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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스탄 회화

라자스탄 회화 Rājasthān painting(영)

17~19세기 전반 인도 북서부의 라자스탄 지방 및 중인도에서 발달한 세밀화*로서 대표적인 중심지로는 메와르Mewār, 말와Malwa, 분디Bundi, 코타Kotah, 키센가르Kishengarh, 자이푸르Jaipur 등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는 라지푸트족들의 군소 왕국이 있었는데 각 군주의 궁정에서는 무갈 왕조처럼 세밀화 제작이 활발했다.
라자스탄 회화는 무갈 회화* 양식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좀더 인도적인 회화를 제작했다. 비슈누*신을 숭배하여 크리슈나*와 라다Radha의 사랑 이야기나 《라마야나*》의 중요한 장면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또한 라가말라Rāgamālā라는 특이한 인도적인 주제도 라자스탄 회화에서는 중요하다. 라가말라 회화는 음악의 정조(情調)에 따라 특정한 음계가 정해진다는 인도 음악 형식을 시각화한 것이다. 36장 혹은 42장의 그림이 한 단위인 라가말라는 6명의 라가(남성)와 그들의 배우자인 라기니Ragini가 각각의 상황에 맞게 등장한다.
말와 지역의 그림은 색채나 형태가 추상적인 점이 특이하며, 메와르 회화는 원색을 서로 대비시킨 표현적인 효과에 관심이 많았다. 키센가르 회화의 특징은 이전의 세밀화에서 볼 수 있었던 여인들과는 달리 눈이 매우 크고 코가 높은 개성적인 얼굴의 여인상이 그려진 점인데 니할 찬드Nihal Chand가 창안한 것으로 추측된다.

라템-생-마르탱파

라템-생-마르탱파 Laethem-St.-Martin(프)

벨기에의 라템-생-마르탱을 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파. 1890년경부터 1914년까지 라템-생-마르탱 지방에 미술가촌이 설립되자 50명 가량 되는 화가, 조각가, 음악가, 그리고 시인들이 번갈아가며 이곳을 방문했다. 바르비종*이나 퐁타방*, 그리고 보르프스베데 등에 있는 미술가촌의 회원들처럼 그들은 이미 상실한 생활과 자연 통일의 재발견을 희망했다. 라템-생-마르탱의 미술가촌이 존속하는 동안 두 개의 중요한 그룹이 생겨났다. 이 중 1905년 이전에 형성된 첫번째 그룹은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상징주의*적이고 명상적인 회화 스타일을 확립했다. 이 스타일은 피상적인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1914년경에 형성된 두번째 그룹은 전자와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며 인상주의의 양식으로 되돌아가 도식적인 선을 희생시키고 색채를 강조하면서 농촌 생활의 풍경을 그렸다. 플랑드르 표현주의*의 창시자들은 모두가 이 그룹의 회원들이었다. 라템-생-마르탱 미술가촌은 1914년의 선전포고에 뒤따라 해체되었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미술 운동은 그 후에도 벨기에 미술 발전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라파엘전파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영)

1848년 영국의 화가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 밀레John Everett Millais(1829~1896) 및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예술 운동. 그 시대의 아카데믹한 예술에 반항한 혁신 운동으로서, 라파엘로Raffaello(1483~1520) 이전의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찾아내어 면밀하고 사실적인 수법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다. 라파엘전파는 진실과 자연의 영감을 중시하였고 또 장식적 요소의 필요성도 주장하였다. 이들은 회화에 새로운 도덕적, 문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임의적인 규율을 무시하며, 자연을 직접 스케치하고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도상*을 발전시킨다는 혁신적인 욕구 외에도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다. 물에 젖은 흰 바탕 위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특이한 광채를 가진 밝은 색채를 장식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옥외 모티브*를 점으로 스케치하는 것, 그리고 인위적인 시적 상징주의* 등이 그 특징이다. 브라운Ford Madox Brown(1821~1893) 및 독일 나자렛파*의 영향도 받았으며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에 의해 옹호된 라파엘전파는 번-존스Sir Edward Burne-Jones(1833~1898)와 와츠George Frederick Watts(1817~1904) 등을 포함하는 다수의 추종자를 얻었지만 19세기 말이 채 이르기 전에 소멸하였다.

