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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트라

탄트라 Tantra(범)

7세기경 힌두교* 내에서 베다의 브라마니즘에 반대하는 종파가 나타났는데, 탄트라는 그들의 신앙과 관련된 경전(經典)을 지칭한다. 그들은 여성과 성적인 상징, 비밀스러운 비의(秘儀)를 강조한다. 경전의 이름을 따서 이것을 탄트리즘Tantrism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밀교(密敎)’라고 한다. 탄트리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인도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근본적으로 비슷하지만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매우 다르다. 탄트리즘에서는 주문을 계속 반복하는 진언(眞言)요가Mantrayoga, 상징적인 도형들로 이루어진 얀트라Yantra나 만다라*Mandala 등의 방법을 통해 더욱 더 빨리 해탈에 이른다고 믿었다.
또한 탄트리즘의 제의는 힌두교에서 터부시하는 것들을 허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 가지 M인 술(madya), 고기(māmsa), 물고기(matsya), 수인*(mudrā), 성교(maithuna)이다. 이들은 남신과 여신, 정신과 물질 등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을 중요시하며 특히 여신의 성적인 힘(샥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탈구축

탈구축 脫構築 deconstruction(영)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의 입장 일반을 표명하는 용어로, 탈구조나 해체로도 번역된다. 그 사유방식은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적 작업, 푸코Michel Foucault와 라캉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바르트Roland Barthes의 후기 입장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대체로 구조주의에서 후기 구조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은 1968년의 5월 혁명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은 특수한 정치적 패배와 환멸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후기 구조주의는 언어가 고전적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안정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미술 비평*의 경우, 이 용어가 실제적으로 적용된 시기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이며 미국의 비평권 내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흡수되어 나타났다. 일단 그것은 탈모더니즘의 입장을 표방하면서 인식론적 측면에서는 모더니즘*의 인식구조와 그 한계를 드러낸다.
이에 따라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1994)와 프리드Michael Fried의 모더니즘 입장 일반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단선적인 진보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며 역사주의적인 인식론의 형태로 이해된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회화에서의 평면성 획득도 이 같은 역사주의적 인식 과정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후기 구조주의는 모더니즘의 가치 체계 및 규범이 진리, 본질, 독창성, 순수성 등의 절대개념에 상반되고 대립되는 요소들을 제거해 왔던 사실에 주목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복합성의 차원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처럼 복합성의 차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탈구축의 방법론을 많은 부분 조각*에 적용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경우처럼 매체*의 다양성이라는 조건으로 표출된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매체의 순수성과 인식 구조의 단면성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구체적인 양상은 미니멀 아트* 이후 조각 분야에서의 키네틱 아트* 혹은 사진*, 비디오 아트* 등에서 나타나는 비조각적인 요소(움직임, 기계 등의 매체)의 사용에서부터 건축과 풍경이 조각의 구성 요소가 됨으로써 모더니즘 이전에 있어왔던 인식 구조상의 미분화된 상태를 극복, 복합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지미술*까지를 포괄한다.
회화에서의 해체적 충동을 설명하기 위해 오웬스Craig Owens는 텍스트성이나 알레고리* 개념을 사용한다. 그것은 정반대의 의미들이 복잡하게 대립되어 있는 상태이거나 완결된 형태가 아닌 끝없이 진행된다는 의미의 불확정의 상태, 혹은 해독불가능성의 의미로 나타나며, 양식상으로는 불화와 단절을 초래하는 요소들의 병렬, 축절, 차용 등으로 변별된다. 이에 상응하는 작품으로는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컴바인 페인팅*과 롱고Robert Longo의 영화 스틸을 차용한 그림 등이 있다.
또한 기호의 복합체로 이루어진 문화나 신화를 해체하는 입장에서 이외의 많은 재현 회화를 통해 그림의 층위를 드러낸다는 탈신비화를 유도하기도 한다. 한편 셔먼Cindy Sherman류의 작품을 통해서는 이원적 대립 관계의 제1원리에 따른 남성위주 사회에서 드러나는 남성의 대립물로서의, 혹은 타자로서의 여성에 관한 인식을 유도한다. 탈구축, 혹은 해체 전략이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규명하려는 시도인 한에서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또한 후기 구조주의가 당대의 정통 좌익 정치가 실패했음을 비난함에 있어서는 정당했던 것만큼 그것은 부분적인 진실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탈구축의 전략은 비역사적이고 정치적으로는 회피적인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적 성향을 불가피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술 비평의 경우도 구체적인 현실 접근이나 적극적이며 총체적인 인식을 결여한 채 단지 형식상의 확장만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탈구축의 본래의 성과를 살리기 위한 한 방편으로 미술 비평에서의 탈구축의 적용 범위와 가능성도 충분히 타진돼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갖고 있는 인식론적 한계가 어디에 있으며, 또 현재의 문화 양상을 반영함에 있어 왜 전망의 제시가 불가능한지를 검증하는 일이다. 특별히 탈구축의 부분적인 수정으로는 사이드Edward W. Side의 비평이론이 있고 전면적인 비판적 해석으로 제임슨Fredric Jameson과 이글턴Derry Eagleton의 비평이론이 있다.

