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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décalcomanie(프)

유리판이나 아트지 등의 비흡수성 소재에 그림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다른 종이를 덮어놓고 위에서 누르거나 문지른 다음, 떼어내어 기묘한 형태의 무늬가 생기게 하는 기법. 데칼코마니는 ‘복사하다, 전사(轉寫)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décalquer와 ‘편집(偏執)’이라는 뜻의 manie의 합성어로 ‘전사법’ ‘등사술’의 뜻을 지닌다. 1935년 도밍게즈Oscar Dominguez(1906~1958)가 최초로 발명해낸 데칼코마니는 무의식, 우연의 효과를 존중하는 비합리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러한 우연성 속에서 여러 가지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흥미에 이끌려 제2차세계대전 직전에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가 종종 사용한 이래,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즐겨 쓰기 시작한 중요한 표현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데콜라주

데콜라주 décollage(프)

원래 ‘붙인다’는 뜻의 콜라주*와 반대의 뜻으로 떼어내고 박탈한다는 의미. 일상적인 사물을 찢어내고 지우고 불태우는 등의 파괴행위에 의해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는 방법이다. 그 목표는 물질의 소비 메커니즘적인 관념을 강제적으로 타파하고 새로운 미적 현상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데 있다.
이 용어는 플럭서스*의 독일 대표격인 포스텔Wolf Vostell이 1960년대 초에 조직했던 그룹의 기관잡지 《데콜라주》에서 유래한다. 포스텔은 데콜라주가 단순히 장식상의 기법적 차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파괴적인 행위를 거듭함으로써 우연성의 창조적 흔적과 사회적인 비평성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데콜라주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플래카드를 찢는 다다*의 표현행위를 다시 등장시킨 동시에, 질적 변화를 통해 그 찢기와 지움에 의해 생기는 낱말의 단편과 문자의 중복으로부터 기대치 않았던 효과를 발생시키고 그것을 그 나름의 선동적인 표현행위로 귀착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1934년 초현실주의* 화가들로부터 시작해서 1950년대에는 유럽에서 널리 퍼져 텔레마크Hérve Télémaque와 로텔라Mimmo Rotella(1918~ )같은 신사실주의* 미술가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 ‘콜라주’ 참조

데콩포제

데콩포제 décomposer(프)

분해 또는 해체한다는 뜻. 보통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눈에 비친 사물을 그대로 화면에 재생하는 것이지만, 입체주의*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면까지 화면에 끌어내어 사물의 진상을 밝히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물을 그대로 그려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어느 면을 한 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해체 과정을 데콩포제라고 한다.

데페이즈망

데페이즈망 dépaysement(프)

전치(轉置), 전위법 등의 뜻이다. 본래는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초현실주의*에서는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데페이즈망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유명한 시구절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에서 잘 나타난다. 즉 낯익은 물체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에서 떼내어져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이면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주게 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자들은 경이와 신비에 가득찬,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화면을 구성했는데, 초현실주의에 의하면 이런 그림이 보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데포르마시옹

데포르마시옹 déformation(프)

변형, 왜곡이라는 뜻. 대상을 시각적 영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대상을 고의로 왜곡시켜 그리는 법.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이후 특히 표현주의*와 야수주의*가 의식적으로 사용한 예술적 강조의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에서 데포르마시옹은 작가의 감정표출을 위해 혹은 조형적인 의도를 강조하거나, 양식화, 풍자적인 과장 등을 위해 사물의 자연형태에 보다 주관적인 왜곡을 더해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형체와 비례를 파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기법적 특징이다. 여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한 창조성으로의 기대치를 높이는 부분도 있다.

