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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슈 gouache(프)
수용성의 아라비아 고무를 교착제로 하여 반죽한 중후한 느낌의 불투명 수채물감이나, 이 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회화. 두껍게 바를 수 있을 뿐 아니라 투명한 효과를 내기 위해 엷게 녹여 수채화식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수채화와 병용도 가능한 까닭에 독특한 현대회화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색조는 선명하지만 유화와 같은 윤기는 없으며, 가라앉은 부드러운 맛을 낸다. 혼색을 하면 선명도를 잃기 때문에 주로 단색으로 사용하며, 색과 색을 겹쳐서 복잡한 색감이나 마티에르*를 얻기도 한다. 투명한 수채물감에서는 하이라이트* 및 가장 밝은 부분을 종이의 여백을 이용하여 나타내지만 과슈에서는 백색물감을 혼합하여 그린다. 마르면 젖어 있을 때보다 밝은 색조로 된다. 그러나 래커를 칠하거나 씻어서 깨끗이 할 수 없으며, 건조된 공기 속에서는 벗겨지기 쉬운 약점도 있다.
과정미술 過程美術 Process Art(영)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 작품의 주제로 삼는 미술. ‘과정’에 대한 본격적인 의식은 1950년대 액션 페인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액션 페인팅의 전면에 부각되는 행위적 성격이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그 후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 등의 개념과 함께 긴밀히 이어졌던 개념이다. 과정미술가들은 미니멀 아트*의 형식주의*와 인간 감정 부재에 반발한 것이므로, 미니멀 아트는 과정미술의 발달에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과정미술은 1969년에 열린 두 개의 전시회를 통해 공인 받았다. 하나는 베른미술관에서 스지먼Harold Szeeman의 기획으로 열린 <태도가 형태화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몬티James Monte와 터커Marcia Tucker의 기획으로 열린 <과정-물질>이다.
과정미술은 전형적인 오브제* 이용 과정과 환경을 변혁하는 행위에 의해 인간의 경험과 그 행동의 한계성을 인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자연히 시간적인 서술형식을 위한 소재와 재료의 선택이 중요한 구성요소로 간주된다. 과정미술가들은 얼음, 물, 풀, 왁스, 펠트 같은 재료를 이용하여 작품에서 인생의 무상함이 느껴지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철을 조립한 안드레Carl André(1935~ )의 작품은 철 구성물만이 아니라 녹스는 과정까지도 포함하며, 헤세Eva Hesse는 파이버글라스나 라텍스같이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불안정한 재료들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형성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자체 분해되는 추상 형태를 창조했다.
또한 과정미술가들은 어느 곳에서 전시되어도 잘 맞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태 대신, 작업실 바닥이나 야외 공간 여기저기에 작품의 구성요소들을 뿌려놓는 등 특정 장소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제작했다. 불변의 미술작품 대신 창조적인 제작 과정을 추구한 과정미술은 경험 자체를 위해 경험을 하는 데에 주목한 1960년대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과정미술은 같은 시기에 반(反)미니멀리즘 성향을 나타낸 다른 미술들, 즉 아르테 포베라*, 개념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같은 미술들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과학적 인상주의 科學的印象主義
Scientific Impressionism(영)
신인상주의*에 대한 또 다른 명칭. 종래의 인상주의*를 더욱 이론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이와 상대적으로 전통적 인상주의를 ‘낭만적 인상주의Romantic Impressionism’라고 부르고 있다.
→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참조
관 款
관지(款識), 관서(款署), 관기(款記)라고도 한다. ①그림을 그린 후 그림 위에 작가의 자호(字號), 제작년월일, 제작동기, 시문(詩文) 등을 기록하는 것. 넓은 의미에서 도장을 찍는 것도 포함된다. 중국의 송대(宋代)이후 보편화되었고 원대(元代)에는 문인화가 예찬倪瓚(니 짠, 1301~1374)이 긴 문장의 관지를 기록하고 도장을 찍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 이래 보편화되었다. 관의 위치나 필치, 내용은 그림의 한부분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②고대 종정이기鐘鼎彝器와 같은 고동기(古銅器) 위에 새겨진 글자. 음문을 관, 양문을 지(識)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의 고동기는 제기의 일종으로 왕권이나 벽사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화려한 형태와 장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동기 위에 관지가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주대(周代)부터로 역사적 사실이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따라서 고대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에서는 이러한 관의 해석을 중요시하고 있다.