탑 塔

탑은 형태에 따라 복발형탑(覆鉢形塔), 감탑(龕塔), 주탑(柱塔), 안탑(雁塔), 라마탑(喇嘛塔), 다보탑(多寶塔), 보협인탑(寶篋印塔), 오륜탑(五輪塔) 등으로 나누어지며, 재료에 따라 목탑(木塔), 전탑(塼塔), 모전석탑(模塼石塔), 석탑(石塔), 니탑(泥塔), 청동탑(靑銅塔), 금동탑(金銅塔) 등이 있다. 인도에서는 스투파*라 하여 복발*형으로 마치 분묘와 같은 형태의 탑이 유행하였는데, 시대가 지나오면서 점차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탑형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전탑과 목탑, 한국에서는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주류를 이루면서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4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하여 인도,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의 탑파가 만들어졌다. 목탑은 나무로 만든 탑으로 인도에서는 보기 드문 편이나 중국에서는 성행하였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형식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다층의 누각형(樓閣形) 목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대표적인 목탑으로 신라의 〈황룡사지皇龍寺址 9층 목탑〉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쌍탑雙塔〉을 들 수 있다.
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돌을 쌓아서 만든 탑으로 분탑(墳塔) 또는 묘탑(墓塔)이라고도 한다. 중국 서진(西秦)시대에 석탑 건립에 관한 문헌이 보이며 현존하는 예로는 5세기경에 만들어진 운강석굴* 안에 있는 4각5층석탑이 있다.
한국에는 1,000여기 이상의 탑이 현존하는데 이 중에서 석탑은 재료의 견고성과 내구성으로 인해 오늘날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석탑은 7세기경 백제와 신라에서 이전의 목탑구조를 모방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 석탑의 특징은 목탑의 구조를 최대한 재현하였다는 점으로, 백제의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에서 가구수법*(架構手法), 배흘림 기둥* 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감은사지感恩寺址 삼층 석탑三層石塔〉에서 볼 수 있듯이, 상하 2층의 기단(基壇)과 우주(隅柱)가 있는 옥신(屋身), 5단의 옥개(屋蓋)받침, 추녀 끝이 약간 들리는 특징 등 석탑양식의 전형이 성립된다. 8세기에 이르면 하층 기단의 탱주가 둘로 줄고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지는 등 축소현상이 나타난다.
8세기 말부터는 규모도 더욱 작아지고 간략화되는 반면 조각솜씨가 정교해져 표면에 불, 보살 등의 장식문양이 조각된다. 9세기경에는 조각장식이 더욱 유행, 불국사 다보탑과 같은 이형(異形)양식의 석탑이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석탑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각 지방의 색채가 가미되면서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경상도 지역은 신라석탑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백제지역에서는 목조가구(架構)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새로운 유형의 석탑으로 〈월정사月精寺 팔각구층석탑八角九層石塔〉 〈경천사지敬天寺址 십층석탑十層石塔〉 등이 있는데, 방형중층(方形重層)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석탑은 초기에는 방형중층이 일반화되다가, 후기에 전란 등으로 석탑 건립이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전탑은 벽돌로 만든 탑으로서 중국에서는 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목조건축의 처마와 두공*(枓栱)을 모방한 전탑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숭악사嵩岳寺 12각5층전탑〉(523)이 가장 오래된 예이다. 이러한 형식은 당, 송대(唐宋代)에 이르기까지 많이 건립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삼국시대에 건립되었으나 화강암을 사용하고 옥신석에 감실*(龕室)을 설치한 것 등은 중국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에서는 석재로써 전탑을 모방하여 만든 모전석탑이 전탑보다 유행하였는데 그 형태는 석재를 벽돌과 같이 잘라서 전탑 모양으로 축조한 것과 석탑의 기본형식을 따르면서 표면을 전탑과 같이 가공하여 축조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후자의 모전석탑형식은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건립되었다. 그 밖에 과거불의 하나인 다보불(多寶佛)을 모신 탑을 다보탑,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他羅尼經》을 넣은 보협인탑, 사리탑* 등이 있다.

