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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미술

신라 미술 新羅美術

신라는 사로斯盧라는 성읍국가가 핵심체가 되어 4세기로 들어서면서 실질적인 왕국으로 발전한 나라이며,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356~402)시대가 신라왕국 전환기의 김씨 왕족의 세력정착기로 파악되고 있다. 7세기 중엽에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국가를 이룩하였다. 신라의 미술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경주 시내에 분포하고 있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이곳에 부장된 금은장신구, 칠기*, 무구, 마구, 유리기, 토기* 등의 부장품과 황룡사를 비롯한 절터 등의 불교 유적과 불상, 와당 등의 불교 조각과 건축물들이 있다.
고분:돌무지덧널무덤은 지하나 지상에 덧널을 짜넣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덧널의 상부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로 고구려나 백제, 가야와는 다른 독특한 형식이다. 대표적인 무덤으로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 〈식리총〉 〈천마총天馬塚〉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공예:장신구로는 관귀고리, 목걸이, 허리띠, 금동식리(金銅飾履) 등이 있다. 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되어 있는데, 내관은 중국에서 변(弁)이라 부르는 삼각형의 모자형이고 내관의 앞면에 새날개 모양의 장식을 꽂았다. 외관은 둥근 테에 세개의 출자형(出字形) 장식관과 두개의 사슴뿔 모양의 장식관을 작은 못으로 고정시켰고 여기에 금판으로 만든 장식과 곱은 옥*(曲玉)을 달았다. 귀고리는 귓불에 끼는 윗고리가 굵은 태환식(太鐶式)과 가는 세환식(細鐶式)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중간 장식과 끝장식은 여러 가지 형태이다.
허리띠는 금, 은, 금동으로 만든 네모난 둥근 판에 하트형 또는 둥근 모양의 고리 여러 개를 가죽 또는 천으로 된 허리띠 표면에 작은 못으로 박고 여기에 여러 줄의 긴 장식을 달았다. 장식에는 손칼, 족집게, 약통 등이 있어, 각종 일상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녔던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과 연결된다. 무기로는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대표적이다.
용기류에서는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리기가 주목되는데,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에서 출토된 잔(盞)과 황남대총 남부에서 출토된 봉수형병(鳳首形甁)이 있다. 토기로는 밀폐된 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워진 아주 단단한 긴 목항아리, 짧은 목항아리, 굽다리접시가 중심을 이루고 그 외에는 그릇받침 손잡이 달린 잔, 동물, 배 모양의 이형토기(異形土器)들도 있다.
회화:신라의 회화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고유의 회화양식을 구축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 중에서 화적(畵跡)이 가장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마총(天馬塚) 출토의 자작나무 껍질테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천마총,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출토된 칠기(漆器)에 그려진 화염문, 봉황문 등이 발굴되었다. 이들 회화적 요소들은 공예를 주로 하던 장인들의 솜씨라는 점에서 당시 최고수준의 회화를 엿보기에는 미흡하나 능숙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는 채전(彩典)이 설립되었음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 알수 있는데, 후대의 도화원圖畵院과 같이 화원들이 활동을 한 국가기관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랑

신랑 身廊 nave(영) nef(프)

‘배’라는 의미의 라틴어 ‘나비스(navis)’에서 유래한 건축 용어.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측랑*이 양쪽에 붙어 있는데, 열주*에 의해 구분된다. 정면, 현관 복도에서 내진*에 이르는 중앙의 긴 부분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된다.

→ ‘내진’ 도판 참조

신미술가협회

신미술가협회 新美術家協會
Neue Künstler-vereiningung München, NKV(독)

뮌헨을 지배하고 있던 유겐트슈틸*에 반대하고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적인 경향에 의거하여 1909년 1월 설립된 표현주의* 작가들의 협회.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카놀트Alexander Kanoldt, 에르프슬뢰Adolf Erbslöh가 주도하여 성립되었으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1864~1941), 쿠빈Alfred Kubin(1877~1959), 뮌터Gabriele Münter(1877~1962),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1860~1938) 등도 창립 회원이었다.
그 밖에 바움Paul Baum, 호퍼Carl Hofer(1878~1955), 베흐데예프Vladimir von Bechtejeff, 보시Erna Bossi, 코간Moissey Kogan, 무용수인 자하로프Sacharoff 등도 1909년에 잠시 참여했으며, 1910년에는 프랑스 작가인 지리외Pierre Girieud와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 1911년에는 제2회 전시를 보고 감명 받은 마르크Franz Marc(1880~1916)와 피셔Otto Fischer가 가입했다. 피셔는 이후 칸딘스키가 떠난 후 이 협회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 협회의 전시회는 모두 세 번에 걸쳐 개최되었다. 1909년의 첫 전시는 보수적인 관중이 그림에 침을 뱉을 정도로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다.
두번째 전시는 보다 유럽적인 성격을 띠어 러시아의 부르류크 형제David & Vladimir Burljuk, 데니소프Wassili Denisoff, 모길레프스키Alexandre Mogilewsky 등과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 드랭André Derain(1880~1954), 반 동겐 Kees van Dongen(1877~1968),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k(1876~1958) 그리고 독일의 조각가 샤르프Edwin Scharff와 회트거Bernhard Hoetger 등 많은 초대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에르프슬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는 칸딘스키의 추상을 거부하자 칸딘스키를 비롯해 그와 예술적 사상을 함께 발전시켰던 뮌터, 야블렌스키, 마르크 등이 탈퇴하였고 회원 대다수는 유겐트슈틸과 야수주의적인 양식을 혼합한 경향으로 작업하게 되었다. 칸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청기사파*를 새로이 설립하였고, 신미술가협회의 제3회 전시일자와 같은 날에 최초의 전시회를 열게 된다.

