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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

바탕 ground(영) fond(프)

바탕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소묘를 하는, 표면을 지탱해 주는 것이라는 뜻. 예를 들어 수성 물감을 칠하는 종이나 프레스코*를 바르는 회벽이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술적 의미는 물감을 칠하는 준비된 표면, 널빤지나 캔버스, 또는 다른 지지물에 그림을 그리기 전의 준비된 표면을 의미한다. 바탕의 목적은 서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고, 지지물에 물감이 흡수되는 것을 줄이며, 그림을 그리거나 데생*을 하기에 만족스러운 표면을 만들어 주고, 색의 선명성을 높이기 위해 그림물감과 지지물을 분리시키는 데 있다.
고대에는 널빤지-때로는 동물 가죽이나 캔버스 천으로 싼 널빤지-에 아교로 된 접합제와 섞은 석고 가루를 초벌하여 바탕을 만들었다. 흰색 바탕은 여러 가지 색을 낼 수 있게 하지만 색들 간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편 유색 바탕은 불투명한 그림을 그릴 때 적합하며, 색의 범위를 줄이고 색깔의 대조를 약화시킨다.

바하나

바하나 vāhana(범)

신이 타는 승물(乘物)을 말한다. 바하나는 주로 동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신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시바*의 바하나는 황소인 ‘난디Nandi’이고 비슈누*의 바하나는 태양의 새인 ‘가루다*Garuda’이다. 브라흐마*는 거위인 ‘함사hamsa’를 타며 가네샤*는 쥐를 타고 있다. 그 외에도 중요한 신들에게는 그들의 속성을 나타내는 바하나들이 있어 도상*적인 구분을 가능하게 해 준다.

박공

박공 博栱 gable(영) pignon(프)

고전 건축에서 경사진 지붕의 양쪽 끝부분에 만들어진 지붕면과 벽이 이루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공간으로, 보통 처마에서 지붕 끝까지 뻗어 있다. 양쪽으로 뾰족하게 경사진 지붕을 ‘박공지붕’이라고 하며, 이 지붕의 측면에 있는 삼각벽을 ‘박공벽’이라고 부르는데 박공이라는 용어는 이 두 가지 모두의 약칭으로도 사용된다.
로마 건축에서는 호(弧) 모양의 박공이 나타나며 이것은 지붕 끝에 설치했던 원래의 용도 외에 창문과 출입문 위에 설치해 비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반 건축물에서 박공이 등장한 것도 벽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방수 문제에 대해 미학적으로 만족할만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에서는 장식적 용도로 사용된 꺾임 박공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북유럽이나 서유럽에서는 깎아지른 듯한 경사를 갖는 지붕이 대부분으로 박공은 층계 모양이나 곡선 형태로 풍부하게 꾸미고 항아리나 조각상, 오벨리스크* 등으로 장식 효과를 높였다. 박공은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도 중요한 특징이다. 동양에서 박공은 돌출된 지붕 기와, 용마루와 처마선에 있는 기괴한 동물상 그리고 때때로 박공 표면에 새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박물관학

박물관학 博物館學
museology(영)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존재, 활동에 관한 이론적, 실제적 연구를 하는 학문. 본래 미술관 활동의 기본인 예술작품의 보존, 전시, 수집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뮤제오그래피(museography)가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보다 적극적인 미술관 활동의 연구가 진척되고, 미술관과 미술관 활동의 목적과 성격, 기능을 연구하는 박물관학이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활동 외에 특히 컬렉션*의 보급이나 미술에 대한 이해가 시청각적 수단에 의해 행해지며 강연, 영화, 세미나, 심포지엄의 기획 및 실시, 도서실과 자료실의 정비 및 공개, 카탈로그, 모노그래프, 연보 등의 출판, 특별전, 순회전 등의 기획과 개최가 행해진다.

박산향로

박산향로 博山香爐
bo-shan-xiang-lu(중)

산형(山形) 뚜껑을 가진 향로(香爐)의 일종. 대개는 하나의 버팀대와 용*(龍)이 장식된 기저부가 산형 뚜껑을 받치고 있다. 산형 뚜껑에는 야생동물과 이상하게 생긴 신기한 동물, 수렵꾼, 신선 같은 인물 등이 주출되어 있어서 중국의 신산(神山)을 조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부 기록에 의하면 ‘박산博山’을 본뜬 것이라고 하나 박산이 어느 산인지는 불분명하다. 산형 뚜껑에는 산봉우리 사이로 향연구(香煙口)가 뚫려 있어서 분향시에 향연(香煙)이 산의 서기(瑞氣)처럼 감싸며 피어오른다. 그리고 산형 뚜껑에 보이는 수렵문과 동물문에서는 유목미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박산향로는 한漢 무제武帝 무렵부터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무릉茂陵 1호묘에서 출토된 기원전 135년 명의 〈도금은죽절훈로鍍金銀竹節薰爐〉와 기원전 113년 이전의 것인 하북성河北省 만성滿城 1호 유승묘劉勝墓에서 출토된 〈금상감박산로金象嵌博山爐〉 등이 초기의 예이다.
한대(漢代)의 왕실은 청동제 박산향로를 가장 정교하게 제작해서 의식 중 분향시에 사용했고 무덤에도 많이 부장했다. 이후에는 간략해진 기형을 지닌 조악(粗惡)한 도기*(陶器)가 주로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으나, 불가(佛家)에 수용되어서는 불단(佛壇)을 장식하는 화려한 주요 기물로서 비상(碑像)이나 불상의 하단에 조각되었다.
중국에서 출토된 박산향로는 한대 이후에 점차 쇠퇴하는 추세를 보이는데 비하여, 정교한 기술수준과 다채로워진 물상(物像)을 보여주는 대형의 걸작이 한국에서 1993년에 발견되었다. 6세기말~7세기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용봉향로百濟龍鳳香爐〉는 전체높이 64cm로, 하단에서 용틀임하는 용이 상단의 신산(神山)을 받치고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봉황이 날아오르듯 날개를 펼치며 장엄하게 서 있는 위용을 보여준다.