락슈미

락슈미 Laksmi(범)

비슈누*신의 배우자로 슈리Śrī라고도 하며 행운과 부(富)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락슈미는 연꽃의 여신을 뜻하는 ‘파드마Padma’ ‘카말라Kamala’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연화좌에 앉아 연꽃을 손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두 마리의 코끼리가 략슈미의 좌우에서 물을 뿌리고 있는 도상*은 ‘가자-락슈미Gaja-Laksmi’라고 부른다. 연꽃의 여신과 생명수는 행복한 탄생, 다산(多産)과 축복을 의미한다. 바르후트*나 산치*에서는 가자-락슈미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고 엘로라 석굴의 제14, 16굴에서도 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길상천(吉祥天)이라고 한다.

랑송 아카데미

랑송 아카데미 Académie Ranson(프)

나비파*의 화가인 랑송Paul Ranson이 1908년 파리에서 설립한 사립 미술학교.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종합주의*의 명분을 보다 깊이 추구하는 것이었다. 랑송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내가 몇 명의 나비파 화가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 운영을 계속했다. 세루지에Paul Sérusier(1863~1927), 드니Maurice Denis(1870~1943) 등이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현재까지도 전통있는 미술 교육 기관으로 남아있다. 비시에르Roger Bissiere(1888~1964)는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랑송 아카데미에서 클레Paul Klee(1879~1940)의 미술 이론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랑스 해방 후인 1945년 비시에르의 문하생들은 에콜 드 파리*의 부활에 크게 기여했다.

래커

래커 lacquer(영)

공예* 재료 중의 하나. 파일로키실린이나 수지(樹脂)를 초산 에틸 화합물 및 그밖의 용제로 용해한 것으로, 옻칠도 그 일종이다. 또 바니시*류 중에서는 아스팔트나 피치(pitch)를 벤젠 또는 송정유(松精油)로 용해한 것을 말한다.

러시안 아방가르드

러시안 아방가르드 Russian Avantgarde(영)

절대주의* 회화의 말레비치Kasimir Malevitch(1878~1935), 광선주의*의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1881~1964), 구축주의*의 타틀린Vladimir Tatlin(1885~1953)과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1891~1956), 부르류크 형제David Burljuk & Vladimir Burljuk, 펩스너Antoine Pevsner(1886~1962)와 가보Naum Gabo(1890~1977)의 광선 키네틱 등을 모두 총칭하여 일컫는다. 러시안 아방가르드는 1911년에 모스크바의 유명한 전시회 <카로-부베Karo-Bube>에서 출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라리오노프, 말레비치,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1881~1962) 그리고 부르류크 형제는 비대상*성의 경향을 주로 시도했다.
예술의 발달사에서 러시아 회화와 조형의 출현은 러시안 아방가르드의 특징으로 인해 서구의 추상화 운동으로 이해된다. 즉 그것은 전통적인 관습에서 국제적이며 근대적인 경향으로의 근본적인 전이과정으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전이 과정은 10월 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과 함께 진전되었고, 무엇보다도 1917년에서 1921년에 걸친 공산주의 혁명 기간 동안 볼셰비키의 문화 정책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추상파 예술가들은 볼셰비키의 새로운 통치체제를 아방가르드 예술의 개척자라고 찬미했고, 평론자이자 정치가였던 루나차르스키Anatolii Vasil’evich Lunacharski의 지도하에서 그 당시까지 러시아에서는 결코 겪어보지 못했던 가능성-역사나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신뢰를 심을 수 있다는-을 공적인 교육 제도와 무수히 신설된 박물관과 화랑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각각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상급 학교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러시안 아방가르드는 점차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추상주의’와 ‘구축주의*’로 표현될 수 있는 두가지 방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추상주의자인 말레비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펩스너 형제 등은 예술을 추상적 형식의 구조적 명확성을 통해 질서있는 세계관의 형상을 제시하는 정신 활동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구축주의자인 타틀린과 로드첸코는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을 위해 예술과 기술의 효용성을 상호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1920년, 즉 혁명 후의 모더니즘*적인 예술과 예술 정책은 레닌Vladimir Lenin의 불만을 고조시켜 공식적인 작업의 기회를 얻기 힘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나차르스키의 죽음으로 인해 러시안 아방가르드가 쇠퇴하게 된다. 이어서 사회주의 사실주의*라는 선동적 특징을 지닌 중앙통제적인 선동 예술이 생겨났다.

