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아웃사이더 아트

아웃사이더 아트 Outsider Art(영)

아웃사이더란 사회나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그 범위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국외자 혹은 권외자,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데, 아웃사이더 아트는 미술사에 있어서는 주류를 이루는 흐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경향을 통칭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즉, 미술에 있어 보통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아마추어적인 흐름을 나타내며 소박화가*, 아르 브뤼* 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특정 집단에 구속되지 않으므로 풍부한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기성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벗어나 틀 밖에서 사물을 보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 등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 ‘소박화가’ ‘아르 브뤼’ 참조

아이반

아이반 aivan

이반(ivan)이라고도 한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건축에서 보이는 일종의 테라스. 건물을 아주 깊숙이 가려주며, 바깥 쪽에 기둥이 있다.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은데, 파르티아나 박트리아에서 먼저 이것을 사용했다. 중앙 아시아의 경우, 기둥은 대개 나무이고 주춧돌로 받친다.

아이소타입

아이소타입 ISOTYPE(영)

아이소타입은 ‘국제 그림글자 교육기구International System of Typographic Picture Education’의 약어이며, 동일하다는 뜻의 접두어인 ‘iso’와 형(形)이라는 ‘type’이 합성된 등형법(等形法)이란 의미도 된다. 철학자이며 교육자로서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장이던 노이라트Otto Neurath 박사가 1925년 시각교육 연구소를 설립하여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고 특히 시각교육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간략화된 그림언어를 창안하였으며, 그 기본원리 및 질서 또는 그 이념까지를 아이소타입이라고 한다.
그는 그림의 뜻을 설명하는 문장을 확립하기 위해 시각사전과 기호의 문법을 만드는 시도도 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노이라트 부인이 연구를 이어 받아 런던에 아이소타입 연구소를 세워 세계적인 보급을 꾀했다. 아이소타입은 통계 도표나 교과서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데, 아이소타입 방식의 형상도를 단위로 함으로써 도표의 내용을 명쾌하고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아이소타입은 언어를 초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현대적 시각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이시에이

아이시에이 Institute of the Contemporary Arts, ICA(영)

ICA는 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고무시키기 위해 리드Herbert Read(1893~1968)와 펜로즈Roland Penrose(1900~1984)에 의해 1947년에 창립되었다. 이 연구소의 프로그램에는 미술 전람회, 영화, 연극 공연, 음악회, 시 낭송회, 강연 및 토론회 등이 포함되었다. 영국의 지도급 예술가들이 이 곳의 회원이었고 이 연구소의 후원 아래 다양한 협회가 결성되었다.

아잔타 석굴

아잔타 석굴 Ajantā caves(영)

인도의 데칸 고원 서부에 위치한 석굴사원으로 마하라슈트라주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에서 북동쪽으로 약 105km 떨어진 아잔타Ajanta 마을 근처에 있는 와구르나 협곡의 절벽을 파서 만들었다.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2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서기 2세기경 중단되었다가 5세기말부터 다시 석굴 조영이 시작되어 대략 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미완성된 굴까지 포함하여 약 30여 개의 석굴이 있는데, 9, 10, 19, 26, 29굴이 석굴사당(石窟祠堂)(차이티야*)이고, 나머지는 승방(僧房)(비하라*)이다.
기원전 100년경 만들어진 제10굴이 가장 오래되었으나 제9굴 역시 비슷한 시기인 안드라 시대*에 만들어졌다. 8, 12, 15굴은 기원 전후에 조영되었으며 그 후로는 석굴 건축이 중단되었다. 5세기 말경 16, 17, 19굴이 만들어졌으며 석굴 조영은 6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초기에 만들어진 석굴들은 구조도 간단하고 조각*도 거의 없지만, 굽타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석굴들은 조각이나 장식이 화려하다.
아잔타 석굴 중에서 벽화*가 남아 있는 굴은 6세기 초에 속하는 1, 2굴과 5세기 말경에 해당하는 16, 17굴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굴들은 대승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보살상이나 본생담* 등이 벽화로 그려졌다. 벽화는 우선 벽이나 천장의 표면에 짚이나 동물의 털을 섞은 진흙을 발라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다음 다시 젯소*(석고)를 입히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제1굴(승방)에는 불상이 있는 감의 왼쪽 벽면에 연꽃을 든 연화수보살(관음보살*)이, 오른쪽 벽면에 바즈라(vajra)를 든 보살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매우 유명하다. 바즈라를 든 보살은 현재 검게 변색되어 있어 연화수 보살을 그린 화가와는 다른 안료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살상들의 그림은 굽타기의 사르나트* 불교 조각상과 유사하여 당시 조각과 회화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즈테카 미술

