은 본래 일치해야 할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취미 문제의 처리 방법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철학적 미학에서는 취미 대상에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며 칸트Immanuel Kant는 이를 근본적인 문제로 삼고 있다. 모든 인간의 근원적 동일성이라는 계몽주의적 도그마의 영향 아래 칸트는 미의 반성적 취미에 관해서 ‘공통감Gemeinsinn’의 전제하에 그 주관적 보편타당성을 정립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보편성은 취미 능력에 있어서 형식적-기능적 요소와 질료적-내용적 요소 가운데 전자에 대해서만 타당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취미는 선천적 소질에 의해 규정되는 면과 경험을 쌓은 결과 달성되는 면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취미는 어느 정도까지 육성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가령 페히너G.T. Fechner는 이에 대해서 타인의 감화, 자기의 고안, 습관, 연습, 연상이라는 다섯가지 범주를 들고 있다. 요컨대 취미는 개인의 생애를 통해서 변화하고 또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특히 시대, 민족, 지역 등의 차이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나 또한 일정한 시대, 민족에 있어서는 그 전체에 공통되는 취미가 일종의 ‘객관적 정신’으로 지배하고(예를 들면, 로코코 취미, 중국 취미 등), 한 개인에 있어서도 그 정신 발전을 통해 취미의 어떤 지속적 특징이 인정된다.
이렇게 취미는 타인에 대한 특수성과 자신에 대한 보편성을 함께 가진다는 점에서 유형으로서의 통일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주관적 통일이 예술 작품에서 객관화된 것이 바로 양식*이며, 이들 양 개념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대응한다. 옛 미학이 18세기의 영국을 비롯하여 취미를 중심 개념으로 삼았던데 반해 근래의 미학, 특히 예술학*은 오히려 양식을 주요 문제 영역으로 하지만 취미는 여전히 미학의 기본 개념이며 현대에 있어서도 특히 하이만은 이 개념의 전개를 상세하게 연구하고 있다. 또 양식이라는 말이 좁게는 ‘좋은 양식’의 의미로 쓰이듯이 취미라는 말도 ‘좋은 취미, 올바르고 세련된 취미’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취미가 풍부하다라든가 취미가 없다든가 하는 말들은 이 좁은 의미의 취미의 유무(有無)를 의미한다. 이러한 가치 개념으로서의 취미는 상술한 유형개념으로서의 취미와 구별되어야 한다.

측랑

측랑 側廊 aisle(영)

로마의 바실리카*나 성당에서 신랑*과 평행을 이루는 복도로 아케이드*나 열주*에 의해 구분되는 좁고 긴 공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초기 기독교 성당에서는 좌우의 측랑을 각각 남녀 전용석으로 두었다.

→ ‘내진’ 도판 참조

치 觶

→ ‘이기’ 참조

치성

치성 雉城

한국 성(城)의 구조물의 일부로,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벽.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싸울 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시설로 이곳에 누각이 있으면 ‘포루’라고 한다.

치인

치인 治印

→ 전각

치형돌기

치형돌기 齒形突起

동양화에서 산의 윤곽선 바깥쪽에 이빨 모양으로 돋아난 부분을 가리키는 것. 이곽파* 화풍, 특히 금대(金代) 및 원말명초(元末明初)에 도식화된 산수화*에 자주 나타난다.

친퀘첸토

친퀘첸토 Cinquecento(이)

이탈리아어로 500이라는 뜻.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1500년대, 즉 16세기의 시대 개념이나 시대 양식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좁은 의미로는 특히 16세기초의 이탈리아 성기(盛期) 르네상스 양식을 가리킨다. 친퀘첸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 라파엘로 Raphaello Sanzio(1483~1520), 티치아노Tiziano(1485~1576), 지오르지오네 Giorgione, 코레지오Correggio,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 홀바인Hans Holbein 등 유명한 거장들이 활약했던 미술사상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와 비교하여 15세기는 콰트로첸토*Quattrocento라고 불린다.

→ ‘르네상스 미술’ 참조

칠기

칠기 漆器

옻칠을 하여 보강하거나 장식한 기물이나 기구로서 동양 특유의 공예품. 옻은 한국,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만 채취되는 옻나무의 수지(樹脂)이다. 칠에는 옻나무에 흠집을 내어 받아낸 생옻과 옻나무를 벌채해서 불에 구워 수분을 제거하고 얻어낸 정제된 옻이 있다. 생옻을 입히면 처음에는 검은 빛을 띠다가 점차 검붉은 빛이 되고 후에 붉고 투명한 색으로 변해서 맑고 윤이 흐른다. 정제된 옻은 생옻에 철분을 가해서 검게 흑칠(黑漆)하거나 안료를 섞어 주칠(朱漆)로 바른다. 용기의 경우는 겉은 흑칠을, 안쪽은 주칠을 한 것이 많다. 옻칠은 고온에 잘 견디며 습기를 막아주고 병충해의 피해를 예방하여 재질의 부패를 막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칠기의 종류로는 바탕재에 따라 목심(木心)칠기, 죽심(竹心)칠기, 가죽에 칠한 칠피(漆皮)칠기 또는 피심(皮心)칠기, 녹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금속에 칠한 금태(金胎)칠기, 토기나 도기 표면에 칠한 와태(瓦胎)칠기 또는 도태(陶胎)칠기, 종이 위에 칠한 지승(紙繩)칠기 또는 건칠(乾漆)칠기, 거북 껍데기에 칠한 대모(玳瑁)칠기 등이 있다. 최고(最古)의 칠기는 중국에서 7천년 전부터 발견되었고 은주(殷周)시대 이래 계속 발전해왔다. 전국(戰國)시대에는 목심칠기가 완성되었고 한대(漢代)에는 협저(夾紵)칠기가 성행하였다. 당대(唐代)에는 은이나 나전(螺鈿)에 정교한 문양을 새기는 평탈*(平脫)칠기가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청동기 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예로, 고구려 사신총과 집안 오회분 등의 칠관(漆棺), 백제 무녕왕릉 출토 칠관과 두침(頭枕), 족좌(足座)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의 금관총金冠塚, 천마총天馬塚, 황남대총皇南大塚, 안압지雁鴨池에서도 많이 출토되었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나전칠기* 제작에 많이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