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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장미파

푸른 장미파 薔薇派 Golubaya Rosa(러)

1904년에 결성되어 1908년 까지 계속된 러시아의 상징주의* 그룹. 쿠즈네초프Pavel Kouznetsov를 중심으로 하여 우트킨N.I.Utkin, 사푸노프Nikolai Nikolaevitch Sapounov, 마트베에프Alexandre Matveev, 사리얀Martiros Sergeevich Sariyan(1880~1972), 폰비진Fonvizin, 야쿨로프N.P. Yakulov, 울리아노프 등이 그 회원이었다. 푸른 장미파에 직접 영향을 준 사람은 보리소프- 무사토프Viktor Borisov-Musatov였다. 그는 퓌뷔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1824~1898)와 나비파*의 분위기를 러시아에 전했다. 푸른 장미파는 단명했지만,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나 샤갈Marc Chagall(1887~1985)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품다도

품다도 品茶圖

동양 풍속화*의 한 화제(畵題). 차를 음미하면서 품평하던 문인 묵객들의 취미생활을 그린 것으로 송대(宋代)에 성행했다고 한다. 원대(元代)에 이 화제를 그린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년 이후)의 작품이 기록으로 전한다. 원대의 또다른 화가 조원趙原(자오 위앤, 14세기 후반)은 <육우팽다도陸羽烹茶圖>(대북 고궁박물원)를 그렸다. 육우陸羽(루 위)는 당대(唐代)의 은자(隱者)로 차(茶)를 좋아하여 《다경茶經》을 저술하였고, 흔히 다신(茶神)으로 불린다. 육우가 방이나 뜰에서 차를 끓이는 광경을 그린 <육우팽다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화제로 애용되기도 하였다. 명대(明代)의 작품으로는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 이 그린 <품다도>(1534)가 있다. 이 그림은 다회(茶會)에 참석하지 못한 문징명이 당대의 다선(茶仙)인 피일휴皮日休와 육우를 생각하며 그린 것이다.

풍경화

풍경화 風景畵
landscape painting(영)

풍경을 주제로 한 회화. ‘풍경’이라는 말은 원래 네덜란드어에 어원을 둔 화가들의 용어. 회화에서 자연 경관을 나타내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16세기 후반에 처음 사용하였다.
이집트, 비잔틴*, 로마네스크* 시대의 유럽의 종교적인 미술에서도 주요 주제의 배경으로 풍경적 요소가 매우 양식화된 형태로 도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회화에서는 흔히 강을 비롯한 자연적인 지형을 신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거나, 물고기, 새 등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했었다.
자연 경치 그 자체를 즐기고 활용하기 시작한 미술이 처음 등장한 때는 로마 시대이다. 자연의 힘에 대해 거의 신비적인 숭배를 했던 중국 등 극동 지방에서는 일찍부터 풍경화 즉 산수화*가 발달하였으며, 훗날 유럽 풍경화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유럽에서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부터이다.
풍경이 그림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 것은 화가와 그들의 파트롱*들이 풍경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된 후에 가능해졌다. 아주 최근까지 사람들은 자연을 하나의 통합된 연관물로 보지 않고 별개의 물체의 집합으로 본 것 같다. 자연을 ‘경치’로 보는 능력은 화가들에 의해 획득되었고, 원근법*을 사용해 구체화한 그림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자연을 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화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원근법을 통해 비로소 풍경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미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구현, 전파했다. 그는 미술가란 단순히 삽화가가 아니라 시인과 같은 세계의 창조자라고 보았다. 그의 영향을 받아 목가적인 삽화가 유행하였으며 플랑드르 지방의 그림에는 이야기적인 요소가 줄어들고 섬세하게 세부 묘사를 한 풍경을 그림의 배경으로 하는 것이 눈에 띈다.
최초의 ‘순수한’ 풍경화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중간에 위치한 다뉴브 지방에서 그려졌다.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인습을 깨뜨린 사람은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1480~1538)로서 유화*, 에칭*, 수채화* 등에서 풍경 그 자체를 수용 가능한 주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개혁은 풍경화의 발달에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때의 풍경화에는 ‘자연주의적’인 작품은 드물며, 상당히 엄격한 공식에 맞춰 배열한 환상적 주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탈리아에서의 풍경화는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경향으로 나아간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소박하고 사실주의적인 풍경화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여러 유형의 풍경화가 자유롭게 창작되고 있었다. 로랭Claude Lorrain(1600~1682), 거틴Thomas Girtin(1775~1802), 터너William Turner(1775~1851) 등이 독창적인 화필을 구사하고 있던 당시 마침내 콘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은 루이스달Jacob van Ruisdael(c.1628~1682)과 호베마 Meindert Hobbema(1638~1709)에게서 시각적 진실을 표현할 언어의 원천을 찾았다. 콘스터블의 신선한 시각과 화풍은 프랑스 낭만파, 특히 바르비종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시적인 풍경화도 그 추종자들을 잃지 않아 독일의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edrich(1774~1840)와 영국의 터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9세기 후반, 터너의 영향을 받은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비회화적, 문학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고 눈에 보이는 인상에 충실함으로써 화가의 주제 가운데 풍경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 후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등 후기인상파*들도 풍경을 자주 그렸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사실성에서 후퇴하여, 루소 Henri Rousseau(1577~1640)를 추종하는 일요화가들만이 아직도 풍경을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몽상적 풍경화의 매력과 공포를 발견했으며, 한편 세잔느에게서 입체주의* 화가들로 이어지는 여러 추상, 반추상 계열의 화가들은 풍경을 정물의 일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풍속화