박지기법

박지기법 剝地技法

도자기의 문양을 시문하는 기법 중의 하나. 분청사기*의 태토(胎土)로 그릇을 빚은 다음 그릇 전체에 백토로 분장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을 그린 뒤, 문양 이외의 배경부분을 긁어내고 그 위에 투명한 회청색의 유약을 발라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연화(蓮花), 연어(蓮魚), 모란 등이 박지기법으로 자주 나타나며, 15세기에 박지기법이 절정을 이룬다. 발굴된 도편의 분포지로 보아 박지기법은 주로 전라도 지방 가마*에서 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트리아 미술

박트리아 미술 Bactrian Art(영)

박트리아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란 지역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 왕조가 기원전 250년경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자 그리스인들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세운 독립 왕국으로 수도는 박트라Bactra(현 발흐Balkh)이다. 지역은 북쪽으로 자라푸샨 산맥 이남의 구소련령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힌두쿠시 산맥 이북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분포하며, 시대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의 박트리아 왕국시대부터 서기 7세기 후반 쿠샨 시대까지 미친다. 그리스계 왕들이 통치했으나 기원전 100년경 파르티아에 패배하여 그리스인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그 후 샤카족에게 점령된 박트리아 지역은 쿠샨의 등장 이전까지 샤카-파르티아 Śaka-Parthia계 왕들이 지배했다.
아므 다리아Amu Darya(오크서스강) 중류에 위치했던 그리스계의 박트리아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를 계속 유지, 그 후 이 지역에서 전개된 간다라 미술*로 이어져 중앙아시아*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가 되었다. 도시 유적지인 아이 카눔Ai Khanum에서는 그리스계의 신상과 영웅상들, 코린트식의 주두*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테르메즈Termez 근처의 아이르탐Airtam에서는 그리스의 대리석을 모방한 백색 석회암을 소재로 하여 아칸서스* 문양 사이에 악사(樂士)와 인물상을 배치한 프리즈*와 코린트식 주두에 이란적인 사자 무늬를 새긴 독특한 조각들이 발굴되었다. 박트리아의 건물은 태양에 건조시킨 연와(煉瓦)와 돌을 병용해 지었으며, 인 안디스 식의 집이나 이완 풍의 현관이 있는 궁전 등이 있고 아티카 식의 초석이 사용되었다. 또한 테라코타*로 만든 등신 인물상도 발굴되었다.
박트리아 왕국의 유적은 아이 카눔 이외에는 별로 없으며 미술 자료도 많지 않으나, 그 전통은 쿠샨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파르티아나 인도계의 문화가 유입되어 이들을 혼합한 독특한 미술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오크서스파(派)’라고 부르는 설도 있다.

반 盤

→ ‘이기’ 참조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왼쪽 다리를 내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의 자세로, 대좌* 위에 걸터 앉아 오른팔의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그 손가락으로 오른 뺨을 고이며 생각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말한다. 원래는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3세기경 불좌상의 양 협시*의 형식에서 출발하여 단독상으로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는 북위北魏시대 5세기말 운강석굴*에서 교각미륵상과 함께 불좌상의 협시로서 나온다. 이후 6세기 후반의 북제北齊시대에 성행하였으며, 단독상으로 태자사유상이라 명(銘)한 것도 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에 화랑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금동 또는 석조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예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78호 및 국보 제83호의 〈금동반가사유상〉, 경북 봉화 출토 〈석조반가사유상〉(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시대*(百鳳時代)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형태도 비슷하고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점,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통해서 볼 때 한국의 상으로 추정된다.

반닫이

반닫이

한국의 전통 목가구의 하나로, 주로 안방에서 물건을 넣어두는 장방형의 커다란 그릇으로 궤*(櫃)의 일종. 반닫이는 궤의 윗널이나 앞널의 절반쯤을 문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데서 생긴 호칭이다. 보통 느티나무, 느릅나무, 참죽나무와 같은 단단한 목제를 두껍고 폭넓은 널판으로 만들어서 튼튼하게 짠다. 판재끼리는 사개물림(양쪽 판의 끝을 모두 凹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한 맞물림)을 하고 금구장식으로 보강한다. 주로 의복과 문서, 서책, 제기(祭器) 등을 간수하는 데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