신사

신사 神寫

대상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성을 표현해 내는 것. 형사*(形似)와 대비되는 동양회화 용어이다. 직역하면 ‘정신의 닮음’이다. 훌륭한 그림은 본래 형사와 신사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형(形)’과 ‘신(神)’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그 입장이 달랐다.
중국 춘추(春秋)시대로부터 양한대(兩漢代)까지는 형사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동진東晋(317~420)의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가 전신*론을 제시하면서부터 신사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전신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이형사신(以形寫神;형상으로 정신을 그린다)’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남북조(南北朝)에서 수隨, 당唐에 이르는 동안은 ‘형’과 ‘신’이 함께 중시되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문인화*론의 발달로 신사가 더욱 중시되었다. 신사는 문인화의 이론이 정착되면서 회화 비평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은 “형사로써 그림을 논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견해와 같다”고 말했다. 원문袁文(위앤 원)은 “그림을 그릴 때 형의 묘사는 쉽지만 신의 묘사는 어렵다. 형이란 그 형체(形體)요, 신이란 그 신채(神彩)이다. 무릇 사람의 형체란 그림을 배우는 사람이면 모두 그려낼 수 있지만, 신채에 이르면 스스로 남을 앞지르지 못하면 표현해낼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신사는 형신겸비(形神兼備)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북송의 황휴복黃休復(후앙 시어우후, 10세기말~11세기초)은 육법*을 논하면서, “오직 형사와 기운(氣韻) 이 두 가지를 먼저 내세워야 한다. 기운은 있는데 형사가 없으면 바탕(質)이 무늬(文)를 앞서게 되고, 형사는 있는데 기운이 없으면 화려하지만 내용은 사라져 버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기운’이란 곧 ‘신사’이다. 조이도晁以道(츠아오 이따오), 양신楊愼(양 선) 등도 “그림이란 그저 형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형신(形神)을 함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했다.

신사실주의

신사실주의 新寫實主義
New Realism(영)

신사실주의는 이미 1962년에 미국과 프랑스에서 팝 아트*를 달리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미국에서 팝 아트의 의미로는 널리 통용되지 못했고 대신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를 의미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인본주의적인 내용을 지녔고, 관찰한 실재 사물을 사실로 착각하도록 묘사했으며, 추상*에서 나온 평면적인 화면공간을 배격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리얼리즘은 1950년대를 장악한 추상표현주의*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한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평면화된 공간, 거대한 캔버스*, 모더니즘* 회화의 단순화된 색채사용 등의 특징을 받아들였다.
신사실주의는 너무나 포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을 추상으로 분류하는 식과 마찬가지로 신사실주의를 구상*이라고 간단히 정의하는 방법 외에는 정확한 의미를 규정지을 수 없다. 신사실주의는 포터Fairfield Porter의 평화스러운 풍경에서부터 닐Alice Neel의 교묘하게 내면을 드러내는 심리학적 초상화*, 그리고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1924~ )의 추상화된 누드화에서부터 베크먼William Beckman의 지적인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또 신사실주의란 용어는 비제스처적이거나 비표현적으로 물감을 다루는 기법을 의미하며, 이로써 표현대상의 외형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신상