덴표시대 미술

덴표시대 미술 天平時代美術

쇼부聖武 천황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덴표시대는 나라奈良, 즉 헤이조쿄平城京로 도읍을 옮긴 시기를 말하며, 710년부터 794년까지 계속되었다. 헤이조쿄로 천도한 후 율령(律令) 국가의 발걸음은 당唐 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일관되었다. 각 지방에 고쿠분지國分寺(국가의 안전을 빌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워진 절)를 세우도록 명했으며, 헤이조쿄에 53척 높이의 불상*을 본존으로 모시는 도다이지東大寺가 건립되는 등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건축:아스카시대*의 배치법이 활발히 전개되고 정비되어 동대사식(東大寺式)과 대안사식(大安寺式)이 생겼다. 동대사식 가람*배치는 남대문, 중문, 금당, 강당은 일직선 상에 있으나 회랑*은 중문과 금당 사이를 지나고 동서 양탑은 중문앞 좌우에 위치하게 된다. 대안사식은 동서 양탑이 금당에서 더욱 멀리 떨어져 남대문의 바깥쪽에 세워진다. 쇼소인(正倉院)은 삼창(三倉)으로 되어 있는데 남북의 둘은 교창조(校倉造)이고 가운데는 널빤지를 쓴 판창(板倉)이다.
조각:711년에 제작된 〈호류지法隆寺 오중탑 소상군塑像群〉, 건칠조(乾漆造)로 제작된 〈흥복사興福寺 십대제자상〉 〈도다이지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등이 있다. 또한 8세기 중엽 불법을 전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온 당나라의 승려 감진鑑眞의 상과 호류지 동원東院의 부흥에 힘쓴 행신行信의 초상 조각도 덴표 시대 조각의 대표적 작품이다.
회화: 천하태평을 빌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당대(唐代)에 유행한 풍만한 미인을 여신으로 표현한 것 같은 길상천(吉祥天), 길상천과 같은 유형의 여인들이 묘사된 쇼소인 소장의 〈조모입녀병풍鳥毛立女屛風〉, 구름을 타고 앉은 보살을 삼베에 먹으로 그린 〈마포보살상麻布菩薩像〉 등이 덴표시대의 대표적 회화작품이다.
공예:이 시대의 대표적인 공예품은 오현비파(五絃琵琶), 평나전배원경(平螺鈿背圓鏡), 은제훈로(銀制薰爐) 등이 소장된 쇼소인의 보고에서 찾을 수 있다. 당에서의 도래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쇼소인의 공예품들은 당시 귀족들이 중국 당 미술에 심취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 공예 기술의 진보를 말해준다.

도교미술

도교미술 道敎美術 Taoistic Art(영)