아즈테카 미술 Azteca Art

아즈테카족 또는 멕시카족은 고대 멕시코사(史)의 최후에 등장한 민족으로 멕시코 중앙고원분지 테스코코 호상(湖上)의 섬에 14세기 초 수도 테노치티블란을 정하고, 톨테카 문명을 이어 받은 주변 도시국가군에서 문화를 흡수, 15~16세기 초 찬란한 도시문명을 이룩하였다.
현재 아즈테카 미술의 수작으로 남아 있는 것은 1521년 스페인의 침입으로 파괴된 테노치티블란의 종교 건조물, 궁전 건축의 일부, 부속 장식품이었던 대소 석조, 의례용 토기 등이다. 석조는 <티소크의 돌> <성스러운 전쟁의 신전> 등과 같은 기념비, <태양의 돌> <코아토리크에의 상> 등 종교적 상상력을 표현한 작품, <치코메코아톨 상>과 같은 소박한 농경 여인상 및 <독수리 전사상>과 수많은 <마세왈 상>(모두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박물관 소장), 돌 마스크와 같이 놀랄만한 사실적 표현력을 나타내는 작품 등이 주목된다.
우모세공, 석세공은 믹스테카 계 직공들의 기량을 나타내는 작품이 많고, 전자의 대표적 작품으로서는 <모크테스마왕의 왕관>(빈, 국립민속박물관), 후자의 예는 모자이크의 <테스카트리포카 상>(대영박물관), 수정의 두골상(대영박물관), 흑요석(黑曜石)에 의한 원숭이형 용기 등이 유명하다. 토기로는 오렌지색 바탕에 기하학적 무늬를 그린 세발접시와 향로, 푸르케 주(酒)의 용기 등이 특색 있고, 목제품에는 웨웨톨, 테포나스톨리라 불리는 북이 대표적이다. 금은 세공도 믹스테카 계 장인이 주로 제작하였으나, 스페인의 약탈로 인해 유물은 매우 적다.

아치

아치 arch(영)

벽이나 수직의 석조 건물의 개구부(開口部)에 상부의 하중을 지지하기 위하여 깎은 돌이나 쐐기형의 돌, 입방형의 돌 또는 벽돌 여러 개를 맞대어 곡선형으로 쌓아올리는 건축 구조. 구조상으로는 상부의 하중이 각 굄돌의 접촉면에 수직 방향의 압축력으로 전달되고, 아치 하단의 바깥쪽으로 벌어지려는 힘은 벽을 안정적으로 두껍게 함으로써 처리된다. 목조 건축에 있어서는 보와 같은 수평재에 의해 상부하중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아치는 압축력이 강한 석재나 벽돌의 특성을 살린 조적조의 본질적 구축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아치는 두 개의 큰 돌을 비스듬히 기대어 만든 초기의 것에서부터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변형, 발전되었다. 반원 아치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미학적으로는 아름다우나 구조적으로 볼 때는 정상 부분이 약하여 건물 상체의 하중을 지탱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로마나 중세 건축가들이 널리 이용한 아치 형태이며,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도 다시 유행하였다.
사슬형 아치(catenary arch)는 역학적으로 볼 때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의 아치가 그 전형이다. 고딕형의 기본 형식이라 일컫는 첨두 아치(pointed arch)는 사슬형 아치와 비슷한 것으로 하부에서 바깥쪽으로 벌리는 힘이 작으므로 건물을 높게 하고 개구부도 넓게 만들 수 있었다. 세그멘털 아치(segmental arch) 는 고딕* 양식의 완숙기인 13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성당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둥근 모양의 선분이 서로 받쳐주는 모양이다. 후기 고딕과 이슬람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오지 아치(ogee arch) 는 원의 중심이 둘로서 S자형으로 만들어진다. 직립 아치(perpendicular arch)는 중심은 같고 반지름의 길이가 서로 다른 여러 원들로 되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철골, 철근 콘크리트 등의 건축 재료의 혁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아치형태는 구조적으로 하중을 잘 견디는 가장 훌륭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 밖에 아치의 모양에 따라 횡당 아치, 사분원 아치, 융기된 아치, 커튼형 아치, 튜더식 아치, 말발굽형 아치 등 다양하다.