탑문

탑문 pylon(영, 라)

문(門)을 뜻하는 그리스어. 이집트 신전 입구에 사용되었다. 탑문은 쇠시리 형관들에 의한 문간과 홈에 의한 배내기 장식으로 구성된다. 정면의 홈에는 깃대가 있고 표면은 보통 부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탑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아마도 오벨리스크*나 거상(巨像), 그리고 스핑크스*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탑화

탑화 榻畵

모사(模寫)의 한 방법. 투사(透寫)라고도 한다. 특정 그림 위에 밑이 비치는 종이를 대고 모사한 것을 말한다.

탕카

탕카 Than-ka, Than-sku(티)

라마교* 사원의 벽이나 본당의 정면에 걸어 승려, 신도들의 일상 예배에 사용하는 탱화*. 10세기 경에 티베트*에서 처음으로 그려졌고, 현존하는 것은 17~19세기에 제작된 것이 많다. 탕가는 그 형식에 따라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①만다라 형식을 취한 것;힌두교*의 얀트라(yantra, 특수한 도형)에 가까운 기하학적인 모양 중에서 작게 존상(尊像)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②존상을 중심으로 하여 그린 것;왕가에서 가장 많은 형식으로, 라마교에서 유명한 불, 보살, 명왕* 등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그에 관계된 여러 존(尊)을 그 둘레에 그린다. 라마교 각 파의 조사상(祖師像)을 중심으로 하는 것도 있다. 총가바 등의 조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불상과 보살을 그 아래 나무처럼 배치한 제존수(諸尊樹, tshogsśin)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③다수의 존상을 그린 것. ④이야기를 그린 것;석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둘레에 생전의 행적을 늘어 놓은 것이다. 생사륜*, 중유도(中有圖), 성신도(星辰圖) 등이 있다. 그 밖에 각각의 특성을 합해놓은 것도 있다.

태창파

태창파 太倉派

→ 누동화파

탱화

탱화 幀畵

불교미술*의 일종. 단폭(單幅)의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벽에 거는데, 가장자리에 테를 두르고 심(村布)을 댄 뒤 걸끈을 매달아 옮겨 걸고, 접을 수 있게 한 불화*의 한 유형이다.
중국에서는 돈황석굴*에서 탱화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대개 불상 및 밀교만다라(密敎曼茶羅) 등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탱화가 그려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탱화로서 13세기경의 고려작품이 국내와 일본, 구미지역에 상당수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탱화는 사찰의 전각내에 존상 뒤에 거는 후불화(後佛畵)가 중심이 되며 좌우 벽면에 걸리기도 한다. 현존하는 불화는 거의 탱화의 형식으로 남아있다. 후불탱화의 내용은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이 주종을 이루고, 불, 보살탱화, 신중탱화, 영단탱화(靈壇幀畵) 등으로 분화된다. 영단탱화에는 감로도*나 시왕*도 등이 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민간의 신격이 불교의 호법선신으로 포용되는데, 이러한 신격을 그린 산신탱화, 칠성탱화, 조왕탱화 등이 있다. 탱화 중에는 괘불도 있는데, 괘불은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만든 거대한 탱화로서 기우제(祈雨祭)나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와 같은 야외법회를 마련할 때 걸도록 만든 예배물이다.