풍속화 風俗畵
peinture de genre(프)

일정한 사회적 계층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전형적인 한 모습을 그린 회화. 풍속화는 사람들의 계층에 따라 농민적, 서민적, 귀족적인 것 등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내용 여하에 따라서는 종교화나 역사화* 등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이들 주제를 풍속화풍으로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풍속화는 고대에서도 확인되는데 폼페이의 벽화*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중세에서는 일상생활이 예술 표현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므로 본래 의미의 풍속화는 나오지 않았다.
유럽 미술에 풍속화풍의 묘사가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로서 15세기 후반 네덜란드 화가들 사이에서 풍속화풍의 묘사가 점차 많아진다. 또한 독일의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도 종교적인 내용을 종종 풍속화풍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풍속화가 그 취재 범위를 넓히고 이것을 전문으로 하는 화가가 나온 것은 17세기 특히 네덜란드였다.
플랑드르의 화가 요르단스Jacob Jordaens, 아드리안 브라우워Adriaen Brouwer(1605~1638)는 풍속화가로 유명하며 또 당시의 화가로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등도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샤르댕Jean Baptiste Siméon Chardin(1699~1779)과, 시민 생활에서 취재하여 교훈적, 풍자적인 풍속화를 그린 호가드 William Hogarth(1697~1764) 등을 제외하고는 상류사회를 다룬 풍속화가 프랑스에서 유행했는데, 랑크레Nicolas Lancret(1690~1743), 부셰François Boucher(1703~1770), 프라고나르Jean Honoré Fragonard(1732~1806) 등이 대표적 화가이다.
당시의 이색적인 풍속화가로서는 스페인의 고야Francisco de Goya(1746~1828)를 들 수 있다. 또한 19세기에 와서 사실주의적 사조는 많은 풍속화를 낳았다. 프랑스에서는 이국풍경을 즐겨 그린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 온갖 사회 단면을 날카롭게 풍자화한 도미에Honoré Daumier(1808~1879), 농민화가인 밀레Jean François Millet(1814~1875)가 있고, 독일에서도 소시민 생활을 그린 리히터Adrian Ludwig Richter(1803~1884)이외에 멘첼Adolph von Menzel(1815~1905), 라이플Wilhelm Leibl(1844~1900) 등이 풍속화를 그렸다.
문학적 내용을 배제하고, 순수한 회화적 요소에만 호소하려는 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마네Edouard Manet(1832~1883), 드가Edgar Degas(1834~1917), 리버만Max Liebermann(1847~1935) 등이 풍속화를 그리기는 했지만, 이후 차차 쇠퇴하게 되었다.

퓌토

퓌토 putto(이)

회화* 및 조각*용어. ‘유아’란 뜻. 특히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르네상스* 시대의 제단이나 묘소의 장식 모티브* 또는 독립된 감상용 조상으로 자주 표현되는 작고 벌거벗은 아기로 가끔 날개를 달기도 함. 이러한 예로는 구에르치노Guercino의 천장화 <오로라>(1621~1623년, 로마, 루도비지 별궁)와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kio(c.1435~1488)의 조각작품 <돌고래를 안은 동자>(1470년경, 피렌체, 팔라초 베키오) 등이 있다.
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의 프레스코인 <갈라디아>(1513년, 로마, 파르네시나 별궁) 및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의 <사랑의 정원>(1632~1634년경, 프라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듯이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사랑의 신이 화신으로 표현되었을 경우에는 큐피드 또는 아모레토Amoretto로 불려진다.

