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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

사리탑 舍利塔

불사리를 봉안하는 탑*. 원뜻은 스투파*로서,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불탑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내에 봉안된 소형 불탑형의 공예품을 말하기도 한다. 원형은 5세기에서 시작되는 중국 육왕탑(六王塔)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쇼카왕의 팔만사천탑을 모방한 것으로 높이가 약 40층의 금속제 보협인탑을 닮은 형식이다. 10세기에 오월왕吳越王이 이를 본받아 만든 〈금도탑金塗塔〉도 은제, 동제로 높이 약 20㎝ 정도의 소탑이다. 수隋나라 때 각 주(州)에 세워진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은 목조 5층인 듯하고, 이외에도 사리탑이라고 칭하는 전탑(塼塔)석탑이 많이 남아 있다.

사모지붕

사모지붕

네모 반듯한 정방형 평면의 건물에서 형성되는 지붕이다. 사면의 기왓골이 지붕의 정상부에 모이는 구조인데, 작은 집에서는 절병통(節甁筩)으로 그 부근을 정리하고, 탑*에서는 상륜(相輪)을 설치하여 마감한다. 평면에 따라 육모, 팔모의 지붕이 형성될 수 있는데 현존하는 사원건축에서는 보기 드물다.

사바티에 효과

사바티에 효과 sabattier effect(영)

사진* 기법의 하나. 필름이나 인화지의 현상 중에 순간적으로 노광을 시키고 그 위에 현상을 진행할 때, 화상이 반전(反轉)되어 명암이 반대로 되는 현상. 사바티에 효과는 노광 전의 제1현상과 그 후의 제2현상과의 시간적 배분, 순간적인 노광의 양, 피사체의 명암 정도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된다.

→ ‘솔라리제이션’ 참조

사방탁자

사방탁자 四方卓子

한국 전통 목가구의 하나로 서책이나 완상품을 진열할 수 있도록 층널을 너댓개 얹은 네모 반듯한 탁자. 각목의 뼈대가 지닌 자연스런 나뭇결을 최대한 살리고 면막음을 거의 없애서 골격만으로 이뤄진 단순한 가구이며 가장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간혹 여러 층 중에서 한 층이나 혹은 맨 아래쪽의 면을 막고 문을 단 삼층탁자도 있다.

사산조 이란 미술

사산조 이란 미술 Sassanian Art(영)

224년 이란의 파르스Fars 지방에서 흥기(興起)한 아르다시르Ardashir 1세(재위 224~241)가 파르티아*를 물리치고 세운 왕조로 642년까지 이란을 통치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혈통임을 주장한 사산 왕조는 이란 고전 미술을 완성시켰다. 아르다시르 1세가 건설한 도시인 피루자바드Firuzabad의 궁전은 거칠게 자른 돌을 회반죽으로 붙인 이란 고유의 건축 기술로 축조되었다.
샤푸르Shapur 1세(재위 241~272)가 건설한 수도 비샤푸르Bishapur에도 2개의 궁전과 아나히타 신전의 유구가 남아 있다. 비샤푸르는 그리스의 전통에 따라 사각형의 요새지로 세워졌다. 궁전의 중앙에는 커다란 홀이 있고 사면에는 3중의 궁륭형 이완(iwān)이 있다. 석판이 깔린 이완의 바닥에는 모자이크* 패널*이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 모자이크의 주제는 〈화환을 만드는 여인〉 〈하프를 연주하는 여인〉 등인데 로마 미술*의 영향을 보여 준다.
5세기경에 만들어진 사르비스탄Sarvistan 궁전은 피루자바드 궁전의 구조와 비슷하여 이완이 있는 건물의 앞부분은 공식적인 장소로, 뜰이 있는 뒷부분은 거주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목재가 부족한 이 지역의 건축물은 주로 볕에 말리거나 불에 구운 흙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둥근 돔*으로 덮는 것이 일반적이다. 벽면은 스투코*를 발라 채색한 문양들로 장식하였다.
사산조 조각*의 대부분은 마애부조(磨崖浮彫)로서 왕의 전승(戰勝) 장면이나 서임식(敍任式) 장면을 바위면에 새겨 놓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피루자바드의 〈아르타바누스Artabanus 5세에게 승리한 아르다시르 1세〉와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식〉, 낙시 루스탐Naqsh-i Rustam의 〈말을 탄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식〉과 〈나르샤Narsah 왕의 서임식〉, 비샤푸르의 〈샤푸르 1세의 승리〉와 〈샤푸르 1세의 서임식〉, 타크 이 부스탄Taq-i-Bustan의 마애부조 등이 있다.
사산조 이란에서는 금속, 유리, 염직 등의 공예 미술이 매우 발달했다. 왕의 사냥 장면을 타출 기법*으로 장식한 은제 접시류는 매우 유명하다. 사산조 이란의 미술은 비잔틴* 제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신

사신 四神 si-shen(중)

중국 고대의 신(神)으로서,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가리킨다. 약 기원전 5세기의 문헌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이 상징적인 동물신은 전국(戰國)시대에 오행(五行)사상의 유행과 함께 방위와 색깔 등의 개념과 결합되어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사방의 별자리 형태와 대비시켜 동쪽에는 청룡을, 서쪽에는 백호를, 남쪽에는 주작을, 북쪽에는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현무를 배치시켰고 사방의 방위신으로서 군사부대의 깃발, 포진에도 응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적용되었다. 사신개념은 한대(漢代)와 남북조(南北朝)시대를 통해 풍수지리설과 신선사상 등의 조류와 결부되어 유행했다. 주로 무덤과 석관(石棺), 석비(石碑), 화상석*(畵像石), 와전*(瓦塼), 동경*(銅鏡) 등 방위의 의미를 지닌 특정공간에 사방의 수호와 벽사(辟邪)를 목적으로 장식되었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중국문화가 전래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무덤의 수호신으로 자주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로 무용총, 약수리고분, 호남리사신총, 강서대•중묘, 진파리 1호분 등이며 이러한 표현은 백제의 공주 송산리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주의

