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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가

링가 linga(범)

‘상징’을 뜻하며 때때로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힌두교에서 링가는 시바*신과 결합된 상징을 의미하는데 원주민의 남근 숭배사상이 힌두교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시바를 모시는 힌두 사원*에서는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링가를 숭배의 대상으로서 모시고 있다.
링가는 여성의 생식기를 의미하는 요니yoni와 결합하는 다산성의 상징으로도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요니는 대좌*의 역할을 하고 있다. 끝이 둥근 원통형의 링가에 사람의 얼굴이 있는 것을 무카링가mukhalinga라고 부른다. 굽타 시대*에 만들어진 우다야기리Udayagiri 석굴의 제4굴에는 사람 얼굴 하나가 조각된 에카무카링가ekamukhalinga가 전하고 있긴 하지만 추상적인 형태의 링가가 더 보편적이다.

마 Ma(헝)

카사크Lajos Kassak에 의해 부다페스트(1916~1919)와 빈(1920~1925)에서 출판된 아방가르드 문학과 미술 잡지. 헝가리어로 ‘오늘’이라는 의미의 《마》는 1917년부터는 주로 조형예술 부문에 중점을 두었다. 이 잡지는 마티스-퇴취Janos Mattis-Teutsch, 티아니Lajos Tihanyi, 위츠Bela Uitz, 보르트닉Sandro Bortnyik 등 새로운 헝가리 미술가들을 발굴하였고, 다양한 문화적 흐름에 대한 정치적 목표 속에서 서유럽과 헝가리의 사상가 및 미술가 사이에 중개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카사크는 《마》에서 물질과 정신면에서 인간의 총체적 해방을 목표로 하였으며, 대중의 도덕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활력소가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고 믿었다. 헝가리 의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당한 후 1920년 빈에서 재발행되면서 《마》는 정치성이 퇴색된 반면, 다다*와 구축주의* 운동 안으로 통합되었으며 국제적인 아방가르드*의 가장 중요한 출판물 중 하나로서 위치를 굳건히 다졌다. 특히 1921년 4월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1895~1946)가 편집자로 참여하면서부터 최신 동향에 관한 정보의 유통과 전위 작가들의 의지 표명의 장으로 기여한 바 크다.

마기

마기 Magi(영)

‘마구스(Magus)’의 복수형으로 아기예수 탄생시 별에 이끌려 동방에서 베들레헴으로 온 세 명의 박사들을 가리킨다. 아기예수를 배알하고 드린 동방박사의 예배를 ‘마기의 예배(Adoration of the Magi)’라고 한다. 그들이 천사에 의해 인도되어 보물을 가지고 와서 아기예수를 예배하는 장면은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기독교 미술에서 중요한 테마 중 하나였다. 마기의 도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세 명의 인물들은 초기에는 모두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판탈롱을 입으며 때로는 낙타를 거느린 중동풍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7세기 이후에는 왕관을 쓰고 말을 타며 창을 든 왕과 귀족, 기사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각각 가스파르, 메르키오르, 바르타사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다른 세대 혹은 이교도족을 대표하였다.

마니교 경전

마니교 경전 摩尼敎經典

독일 투르크 탐험대의 르 코그A. von Le Cog가 카라, 호조의 알파사지(α寺址), 케이사지(K寺址) 등에서 발견한 이란계 마니교의 경전. 베를린의 국립미술관 인도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8~9세기로 여겨진다. 가죽으로 된 표지와 함께 고대 터키 어나 중세 페르시아어를 위구르 문자로 쓴 본문에 아름다운 극채색의 삽화를 그린 경전의 단편이 수십 점 있다. 경문(經文)은 붉은 색과 먹으로 나누어 쓰고 각종의 당초문*을 그려 넣었다. 삽화는 모두 마니교의 법회나 교의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흰옷을 입은 고승 앞에 선악을 암시하는 천사와 악마, 호화스러운 보좌 앞에 포도나 멜론, 빵 등을 공양하는 광경, 꽃나무를 배경으로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학습하고 있는 스님의 무리(法衆), 초록색의 깔개에 앉아 비파를 타는 위구르의 악사 등이 삽화들의 내용인데 모두 선명하고 푸른 바탕에 금은, 황적, 등(橙), 자(紫), 녹, 청 등의 선명한 색조를 사용하였으며, 가느다란 묘선(描線), 평면적인 화면 구성에 장식적인 효과를 내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이슬람 시대의 페르시아 미니어처에 가깝고, 교조인 마니가 화가였던 점을 고려할 때에 잊혀진 사산 왕조*의 회화풍을 엿볼 수 있다.

마니에르

마니에르 manière(프) maniera(이)

방법수법, 작법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마니에라(maniera)’에서 유래. 양식이나 스타일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양식이 특정한 예술적 이상 혹은 예술 의사와 관련된 반면, 마니에르는 주로 작가의 기술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해 자신의 창조적인 관찰력은 결여된 채 기성 작가들의 수법만을 답습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1390년경 첸니니Cennino Cennini(c.1360~1440)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450년경 기베르티Lorenzo Ghiberti(c.1378~1455)는 ‘시대 양식’의 의미로 사용했다. 이에 덧붙여서 16세기 중엽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에 의해 ‘예술가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양식이나 화풍’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 등 거장의 마니에르를 모방하였던 16세기 매너리즘*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마니코루

마니코루 Mani-hkhor(티)