도교의 종교 활동 혹은 종교 철학을 조형화한 회화, 글씨, 조각, 공예, 건축을 지칭한다. 도교의 성립은 후한後漢 한안 원년(漢安, 142) 장도릉張道陵(즈앙 따오릉)이 촉蜀의 곡명산鵠鳴山에서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정일명위도(正一明威道)’를 배운 뒤부터 시작된다. 태상노군은 노자老子가 종교화된 천상세계 즉 ‘태청(太淸)’에 머문다는 이른바 신선이라는 뜻이지만, 그 태상노군의 상위(上位)에 노자가 설한 도(道)의 진리, 그 자체를 신격화한 ‘상청천(上淸天)’의 태상도군太上道君이 가미된 것이다.
6세기경에는 중국 불교의 미륵신앙의 영향을 받아 천상세계의 최고위(最高位)인 ‘옥청(玉淸)’에 머문다는 원시천존元始天尊(玉皇大帝)이 탄생하고, 삼청(三淸;太淸, 上淸, 玉淸)과 삼존(三尊;老君, 道君, 天尊) 등 도교교리학(道敎敎理學)의 중요 부분이 확립되었다. 태상노군의 교계(敎誡)인 《동진부洞眞部》, 태상도군의 《동현부洞玄部》, 원시천존의 《동진부》 등의 경전으로서 《삼동三洞》이 정리되고, 《삼동》의 경전에 다시 불교의 십이분교(十二分敎) 등이 가미되어, 도교의 일체경(一切經), 즉 삼동사보(三洞四輔)를 주축으로 한 《도장道藏》이 성립되었다.
북위北魏 이후 제왕이 머무는 곳을 ‘자금성紫金城, 紫禁城’, 대전(大殿)을 ‘태극전太極殿’이라 명칭한 데서 도교 건축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 사상은 근대에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북경 고궁(北京古宮, 紫禁城)은 도교 교리의 기본개념을 명칭화하여 궁전 즉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궁乾淸宮, 곤녕궁坤寧宮 등을 남북으로 건립하였다. 도관(道觀)과 악묘(岳廟)는 대체로 궁정 건축을 모방하여 간략화한 형태이다.
현존하는 유구(遺構)로는 산동성山東省 태안泰安 대묘垈廟 〈천주전〉,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의 〈진사성모전晋祠聖母殿〉(1023~1032), 산서성 예성藝城 영락궁永樂宮의 〈삼청전三淸殿〉과 〈칠진전七眞殿〉, 항주杭州 서호반西湖畔의 〈악왕묘岳王廟〉(1194~1224) 등이 있다.
회화의 예로는 후한 말~위진(魏晉)시대의 신수경(神獸鏡)에 천왕대제와 서왕모西王母, 동왕부東王父 등의 〈선인옥녀仙人玉女〉가 있다. 또한 산동山東 하남河南지방의 화상석*, 화상전*에도 황제(黃帝), 노자, 일월성신(日月星辰), 용호(龍虎), 봉황(鳳凰), 귀사(龜蛇) 등 교리적으로 미성숙한 신선설화를 회화화한 소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진東晋의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의 작품으로 도교의 수신(水神)인 낙신(洛神)을 화제로 한 〈낙신부도*落神賦圖〉가 유명하다. 육조(六朝)시대의 종병宗炳(쫑 빙)도 숭산嵩山, 화산華山 등의 신선이 머무는 영산(靈山)의 묘법(描法)을 그의 저서인 《화산수서》에 정리했으며, 후대의 미불米芾(미 후, 1501~1107),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석도石濤(스 타오, 1641~1717) 등은 도교적인 산수화*를 그린 화가들이다.
성당(盛唐) 때 도관벽화(道觀壁畵)의 양상을 기록한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 815~875경)의 《역대명화기*歷代畵名記》 제3권을 보면, 장안에서 활약한 화가 오도현吳道玄(우 따오쉬앤)은 태청궁太淸宮에 〈태상노군상〉, 용흥관龍興館에 〈명진경변도明眞經變圖〉, 낙양洛陽의 노군묘老君廟에 〈오성도五聖圖〉를 그렸다고 한다. 그 외에 당시 도교적인 화제로서는 〈감천궁도甘泉宮圖〉 〈오악진형도五岳眞形圖〉 〈5성팔괘28수도五星八卦二十八宿圖〉 〈음양택상도陰陽宅相圖〉 〈대수신지도大蒐神芝圖〉 〈황제승용도黃帝昇龍圖〉 등이 있다. 북송北宋 때에는 무종원武宗元(우 쫑위앤)이 그렸다고 전하는 〈조원선장도朝元仙仗圖〉가 있다. 그 내용은 원시천존 또는 현원황제玄元黃帝를 알현하는 신선들의 의장식(儀裝飾)을 오도현 풍의 백화*(帛畵) 로 묘사한 두루마리*이다. 원대(元代)에는 공개龔開(꽁 카이)가 종규(鐘馗)를 소재로 그린 〈중산출유도中山出遊圖〉, 안휘顔輝(이안 후에이)의 〈하마철괴도〉가 있으며, 많은 화가들이 도석화*(道釋畵)를 즐겨 그렸다. 명대(明代)에는 만력 28년(1600)에 펴낸 《열선전집列仙全集》이 있다.

도금

도금 鍍金 gilding(영)

물건의 표면상태를 개선할 목적으로 다른 물질로 얇게 피복하는 것. 미술 분야에서는 금이나 다른 금빛 나는 물질을 회화*나 조각*, 그리고 건축상의 장식 등의 표면에 물리적, 회화적 처리로 얇게 입힌 박, 또는 이를 입히는 공정을 말한다. 도금은 서양에서는 로마 시대에, 동양에서는 전한(前漢)시대부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기술이 전래해서 많은 불상의 도금에 이용되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도 기술이 전파되었다.

도기

도기 陶器

→ ‘자기’ 참조

도리

도리 道里

지붕의 서까래를 직접 받치는 부재로서, 지붕의 하중을 직접 또는 보*를 거쳐 기둥에 전달하는 가구재. 목조건물에서 가구재의 최상층에 놓이며, 대개 보에 직각방향으로 설치된다. 단면의 형태가 방형(方形)인 납도리와 원형인 굴도리가 있으며, 놓이는 위치에 따라 종도리(宗道里), 중도리, 하중도리, 삼중도리, 주심도리, 내목도리, 외목도리 등 7종으로 나뉘는데 집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 도리에서 앞뒤의 서까래가 서로 만나며, 이는 한국 전통 건축물의 가구에서 기본부재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공포* 부위에 주심포*, 다포*, 익공* 등의 형식 없이 도리만으로 지붕을 받치는 집을 도리집이라 한다.

→ ‘초익공’ 도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