런던 그룹

런던 그룹 London Group(영)

1913년 영국에서 ‘캠든 타운 그룹Camden Town Group’의 주도하에 알버트 홀에서 루터Frank Rutter가 조직하였던 미술 그룹. 런던 그룹은 모든 화파의 전위작가들에게 전시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그룹의 형성은 한편으로는 영국왕립미술원*의 보수주의에 대한 항의와, 또 한편으로는 신영국 미술협회에 대한 항의라는 의미를 지닌다. 초대 회장은 길먼Harold Gilman(1876~1919)이었으며, 주요 회원으로는 네빈슨Christopher Richard Wynne Nevinson, 워즈워드Edward Wadsworth(1889~1949), 내시Paul Nash(1889~1946), 질Eric Gill, 엡스타인Jacob Epstein(1880~1959) 등이다.

레디메이드

레디메이드 ready-made(영)

사전적 의미로는 ‘기성품의, 전시용의’ 작품이라는 뜻이지만,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창조해 낸 이후 예술적 측면에서 깊고 다양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된 용어이다. 레디메이드는 뒤샹이 1913년부터 예술로서 전시하기 위해 임의로 선택한 양산된 제품에 붙인 말이다. 뒤샹은 소변기나 삽처럼 대량생산된 물건을 전혀 변형시키지 않고 제목만 첨부한 후 전시함으로써 그 물건을 기성품 조각으로 승화시켰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관련된 의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성품인 레디메이드는 정확하게 말하면 뒤샹에 의해 ‘가려 뽑힌’ 용어이다. 이것은 그 작품의 ‘다시 고쳐 보기’ 혹은 ‘다시 이름 지음’의 관계와 대응하게 된다. 곧 선택하는 일에 의해 일반어를 특수어로 만드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선택, 분리, 창조의 관계는 1916년 뒤샹의 작품 <여행용 접는 의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레디메이드로서 제공된 타자기의 비닐 덮개는 본체로부터 분리되어 그 통상적인 기능과 명칭을 상실한다. 즉 임의적인 규칙과 습관에 의해 결합되어 있을 뿐인 사물과 명칭의 관계는 일단 분리되면, 사물은 우리들의 언어적인 소유 바깥의 사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뒤샹이 1921년 발표했던 <로즈 세라비Rose Sélavy 왜 재채기를 하지 않나?>라는 오브제 작업에서도 그 언어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금속제의 새장 속에 들어 있는 각설탕처럼 보였던 흰 입방체가 실제로는 대리석인 것을 알게 된 관중은 새삼스럽게 ‘물체’를 인식하게 된다. 결국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언어적 발상의 세계로부터 물체에서 출발하는 세계로 환원시키는 실마리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레디메이드는 뒤샹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뒤샹의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패러독스를 지적할 수 있다. 금세기에 있어서 예술가와 예술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역할, 그리고 새로운 의미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특히 우연성, 행위, 개념성, 기성품의 사용이라고 하는 문제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레디메이드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뒤샹의 의도는 미술에서 지적(知的)인 바탕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미술창작과정에 동반되는 신체적 활동과 손재주에 대한 관심을 지적인 것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브라크George Braque(1882~1963)나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또는 초현실주의*의 작가들이 바닷가의 돌조각이나 짐승의 뼈 등을 주워 오브제로 한 방법과 상통하는 것으로 미(美)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미는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 미술*의 새로운 특색이다. 그래서 어디서나 손에 넣을 수 있는 레디메이드를 창의를 가지고 발견하면 창작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발견된 오브제*’와는 다르다. 이 차이를 뒤샹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레디메이드는 개인 취미의 문제이다. 발견된 오브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른바 발견된 오브제가 아름다운 것인가 특이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기호인 것이다. 기성품의 선택은 미적인 즐거움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선택은 시각적인 무관심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은 전후 서구 미술, 특히 팝 아트* 계열의 작가들과 신사실주의* 및 개념미술*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레이아웃

레이아웃 lay-out(영)

디자인, 광고, 편집에 있어서 문자, 그림, 기호, 사진 등의 각 구성 요소를 제한된 공간 안에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일 또는 그 기술. 이들 구성 요소를 단지 바르게 배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본 조건인 주목성, 가독성, 명쾌성, 조형성, 창조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종합적인 구성력과 조합 능력도 요구된다. 조합에 있어서는 각 구성 요소의 독자적인 역할과 동시에 전체로서의 통일된 질서 감각이 있는 레이아웃, 또 목적에 알맞은 것이 될 수 있도록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