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돈황석굴군

돈황석굴군 敦煌石窟群

돈황석굴은 천불동千佛洞 또는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불린다. 현성縣城 동남쪽 30km 떨어진 명사산鳴沙山의 기슭에 1,600m에 걸쳐 2단 또는 3단으로 파여 있고, 흙이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약 480굴에 달한다. 착굴의 시작은 동진東晋의 영화 9년(353), 또는 전진前秦의 건원 2년(366)에 승려 낙준樂僔이 시작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275동은 그 양식으로 볼 때, 운강석굴*(雲岡石窟)이 시작된 북위北魏의 화평 연간(460~465)의 것이다. 북위,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 오대(五代), 송宋, 서하西夏, 원元에 걸쳐서 석굴의 개착이나 수리가 계속되었다.
석굴은 승원굴(僧院窟)의 영향을 받아서 방형평면(方形平面)으로 좌우 벽면에 불감*(佛龕)을 만들어 불보살을 안치하는 형식이다. 석질이 거친 반암이므로 네벽과 천장을 칠식(석회와 찰흙을 불가사리로 반죽한 것)으로 칠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고 소조*로 된 불상*을 안치시켰다. 불상의 종류는 2,415존에 달하며, 한두가지 예외적인 석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상(塑像)으로서 색채가 선명하게 칠해져 있다. 벽화는 당시 성행하던 석가, 미타, 약사 등의 정토변상(淨土變相)과 《법화경》 《유마경》 《보은경》 《화엄경》 등의 변상도*와 본생도*, 불전도* 등의 그림이 있다.
불상이나 벽면의 양식은 인도 서역풍, 중국의 재래 양식, 티베트 양식 등 다양하다. 낙양을 시작으로 하는 목조건축이 없어진 오늘날 돈황석굴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돈황 부근에는 천불동(막고굴) 외에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楡林窟, 안서 수협구水峽口(小千佛洞)가 있다. 서천불동은 막고굴 서쪽 40km지점에 있고 19굴로 되어 있으며, 북위, 당, 오대의 벽화, 소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유림굴은 막고굴 동쪽 100㎞, 안서의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만불협에 있고, 총 40굴 가운데 29개의 굴에 북위에서 당에 이르는 시대의 벽화가 있다. 또 수협구굴은 안서와 유림굴의 사이에 있고, 현존하는 것이 6굴 정도의 소규모의 석굴이다.
돈황 석굴은 금세기 초 각국의 학자가 방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에는 영국의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1862~1943)이 탐험하여 약 15,000점의 한문, 티베트 문자로 된 경전, 고사본과 500여 점의 비단, 종이, 마포에 그려진 불화류를 가지고 돌아갔다. 현재 그것들은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인도 국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1908년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aul Pelliot(1878~1945)에 의해 석굴의 사진이 소개되고, 약 5,000여점의 고사본, 약 150점의 회화, 공예품이 파리의 국립도서관,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었다. 1911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14년에는 러시아의 올덴부르크Sergei Fedororich Oldenburg(1863~1934) 일행이 각각 방문하였다. 오타니 탐험대의 발굴품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그리고 올덴부르크의 발굴품은 에르미타주미술관과 구소련국립동양연구소 성 페테르부르크 지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 뒤 미국의 워너Langdon Warner(1881~1956), 중국의 진만리陳萬里(츠언 완리), 향달向達(시앙 따) 등이 조사했다. 1944년 중화민국 정부는 돈황예술연구소를 창설하였으며 그 후 장대천長大千(즈앙 따지엔) 등의 조사와 벽화모사가 행해졌다.
1952년에는 새 중국정부에 의해서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가 개설되어 보존과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 현재는 이 연구소의 동굴 번호가 학계의 표준이 되고 있다. 돈황의 유적과 출토된 문물의 연구를 총칭하여 ‘돈황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돈황회화

돈황회화 敦煌繪畵

현존하는 돈황 회화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천불동千佛洞(莫高窟),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安西楡林窟 등의 석굴 사원군의 벽화*이다. 상하 5m폭의 화면으로 총연장은 무려 25km에 달하며 연대는 5세기 중기(북위北魏)부터 14세기 초(원元)에 이른다. 조굴명(造窟銘)이나 공양자명(供養者銘)에 의거하여 양식적인 편년이 가능하며, 중국 회화사의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 즉 5~6세기의 벽화*는 중국 고대회화의 전통에 중앙아시아(특히 쿠차)의 영향이 가미된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불전(佛傳), 본생(本生) 등의 설화를 프리즘처럼 옆으로 길게 전개해 놓은 것이 많다. 7세기에 들어서 당唐이 서역을 지배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진보된 양식이 직접 도입되었고 유기적인 화면 구성, 세련된 도상에 의한 대규모의 정토국(淨土國) 표현이나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등의 변상*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8세기 중반에 절정에 달하였다.
존상이나 공양자의 원숙한 묘사법, 깊이 있는 산수의 표현 등 중국 고대회화의 고전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가 점령한 시기(787~848)를 거쳐 장씨張氏, 조씨曹氏의 귀의군기(歸義軍期, 9세기 후반~11세기 초반)가 되어서는 도상이나 표현이 번잡한 채로 고정화되었으며, 지방적인 양식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비단, 삼베, 종이 등이 그려진 봉납용, 예배용 화폭이나 두루마리*류로서 11세기초에 막고굴의 소굴(藏經洞)에 감추어져 있다가 190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의 종류는 양식이나 화법이 세련된 것, 거친 것 등 다양한데,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700여점을 헤아리고 있어, 중국의 불교회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돌멘

돌멘 dolmen(영)

→ 고인돌

돌방무덤

돌방무덤

석실분(石室墳)이라고도 한다. 판상석(板狀石) 등을 이용하여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든 무덤으로 널방을 마련하고 그 위에 흙을 쌓아올려 봉토를 만든다. 한반도의 석실분은 중국묘제의 영향을 받아 축조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 국내성 지방에서 시작되어, 한강유역에서 일반화되고 그 뒤 백제와 가야지역으로 일반화되었다.

