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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포리움

트리포리움 triforium(영)

서양 중세의 바실리카*식 성당에서 그랜드 아케이드와 클레어스토리 사이에 있는, 신랑*에 면해 설치된 아케이드*. 내부에 접한 쪽은 아치*가 연속되어 있으나 외부로 향한 쪽은 대개 측랑*의 지붕 밑이 되어 닫혀있기 때문에 창이 없는 층(blind story)이라고도 불린다. 아케이드와 통로가 없는 것, 칸막이 벽에 환기창만 낸 것 등이 있다. 11세기 이후 나타나, 고딕* 성당에서 성행하였다.

→ ‘부벽’ 도판 참조

트리폴리에 문화

트리폴리에 문화 Tripol’e(루)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동남부로부터 구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드니에블 천(川) 사이에 분포된, 금석병용기에서 청동기 초기(기원전 3000) 사이에 발달했던 농경 문화. 1896년에 발견된 키에프 부근의 유적에 의해 명명되었다.
아나우 문화* 등과 마찬가지로 채문토기*나 토우가 발견되었다. 채문토기의 문양에는 소용돌이 문양이 많은데, 태양을 상징한 모습이나 동물도 있고, 의식용의 토기도 있다. 토우는 다수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은 풍요, 생명력을 상징한 여성상이며 그 형태는 극히 양식화되어 있다. 남자상은 드물고, 소, 말, 돼지 등 가축의 토우가 많다. 유물은 에르미타주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티베트 미술

티베트 미술 Tibet Art(영)

