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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

도금 鍍金 gilding(영)

물건의 표면상태를 개선할 목적으로 다른 물질로 얇게 피복하는 것. 미술 분야에서는 금이나 다른 금빛 나는 물질을 회화*나 조각*, 그리고 건축상의 장식 등의 표면에 물리적, 회화적 처리로 얇게 입힌 박, 또는 이를 입히는 공정을 말한다. 도금은 서양에서는 로마 시대에, 동양에서는 전한(前漢)시대부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기술이 전래해서 많은 불상의 도금에 이용되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도 기술이 전파되었다.

도기

도기 陶器

→ ‘자기’ 참조

도리

도리 道里

지붕의 서까래를 직접 받치는 부재로서, 지붕의 하중을 직접 또는 보*를 거쳐 기둥에 전달하는 가구재. 목조건물에서 가구재의 최상층에 놓이며, 대개 보에 직각방향으로 설치된다. 단면의 형태가 방형(方形)인 납도리와 원형인 굴도리가 있으며, 놓이는 위치에 따라 종도리(宗道里), 중도리, 하중도리, 삼중도리, 주심도리, 내목도리, 외목도리 등 7종으로 나뉘는데 집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 도리에서 앞뒤의 서까래가 서로 만나며, 이는 한국 전통 건축물의 가구에서 기본부재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공포* 부위에 주심포*, 다포*, 익공* 등의 형식 없이 도리만으로 지붕을 받치는 집을 도리집이라 한다.

→ ‘초익공’ 도판 참조

도리아 양식

도리아 양식 Doric Style(영)

그리스 건축의 초기 양식으로서, 도리아계 그리스인들이 발전시켰고 이후 로마인들이 수정하였다. 도리아 식의 기둥은 거의 세로홈(fluting)이 있으며, 주초(柱礎, base)가 없다(로마의 도리아 양식은 주초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단순한 형태의 주두* 및 트리글리프*와 메토프*로 구성된 엔타블러처*의 프리즈*이다. 상단에 있는 코니스*의 아랫부분에는 ‘뮤튤*(mutule)’이라는 작고 납작한 일련의 벽돌이 있다. 장식적인 뮤튤과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트리글리프는 초기 목재 건축물의 구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뮤튤은 목재 처마 밑에 보이는 서까래 끝에 해당되며, 트리글리프는 지붕 들보에 해당한다. 뮤튤과 트리글리프는 구테(guttae)라는 작은 막대모양 장식에 의해 고정되었다.
초기의 그리스 도리아식 사원의 원주*는 굵으며, 이후의 것들보다 더 촘촘한 간격으로 세워졌다. 도리아식 원주는 고전 양식 중에서 가장 견고하고 꾸밈없는 기둥으로서 그 비례가 남성 신체의 비례와 관계된다고 여겨졌다. 실상 도리아 양식은 막사, 도시성문, 감옥 등 방어적이고 공격적이거나 실용적인 건축물에 특히 적합하게 보였다. 또한 도리아식 주식*은 콜로세움의 하층을 이루면서 다른 주식들을 지탱하는 강한 성격을 보여준다.

→ ‘엔타블러처’‘주식’ 도판 참조

도리원도

도리원도 桃李園圖

동양 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당대(唐代)의 시인 이백李白(리 바이)의 병려체(騈儢體) 문장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書》에 입각하여 그린 상상화이다. 복숭아꽃(桃)과 오얏꽃(李)이 만발한 정원에 등불을 켜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작(詩作)을 즐기는 문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오랜 작례로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처우 잉)과 성무엽盛茂燁(츠엉 마오이에)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도무스

도무스 domus(라)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고대 로마의 부유층이 사는 고급 주택으로 중산층의 집합주택인 ‘인수라(insula)’와 구별된다. 첫번째 안뜰인 아트리움*은 오락을 하거나 일을 하는 데 사용되고, 두번째 안뜰은 대개 정원이 딸려 있으며 열주랑이나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폼페이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Dominican Order(영)

툴루즈에서 성(聖) 도미니크가 1206~1216년 에 창건한 로마 가톨릭 교회 내의 탁발 수도회. 프랑스 프루유에서 설립하여,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다. 복음의 전파를 목적으로 신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깨닫고 파리 대학을 비롯해 쾰른, 볼로냐, 옥스퍼드 등의 명문대학에서 성서와 설교 및 신학, 철학, 교회법 등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공헌을 하였다.