퓌토 그룹

퓌토 그룹 Groupe de Puteaux(프)

앙데팡당전*에서 모여 1911년 결성한 그룹. 퓌토에 있는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아틀리에*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비용Jacques Villon(1875~1963), 뒤샹, 뒤샹-비용Raymond Duchamp-Villon(1876~1918), 글레즈Albert-Léon Gleizes(1881~1953), 메칭거Jean Metzinger(1883~1956),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 라 프레네이Roger de la Fresnaye, 쿠프카Františ ek Kupka(1871~1957),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 등이 참여하였다.
모든 구성원이 황금분할전*에 참가했으며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와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의 입체주의*가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특히 뒤샹 형제는 수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들은 토론을 통해 입체주의에 비유클리드 기하학 및 상대성 원리, 4차원 개념 등의 이론적 토대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퓨리슴

퓨리슴 Purisme(프)

→ 순수주의

프라 프랑

프라 프랑 pra prang(타)

타이*의 고탑형(高塔形) 사당 건축물로 내부에는 불상*을 안치한다. 본래 크메르* 건축인 프라사트*에서 발전했다. 수코타이Sukhothai(13~14세기)기 이후 타이에 보급되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가늘고 높은 형태로 바뀌었다.

프라사트

프라사트 prasat(크)

캄보디아*의 건축물로서 탑당(塔堂)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인 ‘프라사다(prasada, 누각)’에서 유래된 말이다. 단독 사당으로 건축물의 상부구조가 고탑형(高塔形)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며 인도의 시카라* 형식(특히 남방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참파*의 카랑(사당)이나 중부 자바의 찬디 등과도 건축적으로 유사하다. 앙코르* 시대에 눈부신 발전을 보였는데 기본형은 사각형 건조물 위에 크기가 점차 줄어드는 5층의 탑을 올려 놓는 것이다.
그렇지만 앙코르 와트*의 고탑이나 바욘의 인면탑*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형태의 변화가 매우 많다. 처음에는 구운 기와와 라테라이트(紅土)로 만들었으나 그 후 석조가 일반화되었다. 또한 기단을 높은 계단식으로 쌓는다든지 사당 네모서리에 탑을 세워 오탑당 형식으로 만든다든지 하여 앙코르 시대 사원의 중심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primary structure(영)

기본 구조(基本構造), 원구성(原構成) 등으로 번역된다. 원형(圓形), 장방형(長方形)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모양에 의해 구성하는 것. 1966년 4월 뉴욕에서 개최된 동명(同名)의 전람회가 이 명칭의 기원이다. ‘미국과 영국의 젊은 조각가들’이란 부제가 붙었던 이 전시회는 1960년대 중기에 보여진 조각*의 새로운 특징을 부각시킨 것으로 기획자는 맥샤인Kynaston McShine이다. ‘조각(sculpture)’이란 말 대신에 구성(structure)이란 말을 쓰고 있듯이 깎고 다듬는다는 의미의 종래의 조각 개념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공간 구성을 목표로 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그 형태가 지극히 단순하다는 점에서 간결한 표현을 추구하는 미니멀 아트*와도 공통점을 지닌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처의 특징은 첫째 형태가 구(球), 원주, 원추, 각주(角柱), 입방체 등의 기본적인 것으로 된 점. 둘째로는 대부분이 선명한 원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점. 그러나 이러한 색채는 대개 기계적인 방법(예를들어 분무기 같은 것)으로 채색된 것이어서 우리가 회화에서 느끼는 색채감각과는 달리 정서가 배제되어 있다. 셋째는 재래의 조각에서 사용된 돌, 석고, 시멘트, 철 등의 자연적 또는 반자연적 소재 대신에 플라스틱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유리, 합판 등의 현대적 공업용 소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점. 넷째는 수공적인 작업을 지양하고 설계도에 따라 공장 등에 주문 생산하고 있는 점 등이다.
따라서 조각가들은 자신의 역할을 디자이너의 그것에 한정시켜 창작의 비개성적인 면과 복제*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구조물의 경우는 제작 비용을 지불할 파트롱*이 없으면 실현을 보지 못하는 건축물과 같이 지상(紙上)의 작품으로만 남는 수도 있다.
또한 스케일이 커서 관객들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어 종래의 조각처럼 관객에 의해 둘러싸여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환경적인 면이 강한 점도 또다른 특징이다. 이 경향은 195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카로Anthony Caro(1924~ )와 킹Philip King(1934~ )에 의해 시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