티베트는 현재의 중국 남서부의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로, 그 미술은 선사시대의 거석문화(巨石文化)가 존재했고, 구리 혹은 청동재의 소품이 출토되었다. 또 7세기경의 여러 왕의 분묘가 조사되고 있으나, 그 밖에 민족적 혹은 세속적인 미술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티베트의 미술은 거의 모두가 종교미술, 특히 불교미술*이다. 종교로는 민간 토착의 여러 신앙이 예부터 있었고, 또 ‘본Bon’이라 불리는 샤먼적 종교가 있다. 불교는 7세기경 주로 인도로부터, 또 부분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이러한 토착 신앙과 대립되기도 하고, 때로는 절충, 혼합되면서 발전했다.
티베트족이 처음으로 외계의 문화와 접촉하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7세기 전반의 소첸감포왕Sron-btsan-sgam-po 무렵으로서, 이 왕은 두 왕비(네팔의 공주와 당唐의 문성공주文成公主)에게 감화되어 불교에 귀의하고, 인도에 사람을 보내어 여러 가지 문물이나 불교를 수입하였다고 전한다. 두 왕비가 라사Lhasa에 세운 조칸Jo-khan과 라모체Ramoche라는 건축의 세부에는 당과 이란 등의 영향이 보인다. 어느 것이나 성소* 위에는 중국풍의 커다란 지붕(경사지붕)이 얹혀져 있는데, 이 중국적인 지붕은 7세기 무렵 여러 왕묘의 돌기둥 위에서도 보인다.
그 뒤 티베트의 역사는 거의 불교의 역사이고, 8세기 후반의 티손데첸왕Khri-sron-lde-brtrsan 무렵에는 인도로부터 적호(寂護, Sāntarak-sita), 연화생(蓮華生, Padma-sambhava) 그 밖에 학승이 들어와 불교는 날로 융성해 갔다.
725년경에 불교의 최대 사원으로 삼예사Bsam-yas가 건립되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원 건축으로서 두칸(hdus-khan, 집회당)이다. 그 설계는 약간 장방형을 이루며 가운데 4개(2개×2열), 많은 경우에는 64개(8개×8열) 혹은 그 이상의 열주*가 있고, 특수한 법회에는 그것들을 아름다운 융단으로 휘감는다. 전면에는 몇 개의 열주를 갖춘 전랑(前廊)이 있고, 천장이 높은 불전은 거의 분리된 듯한 모습이다. 그 외면은 순백색으로 칠식(漆喰, 석회와 찰흙을 풀가사리의 액체로 반죽한 것)을 칠하고, 벽면 상부의 집우 아래에 짙은 갈색의 띠를 둘렀으며 그 곳을 보통 황금색의 길상문(吉祥文) 등으로 꾸몄다.
지붕엔 도금된 보륜(寶輪)이나 사슴, 삼차(三叉), 산개(傘蓋) 등이 장식된다. 열주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수도승들의 집회, 근행(勤行), 학습의 장이 있고, 그 둘레의 내벽에는 불전이나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전랑에는 생사륜*도(生死輪圖), 수미산도, 사천왕상*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마니코루*(mani-hkhor)가 놓여 있기도 하다. 불전 안에는 석가불과 그 밖의 불, 보살상, 호법신상 등을 봉헌하고 흔히 대장경도 안치된다. 초르텐mchod-rten(탑)은 인도의 스투파*가 변형, 발전한 것으로 사원의 안팎, 길, 산야 등에 매우 많고 화북에서도 라마탑 혹은 백탑이라 하여 많이 건조되었다. 간체나 참바린의 것이 유명하고, 순례자는 최하층의 기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우회전하면서 최상층까지 1백여 개의 사묘(祀廟) 혹은 불감*을 차례대로 예배하고, 끝으로 꼭대기의 초르텐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841년의 란다르마왕Glandar-ma의 폐불(廢佛)조치에 의해 불교는 전반적으로 그 모습을 감추지만, 서부 티베트를 중심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즉 아티사Atisa(982~1054)와 그 밖의 많은 인도 학승이 내방하고, 13세기에는 불교가 부흥하는 형세가 되었다.
불교 도입 이래 성립한 님마파를 비롯하여 가담파, 갈구파, 사갸파 등 여러 파가 흥했다. 15세기에는 촌가파(1357~1419)가 일어나 불교를 개혁하고, 새로이 겔구파의 일파가 창시되었다. 이 파에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의 이대활불(二大活佛, 화신라마)의 전통이 생겨나고 달라이라마는 제5대(1617~1682) 이래 전 티베트의 종교와 정치의 양권을 장악하여 현재의 제14대 달라이라마에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발전을 거친 불교를 일괄적으로 총칭하여 라마교*라고도 한다. 그것은 인도 불교 말기의 밀교화한 불교가 다시 티베트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미술은 불교의 산물이고, 또 불교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전개되었다. 양식*이나 기법은 인도의 팔라-세나 왕조*의 것이 주축이 되고, 여기에 네팔, 또 카슈미르*나 중앙아시아*(호탄)로부터의 영향과 함께 중국 본토로부터의 영향도 뚜렷하게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옛날에는 인도적이었고, 근대에는 오히려 중국적이라고 한다.
회화*로는 프레스코*벽화가 융성했고, 또 탕가*(than-ka)라고 불리는 화축(畵軸)이 매우 풍부했다. 조각*으로는 소상, 목상 외에 금동상이 많은데, 석상은 비교적 적다. 공예*에는 불구*(佛具)나 법구(法具)에 뛰어난 금세공이 있고, 또 장신구로는 뼛조각 등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미술활동도 하나의 종교적 공덕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회화나 조각의 작자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존상의 크기나 착색 등은 모두가 의궤류(儀軌類)의 정해진 바에 따라서 해야 했기 때문에, 작가의 개인적인 창조 의욕의 여지는 매우 적었다. 따라서 작품은 모두 한결같고 전통적이어서 그 연대 판정은 명문* 등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틴트

틴트 tint(영)

색깔, 색조라는 뜻. 특히 색조가 부드러운 느낌을 주도록 흐려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순색에 백색을 가하여 만들어지는 색으로서 연하고 밝은 색조를 총괄적으로 말한다. 흰 정도에 따라서 다수의 단계가 있고, 극한은 백색으로 된다. 또 동판 등에 있어 선을 부드럽고 몽롱하게 흐리는 것을 말한다.

팀파눔

팀파눔 tympanum(그)