터치

터치 touch(영) touche(프)

본래는 접촉이라는 뜻이나 미술 용어로는 필치(筆致), 필촉(筆觸), 필세(筆勢) 등으로 번역된다. 터치는 작가의 감동, 감격을 단적으로 화면에 전하는 구실을 하며, 유화* 기법 가운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터치는 표현 기술의 유력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종종 작가의 주관적인 심정을 화면에 나타내므로, 그 작가의 개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상주의* 이후의 주관적 회화에서는, 색조분할(色調分割)의 이론에 따라 분할된 필촉, 즉 터치가 중요시 되었다.
모네Claude Monet(1840~192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뭉크Edvard Munch(1863~1944), 루오Georges Rouault(1871~1957),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k(1876~1958) 등은 각각 개성적이고 특징적인 터치를 써서 독자적인 표현을 전개하였다. 영어로 리터치(retouch), 프랑스어로 르투쉐(retoucher)는 다시 터치를 가한다는 뜻에서, 보필(補筆), 수정(修正)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한번 완성된 화면에서 다시 붓을 가하는 리터치는 사진 수정의 경우에 가필(加筆) 바니시* 라는 명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테라코타

테라코타 terra-cotta(이)

‘구운 흙’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구우면 단단해지고 치밀해지는 점토의 성질을 이용해서 만든 여러 가지 형상의 조각*이나 건축 장식용 제품. 여러 색깔과 특성을 지닌 점토를 이용하거나 또는 화학 약품의 사용, 구워내기 방법 등을 이용해 다양한 색채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진흙으로 입체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용되었으므로 테라코타 조각의 역사는 신석기시대의 도기 제작 기술이 발견되었던 시기까지 소급된다. 이집트, 고대 크레타 문명(→‘에게 미술’ 참조), 콜럼버스 이전의 남미, 동방 문화에서도 석기시대부터 전해오는 많은 테라코타로 된 소형의 조각상들이 있다. 중국 당唐에는 테라코타로 단색 또는 여러 색깔을 칠한 용*(俑)을 부장(副葬)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였다.
한편 중세 독일 북부 등 돌이 부족한 평원지대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 테라코타 벽돌을 사용했다. 이렇게 테라코타는 건축용으로는 많이 쓰였으나, 조각용으로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약*과 채색으로 아름다움과 내구성을 더한 테라코타가 조상, 장식판, 무덤, 벽장식 등의 값비싼 대리석이나 청동의 대용으로 애용되었다.
점토로 상을 만들 때, 작은 물건일 경우는 속까지 전부 점토로 채우지만, 큰 작품의 경우에는 작은 물건을 만들 때처럼 점토로 전체를 만든 후 점토가 반쯤 말랐을 때, 여러 부분으로 조각내어 속을 파낸 후 진흙물을 발라 다시 짜맞추거나, 고리 또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감아올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 여러 개의 복제품을 만들 경우에는 석고나 테라코타 등으로 틀을 만들어 찍어낸 후 가마에 굽는 방법을 취한다. 색깔을 넣고자 할 때는 형을 만들 때, 또는 만든 후 색깔을 넣은 진흙물을 바르며, 광택을 원하는 경우에는 가마에서 구워낸 후 유약을 칠하고 다시 굽는다. 유약칠을 하면 기후에 견디는 힘이 더 강해져 테라코타를 건축 장식물에 사용하기가 더욱 유용해진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테라코타는 프랑스의 마이욜Aristide Maillol(1861~1944) 등 현대 조각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권진규權鎭圭가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다. 또 건축장식으로서도 테라코타는 각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