사실주의 寫實主義
Realism(영) Réalisme(프)

현실을 존중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예술 제작의 태도 또는 방법. 묘사하려는 대상을 양식화, 이상화, 추상화, 왜곡하는 방법과 대립하여 대상의 세부 특징까지 정확히 재현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주의의 본래 의미는 단순히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의 일상 생활을 주제로 삼는 것을 뜻한다. 이에 반해 자연주의*는 단지 외형을 충실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에 따라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를 대신하여 1840년대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 도미에Honoré Daumier(1808~1879) 등에 의해 일어나 1850년대에 절정에 달한 프랑스의 미술운동을 말한다. 사실주의 미술은 사실주의 문학과 더불어 19세기 중엽에 프랑스 예술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사실주의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 작품이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따라서 역사나 알레고리*, 미적 대상* 등 전통적인 주제를 탈피하고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중하층 서민들의 생활상,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모습과 가치관 등 동세대의 삶과 사회의 면모를 재현하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하였다.
사실주의 미학을 최초로 선언한 화가인 쿠르베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이 직접 체험한 당대의 모습만을 꾸밈이나 미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리겠다는 예술적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는 1855년 만국박람회에 자신의 작품이 거부당하자 가설천막에다 ‘사실주의, 구스타브 쿠르베’라는 이름을 내걸어 개인 전시회를 열고, 그 서문에서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현실을 본대로 그린다”고 밝혔다. 쿠르베와 함께 열렬한 민주주의자였던 도미에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빈민층, 악덕 변호사, 부패한 정치가 등을 주제로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을 풍자하였다. 한편 19세기 미국에서도 사실주의 미술이 나타났는데, 호머Winslow Homer(1836~1910)나 이킨스Thomas Eakins(1884~1916)는 당시 미국적 삶을 솔직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재현하였다.
추상에 경도되었던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은 사실주의를 배격하였지만, 대공황기에는 사회적 사실주의* 미술운동이 등장하였고 195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팝 아트*와 신사실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심리적인 상황에 의거하여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묘사한 피슬Eric Fischl의 작품같은 경우는 사실주의를 동시대적인 경험을 조명하고 논평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긴 19세기 사실주의의 관점을 연상시킨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나타난 극사실주의*는 기계적 복제*의 응용이나 세부의 클로즈 업 등을 이용하여 대상을 실물과 착각을 일으킬만큼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현대의 복제 문화를 반영하였다. 이밖에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운동으로는 20세기 구소련에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창도 아래 전개된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있으나, 실제로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실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의 모범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선언

사실주의 선언 寫實主義宣言
Realistic Manifesto(영)

러시아 구축주의*자인 가보Naum Gabo(1890~1977)와 펩스너Antoine Pevsner(1886~1962),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1970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발표한 선언문.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 이후 구축주의 미술가들은 보다 개인적인 미술을 추구하려는 작가들과 대중을 위한 공익적 설계를 내놓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이견으로 두 파로 갈라졌다. 즉 타틀린Vladimir Tatlin(1885~1953)이나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1891~1956)가 점점 예술이 특수하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혁명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가보와 펩스너는 화가로서의 독자성과 자신의 자유로운 실험에 따르는 화가의 권리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투쟁하였다. 이러한 입장들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주의 선언>의 선포이다. 가보와 펩스너가 서명한 선언의 초안은 사실 가보에 의해 작성되었으므로, 그 선언문에 포함된 사상의 책임은 주로 가보가 지고 있었다.
사실주의 선언문은 ‘인간 역사의 장에서 아직 펼쳐지지 않은 시대’에 적절한, 예술에 있어서 새롭고 위대한 양식을 열정적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그 새로운 프로그램의 본질은 ‘삶이 자리잡은 그 위에 예술이 구축되어져야만 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의 재탄생이었다. 서술적인 색채와 선, 공간, 양괴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즉 모든 요소들은 그들 자신의 실재성을 갖게 되었고 시간과 운동이 그들의 작업에서 기본적인 것이 되었다. 이 선언문은 몇 해에 걸친 러시아 추상미술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고양되었던 사상이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비록 가보는 선언문을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당시 자신의 그룹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하나의 요약으로서 기술하였지만, 그것은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당시 부상하고 있었던 추상 화가와 조각가들이 입체주의*의 시작 이후로 분투해 왔던 문제들과 논쟁들에 대한 많은 부분을 명쾌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 ‘구축주의’ 참조

사왕

사왕 四王

→ 사왕오운

사왕오운

사왕오운 四王吳惲

청초(淸初)의 산수화가 왕시민王時敏(우앙 스민, 1592~1680), 왕감王鑑(우앙 지엔, 1598~1677), 왕휘王絮(우앙 후에이, 1632~1717), 왕원기王原祁(우앙 위앤치, 1642~1715), 오역吳歷(우 리), 운수평惲壽平(윈 서우핑) 등 여섯 사람에 대한 총칭. 그들은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基昌(똥 치츠앙, 1555~1636) 후에 명성을 얻고 화단을 이끌면서 당시의 양식을 좌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