관각체 館閣體
명, 청대(明淸代)의 묵색이 짙고 글씨 크기가 고른 네모 반듯하고 깔끔한 관청의 서체. 명대에는 ‘대각체臺閣體’로, 청대에는 ‘관각체’로 불렸다. 이 서체는 명, 청대의 한림원翰林院의 관료들이 즐겨 사용하였고 과거 응시자에게도 요구되어 청대 건륭乾隆 중엽 이후 크게 융성하였다. 원래 관각(館閣)은 송대(宋代)에 소문관(昭文館), 사관(史館), 집현원(集賢院)과 비각(秘閣), 용도각(龍圖閣), 천장각(天章閣)을 통칭하였으나 명, 청대에는 관각이 모두 한림원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원래 관각체라 하면 한림원의 서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후에는 판에 박은 듯 몰개성적인 서체를 낮게 평가하여 모두 관각체라 부르게 되었다.
관아재고 觀我齋稿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관아재 조영석趙榮祏(1686~1761)의 문집. 모두 4권으로 되었으며 건(乾), 곤(坤) 2책으로 엮어졌다. 1권은 소(疏), 시(詩), 2권은 서(序), 기(記), 3권은 찬(贊), 발(跋),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 4권은 제문(祭文), 애사(哀辭), 행장(行狀), 묘지(墓誌) 등으로 이루어졌다.
1984년에 발굴되어 소개된 관아재고는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출현하게 되는 과정 뿐만 아니라 조영석 자신의 회화관과 당시의 저명한 화가인 정선鄭敾(1676~1759)을 비롯, 화단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중 화론과 관계되는 것을 살펴보면 이병연李秉淵과 같은 회화애호가들과의 교유관계, 정선의 그림에 대한 품평,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나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의 그림과 같은 중국회화에 대한 견문을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청명상하도> 그림을 통하여 ‘풍속’과 ‘문물제도’를 인식하게 하는 그림의 유익함에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이는 회화를 잡기(雜技)라고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회화의 공용성과 실용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회화관은 사의*(寫意),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 사실주의의 존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비록 화원(畵員)의 일과 사대부의 일을 명확히 경계짓는 성리학적 회화관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닐지라도 회화의 가치를 인정한 진보적인 견해로 평가된다. 또 사생(寫生)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사실주의를 잘 대변하고 있다.
관요 官窯 guan-yao(중)
궁정용 도자기만을 굽는 관영(官營)의 가마*. 관요에서 생산된 정교한 도자기들은 황제의 어기(御器), 궁중의 제기(祭器), 일상용기, 혹은 신하나 외국사신에게 주는 하사품 등으로 쓰였으며, 주로 명관(名款, 年號名)이 표시되어서 시대와 제작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요로는 북송北宋 때 하남성河南省 보풍현寶豊縣 청량사淸凉寺 부근의 여관요(汝官窯, 汝窯), 휘종황제가 개봉開封에 설치한 북송관요(卞京官窯), 남송南宋 때 항주杭州에 설치된 남송관요(修內司窯, 郊壇窯)가 있고 원대(元代)의 추부요(樞府窯), 명대(明代)의 경덕진요*(景德鎭窯) 등을 들 수 있다. 청대(淸代)에까지 이 제도가 이어져 경덕진 어기창은 더욱 정비되어 강희, 옹정, 건륭대 무렵(1662~1795)에 기술이 매우 향상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관요로는 조선시대의 경기도 광주요*(廣州窯)를 들 수 있다.
관음보살 觀音菩薩
Avalokitesvara(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음자재보살’ 이라고도 한다. 당대(唐代)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리 스민)의 휘자(諱字)를 피하여 ‘세’자를 생략하고 ‘관음’이라고 불렀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한 보살로서,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 거의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신앙되었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普門品〉에는 위난(危難)을 당한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관음이 즉시 33종류의 화신으로 변해 그들을 구해준다고 되어 있으며, 현령(顯靈)하여 불법을 강연하던 도량(道場)이 절강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에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법화경法華經》외에 《화엄경華嚴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전개되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많고, 아미타를 협시하는 8대 보살로서도 많이 표현된다. 형상은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새기고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절에서 초기에는 남자상이 많았으나, 당대(唐代)이후로는 여자상으로 바뀌었다. 밀교의 관음은 백의관음白衣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등이 있는데, 이는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안서安西 유림굴楡林窟 당대 벽화 속에 있는 수월관음*水月觀音과 대족심신거굴大足心神車窟의 오른쪽 벽에 있는 일월관음日月觀音, 산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쌍림사雙林寺에 있는 명대(明代)의 니조자재관음泥造自在觀音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십일면관음과 수월관음, 천수관음 신앙이 가장 많이 신앙되었고, 관음보살화로는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가 많다. 관음보살은 관음전 또는 원통전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