신상 神像

각 종교에 있어 신성(神性)이 인간의 모습이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표현되고, 예배의 대상이나 수호상(守護像), 봉납상(奉納像) 및 기타 제사의 대상물이 되는 조상이나 회화*.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적으로 신에 대한 계보가 형성되기 이전 시기에 주술적 제사에 사용되던 상징물을 포함한다. 따라서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과 신석기시대에서 금석병용 시대에 걸쳐 시베리아, 유럽, 중동, 근동,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지모신상(地母神像)도 이에 속한다. 이 시기의 우상은 풍요나 다산의 주술적 상징일 뿐 아니라 자연이나 동물 등 불가사의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을 상징화한 것이기도 했다.
협의의 신상은 종교적 계통의 성립과 제사의 일반화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문명의 여명과 동일한 시기에 성립된다. 이집트에서 민 신, 호루스 신 등에 관한 표현은 이미 선왕조 말기에서 초기왕조시대에 시작되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는 신의 성격상 동물이나 새의 형태를 띠는 신상이 많았으며, 신성에 완전한 인간상을 부여하게 된 것은 그리스 미술*에서였다. 그리스 미술은 이른바 크소아논(xoanon)형의 조상에서 출발하여, 신성은 인격화되고 인간의 모습은 신성을 표현하는 신격과 인간상의 통일을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우상 표현이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동서 기독교 미술에서 유일신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나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예수 등으로 형태화되었다. 특히 비잔틴*과 그 영향권 내의 미술에서는 ‘도상*(icon)’이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도상적 표현은 예배상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제사의식과 밀접히 상호관련되는 문명의 성숙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상 안치실

신상 안치실 神像安置室 cella(영)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사방을 밀폐하여 신상을 안치한 가장 중요한 장소로, 규모가 큰 신전에서는 여러 개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전에서는 나오스(naos)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석기시대 미술

신석기시대 미술 新石器時代美術
Neolithic Art(영)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9000~8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석기시대의 최종단계. 촌락을 형성하고 농경과 목축, 곡물 재배가 행해진 최초의 사회이지만 미술사적으로 보면 신석기시대에는 구석기시대의 미술에 비하여 동굴벽화 같은 회화는 적고, 회화적인 부분은 채문토기의 문양이 많으며 토우(土偶)나 석우(石偶)들이 주류를 이룬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석기시대인 하스나기(기원전 5700~5300년경)부터 나타나서 유라시아 지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각지의 문명을 대표하게 된 채문토기에는 양질의 점토를 정선하여 만든 기면(器面)에 적, 백, 흑색 등의 채색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나 동물 무늬 등이 새겨진다. 하스나기에는 평행사선문, 격자문, 삼각문, 지그재그문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주를 이뤘고, 사마라기(기원전 5300~5000년경), 할라프기(기원전 5000~4300년경)에는 열점문(列点紋) 등의 문양이 첨가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동물이나 인물을 섞어 그리거나 소용돌이 또는 물결무늬 등을 혼용하면서 전체를 채색하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이집트 채문토기의 문양은 단순하고 인물이나 형상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토우와 석우는 구석기시대 후기의 유럽에 있었던 석재나 골각제 또는 토제의 인형 따위를 선구로 하는 것인데, 특히 신석기 농경문화에서는 풍요의 여신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구석기시대의 스티아트파이크스형을 연상케 하는 여성 토우가, 아나톨리아에서는 자유로운 표현의 사실적 여성 나상 토우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소박한 토우나 토수(土獸)가 있다. 하스나 문화 이후에는 구워 만든 토우나 석우가 있고 유방이 큰 여성의 좌상이나 염소, 소 등의 동물상도 있다. 이외에 유럽의 거석분(巨石墳) 벽면에 새겨진 도문(圖文)들도 신석기 미술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신선산수

신선산수 神仙山水

중국 고대의 신선 사상에 기초하여 신선의 세계를 산수화*로 그린 것. 〈영주신선도瀛州神仙圖〉〈봉래산도蓬萊山圖〉 등이 예부터 그려졌다. 환상적이고 신비스런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기괴하고 가파른 산봉우리를 잇달아 그리고, 화려한 누각을 배치하였으며, 학이나 거북 등 상서로운 동물을 종종 그려넣는다.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육조(六朝)시대와 당대(唐代)를 통해 성행하였으며, 송대(宋代) 이후로는 전통적인 방식인 청록산수*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소재

신소재 新素材 new materials(영)

새로운 재료나 재질을 의미. 어떤 물질이든 미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고가 20세기 전반에 확립되었으며, 버려진 쓰레기나 산업 재료 나아가 생명체까지 미술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러한 발상은 조각*, 건축, 회화* 등 전영역에 있어 기법과 양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다양한 소재의 이용은 입체주의*의 콜라주*에서 시작되어 쓸모없는 폐품들을 재료로 한 정크아트*에 이르는 앗상블라주*에서 큰 발전을 보게 되었고,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회화와 조각에 대한 종래의 구분, 즉 장르 자체의 전통적인 개념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신소재로는 각종 금속들과 합성수지 및 전기를 사용한 기구 등이며, 재료의 확장은 용접,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등 미술기법과 형식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회화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신소재로는 아크릴* 물감과 플라스틱 페인트로서, 1950년대 말부터 사용되어 스테인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제작 방식을 가능하게 했다.
20세기 중반의 미술이 점차 구상적 또는 초기의 의미에서의 추상미술*에서 벗어나 개념적이거나 환경적인 작업들로 전개되면서 흙이나 동식물 같은 자연 재료들이 도입되었고, 물질, 시간, 공간과 같이 작품으로서의 확고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도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