도사파

도사파 土佐派

야마토에*(大和繪)를 고수한 도사씨(土佐氏)를 중심으로 하여 세습적으로 형성된 15~17세기 일본의 대표적 궁중 어용화파의 하나.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가노파*狩野派, 운코쿠파*雲谷派와 함께 3대화파의 하나였으며 가노파와 함께 에도시대*(江戶, 1603~1867) 말기까지 일본화단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도사파 양식*은 헤이안시대*(平安)와 가마쿠라시대*(鎌倉)의 순 일본적 세속화의 전통인 야마토에로 계승되었다. 이들 화파의 그림은 궁중의 에코도로(繪所)를 세습적으로 지내면서 형성되었다. 족보에 따르면, 그 효시가 헤이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17세기에 조작된 것이며 실제로는 15세기의 후지와라 유키미쓰藤原行光와 그 아들 도사 유키히로土佐行廣가 그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작품은 대개 헤이안시대와 가마쿠라시대의 세속화의 전통에 따라 소재와 기법을 반복하는데 그쳤지만 도사 미쓰노부土佐光信와 같은 몇몇 화가의 작품은 당시 귀족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도사파의 마지막 대가였던 도사 미쓰요시土佐光吉는 오사카大阪 근처의 상업항구인 사카이堺로 이주하여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모모야마(桃山)시대의 가노파 화가들에게 채색법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그 손자 도사 미쓰오키土佐光起는 궁정 에코도로의 책임자 지위에 올랐으며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19세기까지 그 직책을 승계받았으나 화풍상의 발전은 없었다.

도산시대 미술

도산시대 미술 桃山時代美術

→ 모모야마시대 미술

도상

도상 圖像 icon(영)

고대 그리스어 ‘에이콘(eikón)’에서 유래된 용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벽화*와 구별되는 판화*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미술사에서 말하는 도상은 신성한 사건, 특히 성자들의 성상을 뜻하는데, 특히 비잔틴 교회나 러시아 및 그리스의 정교회에서 사용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도상의 사용은 초창기부터 있었던 일이었지만,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습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유행한 황제의 초상에 대한 숭배 풍습에서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한편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상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의 진리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는 이설(異說)을 설교하여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미쳤다. 8세기에 들어 이러한 경향은 절정에 이르렀고, 곧 성상파괴주의*자들에 의한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콘스탄틴 5세는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도상의 파괴를 명령했으며 패널*화, 프레스코*, 모자이크*는 물론 성인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 있는 책자들까지 파괴되었다.
그후 843년 제2차 종교회의 등으로 도상의 사용이 예배 의식을 위해 부분적으로 허용되면서 도상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즉 종교 회의에서 진실된 예배는 오직 신적인 속성에 속하지만, 신의 표상에 의해 경배심이 촉진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도상은 일련의 규칙과 양식상의 엄격한 기준에 의해 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중세의 도상들이 유형화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동방교회에서는 도상 허용론자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도상이 다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들 도상들은 단순한 인물상에서 점차 정경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 있는 모자이크화인 <수태고지*>라든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있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패널화 등이 그러한 예이다. 도상화나 도상을 사용하는 예배의식은 러시아로 전파되었고 비잔티움을 능가할 정도로 유행되어 러시아 혁명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한편 도상은 예술작품의 ‘주제’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른바 도상학* 혹은 도상 해석학* 등의 용어가 바로 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