마니통(筒). 라마교에서 사용하는 중심에 회전축이 있는 금속성의 원통으로서 ‘옴마니 반메훔Om mani Padme hùm’이라는 여섯 음의 진언(眞言)을 산스크리트 문자로 외부나 내부에 새긴다. 이 진언은 티베트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주문으로서, 사람들은 매일 이를 큰 소리로 외며 사방의 암벽 등에 새겨 놓는다. 마니코루는 높이 1m정도에 이르는 것도 있으며 회전축으로 이것을 돌리면 그 주문을 왼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믿어진다. 바람이나 물로 회전시키는 것, 책상용, 휴대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마니통

마니통 嘛呢筒

→ 마니코루

마루야마, 시조파

마루야마, 시조파 圓山四條派

18~19세기에 나가사키長崎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화의 투시도법과 중국화의 사생화법의 영향 아래서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하여 흥기한 일본의 자연주의 화파. 창시자인 마루야마 오쿄圓山應擧의 ‘마루야마파圓山派’와 그의 제자인 마쓰무라 고슌松村吳春이 이끌던 ‘시조파四條派’를 지칭하는 것으로 통틀어 ‘교토파京都派’라고도 부른다. 시조파라는 명칭은 마쓰무라가 살던 교토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화파의 대표적 화가들로는 그 밖에도 마쓰무라 게이분松村景文, 오카모토 도요히코岡本豊彦 등이 있다. 이들은 산수, 화훼, 인물 등 폭넓은 재료들에서 일본 특유의 서정적 분위기를 계승하면서 서양화의 투시법과 음영효과를 도입하여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서정적 자연주의 화풍을 이루었다. 시조파는 에도시대뿐만 아니라 메이지(明治)시대에도 고노 바이레이幸野模嶺 등에 그 영향이 전해졌다.

마르크스주의 미학

마르크스주의 미학 Marxist aesthetics(영)

예술(특히 문학)에 대한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언급들이 마르크스주의 문예 비평에 모범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언급들은 사실상 다소 비체계적이며,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역할에 대한 언급 부분도 너무나 간략하고 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마르크스의 경제, 문화 및 사회에 대한 일관된 연관성 속에서 예술을 설명해내려고 하는 지난 60여년 간의 마르크스주의 계승자들의 노력에 의해 주로 발전되었다.
1930년대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아도르노Theodore W. Adorno, 벤야민Walter Benjamin, 루카치Gyorg Lukács, 마르쿠제Herbert Marcuse, 라파엘Max Raphael 등)이 특히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제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당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파시즘 체제와 러시아 스탈린 체제-러시아에서는 1950년대 후반까지 예술에 대한 공식 노선이었던 이른바 ‘즈다노프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을 모더니즘* 계열에 대한 엄격한 검열 및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촉진과 동일시하였다-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아도르노 등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작은 1960년대에는 서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현재는 라파엘의 저작이 점차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은 그 외의 예술이론가들로는 피셔Ernst Fischer, 코드웰Christopher Caudwell, 하우저Arnold Hauser, 안탈Frederick Antal(1887~1954), 클링겐더F.D.Klingender, 모라브스키Stefan Morawski, 버거John Berger, 렌치오Toni Del Renzio, 풀러Peter Fuller, 브레히트Bertold Brecht 등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미학 이론의 주된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예술 및 미적 감각의 기원. ②예술의 사적 발전, 그리고 그것이 생산 수단 및 생산 관계와 가지는 변증법적 관계에 관한 이론. ③경제, 사회적 변화와 사진과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발명이 예술에 대해 가지는 의미. ④내용과 형식의 관계;예술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문제. ⑤계급, 이데올로기, 진리, 소외, 대중 매체 등과 예술의 관계. ⑥예술의 상대적 자율성의 문제. ⑦정치 투쟁이나 공산주의 정당의 선전의 필요성과 예술과의 관련성 문제. ⑧부르주아 사회, 사회주의 사회 및 미래에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역할.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예술은 사회 의식의 한 형식, 즉 사회적 현실이 인간의 의식에 반영된 한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반영이라는 개념에는 예술가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현실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나가고 현실의 개조를 향한 의식을 고양한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인식에서 현실의 반영과 이념의 표현, 개체와 전형, 예술의 인식적 기능과 교육적 의의, 예술의 사상성, 당파성 등의 문제를 파생시킨다.
한편 예술사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작품의 분석을 통해 예술 문화의 생산 과정에서 진보적 민중세력과 반동적 착취세력의 갈등, 낡은 형식과 새로운 내용의 충돌, 사실주의*의 여러 경향과 반사실주의적인 여러 경향 간의 투쟁, 예술의 민족적 특질 형성, 장르 및 양식의 변화 등에 관한 여러 법칙이 연구되고,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마르크스주의적 창작 이론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술에 대한 언급 자체는 다소 비체계적이어서, 이 언급들이 일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다양한 정치적 목적에 사용하는 데에서,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들의 대부(代父)인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굴레에 씌워지는 것-예를 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술에 대한 취향 그 자체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에 의해 이미 규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의 문제-을 대체로 극히 싫어한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미학 이론이 안고 있는 간헐적으로 제기되는 한 가지 의문점은, 마르크스가 그리스 예술에 대해 그 시대는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관찰한 데에 있다. 라파엘은 이를 ‘특정한 경제적 양식에 속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로서의 예술이… 어떻게 이 경제 양식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가?’하는 물음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마리아 제실

마리아 제실 lady chapel(영)

기독교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리는 제실(祭室). 성가대나 제단*이 위치한 챈슬의 연장으로서 일반적으로 교회 본당의 동쪽 끝에 돌출되어 지어진다. 영국과 그리스의 교회 건축에서 마리아 제실은 대개 평면도 상에서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 ‘내진’ 도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