아치볼트

아치볼트 archivolt(영)

건축용어로서 아치* 앞면의 가장자리에 붙인 장식물을 지칭한다. 아치를 형성하는 쐐기 모양의 석재 또는 벽돌 바깥쪽 커브에 따른 조형(繰形)의 장식. 예를 들어 아치 앞면에 장식적으로 두른 띠 또는 팀파눔*에 장식적으로 두르는 일련의 띠로서, 조각으로 장식되기도 한다.

아카데미

아카데미 academy(영)

예술가, 문필가, 학자 등 전문가들로 조직된 단체의 총칭으로 대부분 교육적 기능을 가진다. 회화, 조각 등의 기법을 가르치는 미술 학교나 고등 연구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아카데미는 기원전 387년에 플라톤Plato이 아테네 북서쪽에 있는 영웅신 아카데모스의 신역(神域)에 청년들의 심신을 수양시켜 국정에 공헌할 인물을 배출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세운 ‘학원 아카데미아Academia’에서 유래하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이 단어는 철학이나 문학 모임에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16세기경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공식적인 말이 되었다.
최초의 아카데미는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1493~1560)가 로마에 창설(1531)한 것이며, 본격적인 것은 1562년 플로렌스에서 코지모 데 메디치Duke Cosimo de Medici의 후원으로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 등에 의해 추진된 ‘아카데미아 델 디제뇨 Academia del Disegno’이다. 그 목적은 길드(guild)의 통제로부터 미술가들을 해방시키고 이미 100여년 간 성취해 온 미술가들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확고히 하는 데 있었다. 아카데미의 원장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와 코지모 데 메디치가 맡았으며 36명의 미술가가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기하학 및 해부학 강의로 짜여져 있었지만 정규 작업 실습을 대치할 만한 필수교육 계획안은 없었다.
1593년 로마에서는 주카로Federigo Zuccaro가 원장으로 선출되었던 ‘성 루카 아카데미 Academia di S. Luca’가 창립되어 특히 17세기 교황 우르반 8세Urban Ⅷ(Moffeo Barberini)의 강력한 후원 하에 성장해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1648년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가 창립되었으나 1661년 콜베르 대제Jean-Baptist Colbert(1619~1683)가 부후견인으로 선출된 이후에야 비로소 길드와의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아카데미 내에 공적 기준과 취미 원리를 부과하는 기구가 성립되었다. 콜베르와 미술행정가 르브룅Charles Lebrun(1619~1690)은 미술의 지도 원리를 세움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미술’이라는 표현이 명확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아카데미는 교육 및 전시의 실질적인 독점권을 쥐고 회원들에게 그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시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르브룅의 아카데미즘은 계몽주의 시대를 점철했던 합리주의의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아카데미 이론은 원칙적으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채택했으며, 학생들에게 상(賞)으로 고전 양식을 현장에서 연구할 기회를 주기 위해 1666년 로마에 지부가 설립되었다.
그 이후 1790년경에는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Royal Academy 를 포함해 100여개의 아카데미가 유럽 전역에 번성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으로 인해 아카데미 회원들의 독점적인 특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 대두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816년에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 Arts’로 복권되었다. 아카데미에 대한 반발은 귀족의 후원이 쇠퇴한 후 창조적인 미술가와 부르주아 대중 간의 분열에 의해 가속화되었으며, 독창적인 그룹과 아카데미의 대립은 20세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아카데미 피겨

아카데미 피겨 academy figure(영)

일반적으로 반등신대(半等身大) 작품을 말하며, 예술작품이라기보다 교육적인 목적이나 연습을 위해 제작된 세밀한 나체*나 그 소묘* 작업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통은 16세기 카라치Annibale Carracci(1560~1609)로부터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