고전 건축의 출입구 상인방 위에 얹혀 아치*로 둘러싸인 석조물. 벽의 장식적인 열주* 사이나 창문 위에 부조*된 아치 모양의 면. 고전 건축에서 박공*으로 둘러싸인 삼각형의 면을 가리키는 용어. 팀파눔의 주목적은 장식이며, 아치의 머리 부분을 메우기 위하여 아무런 무늬없이 설치된 것도 있다.
팀파눔의 형체는 주변의 아치 모양에 따라 좌우되는데, 고전주의* 시대부터 로마네스크*시대까지는 반원형이, 고딕* 시대에는 뾰족한 형태가 지배하였으며, 회교권의 건축에서는 말발굽과 반곡선 모양이, 인도의 사원에서는 복잡한 곡선 모양이 주를 이루었다. 팀파눔의 재료와 기법은 다양한 편이다. 조그만 돌덩이를 조합해서 장식 효과를 내며, 색깔을 칠한 것도 있고, 모자이크*로 장식되기도 한다.
회교권에서는 치장 벽토와 테라코타*가 구사되었다. 12세기경까지 서양에서는 그림이 새겨진 돌을 쓴 팀파눔이 일반화되었고, 13세기에는 더욱 뾰족한 형체로 된다. 팀파눔의 그림 소재는 추상적인 무늬, 종교적 상징물과 종교적 광경, 그리고 신약과 구약의 이야기 등이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에 팀파눔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신고전주의*와 19세기초에 부활되었다.

→ ‘페디먼트’ 도판 참조

파고다

파고다 pagoda(영)

→ ‘미얀마 미술’ ‘스투파’ ‘탑’ 참조

파괴미술

파괴미술 破壞美術 destructive art(영)

폭력과 파괴라는 20세기의 특징적인 현상이 현대 미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1960년대 전반기엔 각국 출신의 여러 미술가들이 제2차세계대전 이래 인류가 행한 파괴를 유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파괴와 폭력을 창조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하여 파괴미술은 자족적인 하나의 미학으로 부상했다. 이 미술은 대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그래서 청중은 계속되는 파괴행위로 변형된 대상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변화 과정은 결과로 생기는 파편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로 간주되었다. 팅겔리Jean Tinguely(1925~1991)는 스스로 폭파하는 기계를 전시했고, 토슈는 타자기를 때려부수었으며, 래덤John Latham은 스쿱(Skoob:books의 철자를 거꾸로 함)탑을 만들어 폭파시켰다.
슈라이브Werner Schreib는 낙화술(烙畵術)을 이용해 불로 이미지를 그렸다. 메츠거Gustave Metzger는 나일론 시트를 파괴시키는 데 산(酸)을 이용했다. 바이락Tosun Bayrak은 피와 동물의 시체를 사용한 거리의 이벤트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대부분의 행위와 해프닝*은 공격과 파괴적 행위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1966년 런던에서 ‘예술에 있어서 파괴에 관한 심포지엄Destruction in Arts Symposium’이 메츠거와 샤키의 준비로 개최되었다. 10개국에서 2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참석했고 심포지엄 기간에 제시된 파괴미술의 실례들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언론과 대중, 그리고 비평가들의 열광과 방해를 함께 받았다. 주최측은 예술에서 파괴기법이 세계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사회 현실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공격성이 예술을 통해 순화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폭력이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 두번째 심포지엄이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파노라마

파노라마 panorama(영)

그리스어의 ‘panhoran(모두가 보인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회전화(回轉畵) 또는 전경화(全景畵)라고도 한다. 배경을 둥글게 하고 원근법*을 이용하여 원경(遠景)을 그리고, 전경(前景)에는 인물이나 기타 다른 입체적 모형을 놓고 조명하여 도시, 전투, 역사적 장면 등의 전모를 제시, 현실감을 자아내게 한 그림을 말한다. 바로크*의 무대 장치에서 출발하여 18세기말 파리, 런던에서 실현되었고, 19세기 후반, 전장의 정경을 그리는 데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크게 유행되었으나 속임수적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지자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쇠퇴하게 되었다.

파르낫소스 산

파르낫소스 산 Parnassus Mt.(이)

그리스 중부 포키스 지방에 있는 해발 2,457m의 산. 시와 음악의 신 아폴론과 뮤즈 및 디오니소스, 님프들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으며, 산의 남쪽 등성에는 아폴론의 신탁(神託)으로 알려진 델포이 성지가 있다. 그림과 시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파르바티

파르바티 Pārvatī(범)

시바*의 배우자로서 히말라야 산신의 딸이다. 신들은 타라카Tāraka라는 악마가 자신들을 괴롭히자 시바와 산신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타라카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러나 시바는 계속 고행과 명상에 몰두하여 후손을 얻을 수 없었다. 파르바티 역시 시바를 따라 심한 고행을 지속했고 이런 파르바티를 사랑하게 된 시바는 파르바티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신 사이에서는 전쟁의 신인 스칸다Skanda가 태어났고 이 신이 타라카를 죽이게 되었다. 미술에서 이 이야기는 파르바티를 표현하는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