돔 dome(영)

건축용어로서 원형, 방형(方形) 또는 다각형(특히 8각형)의 방에 붙어있는 둥근 천장을 지칭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원, 다각형, 타원형이고, 옆에서 보면 반원형 내지 만곡(彎曲)의 달걀 모양이다. 완전히 막혀져 있는 것, 꼭대기에 창문을 만들어 터놓은 것, 꼭대기의 개구부 윗부분에 빛을 받기 위한 창문을 가진 작은 탑, 즉 랜턴(lantern)을 얹은 것 등 수 많은 종류가 있다. 돔은 평면에서 360도 회전하여 종석에서 만나는 일련의 아치*들로 간주될 수도 있고, 수평면에서 중첩되어 하나의 원형 돌로 축소되는 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형태는 구조상 중요하다. 첫번째 형태는 외부에서 미는 힘을 지탱하고 기초와 측면에서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며, 두번째 형태는 원래 중량품으로서 접합이 어려운 곳에 더 적합하다. 돔은 목재나 석재, 주형 콘크리트, 금속 따위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는 알루미늄 같은 가벼운 금속이나 더 강화된 콘크리트 등을 사용한다. 돔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돔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원시적인 형식은 선사의 그리스 문화(→‘에게 미술’ 참조)인 이른바 원형 분묘이다. 이 형식은 언덕을 뚫어서 측면 벽을 잘라서 만든 돌로 쌓고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식의 분묘로서, 완전한 돔식(式) 건축이라고는 할 수 없다. 헬레니즘 시대의 준비단계를 거쳐서 로마 시대의 건축이 되면 미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매우 훌륭한 돔으로 발전되어 나타났다. 즉 원형 평면 위에 크고 작은 돔이 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은 로마의 판테온 신전이다. 비잔틴의 돔은 사각형의 평면 위에 소위 말하는 펜덴티브*(pendentive)를 사용하여 그 상부에 돔을 축조한 더욱 발전된 양식으로 나타났다.
이 설계는 원형이나 다각형 기면 위에 돔을 얹는 옛날 방식(판테온)보다도 한층 높고 밝으며, 훨씬 경제적인 돔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하기아 소피아>이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오리엔트의 그리스도교 건축, 나아가 회교 건축에까지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는 이 구조법이 별로 응용되지 않았는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재차 활용되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된 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는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에 의해 건립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들 수 있다. 또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된 것 중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에 의해 건축된 유명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돔 건축은 그 의의를 상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에 있어서도 종종 채용되고 있다.

동거파

동거파 董巨派

중국 오대(五代) 남당(南唐)의 화가 동원董源(똥 위앤), 거연巨然(쥐 르안) 및 이들의 화풍을 계승한 화가들의 총칭.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와 함께 이른바 남종화*(南宗) 양식의 종조(宗祖)로 평가된다. 송대(宋代)에는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이 ‘평담천진(平淡天眞)’하다고 해서 높이 평가한 외에는 추종자가 없었다.
그러나 원초(元初)에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가 복고의 기치 아래 동거파 양식을 부활시킨 이래 문인화가들의 양식으로 크게 확산되어 원사대가*(元四大家) 및 명대(明代)의 오파*吳派로 계승되었다. 명말(明末) 송강파*松江派에 의해서 왕유를 계승한 정통 남종화의 종조로 추앙되기에 이르러 원, 명대(元明代) 문인화*(文人畵)의 발달 및 명말 남종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거파 화풍은 험준한 산악보다는 강이나 호수 주변의 산수를 다루고 한겨울의 고목보다는 한여름의 잎이 무성한 수목들을 선호하며, 바위와 언덕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반두준(班頭皴)과 피마준*(披麻皴)을 사용하는 데 그 양식적 특징이 있다.

동검

동검 銅劍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그 종류로는 중국식 동검, 오르도스 동검, 요녕식 동검(遼寧式銅劍), 세형 동검이 있다. 이중 요녕식 동검과 세형 동검이 가장 많은 예를 차지한다. 요녕식 동검은 오르도스식과는 달리 칼의 몸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된 조립식이며 함경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분포되었다. 세형 동검은 검의 몸체가 직선화되고 예리한 모습인데, 우리나라에서 성립된 고유의 청동 단검이다.

동경

동경 銅鏡 tong-jing(중)

청동으로 주조한 고대의 거울. 동판의 표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을 비쳐볼 수 있게 한 것으로 뒷면은 꼭지와 여러 장식문양이나 길상(吉祥)적인 문구를 넣었다. 동경의 형태는 크게 원형, 방형(方形), 화형(花形), 능형(稜形) 등으로 나뉜다. 동경은 중앙의 꼭지(鈕)와 꼭지를 둘러싼 유좌(鈕座), 유좌를 다시 감싸고 동경의 주요 무늬가 장식되는 내구(內區), 동경의 제일 바깥쪽인 연(緣)으로 구성된다.
최초의 동경은 기원전 2천년경의 제가(齊家)문화의 묘에서 출토되었고 시기는 신석기시대 말기와 하왕조의 교체기에 속한다. 전국(戰國)시대에 들어 성행했는데 ‘전국경(戰國鏡)’이라 불린다. 이전까지는 대체로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전국경이 되면서 화장구(化粧具)로서의 기능을 하기에 이른다. 가볍고 모양이 정교하며 문양이 기하학적이다. 한대(漢代)에 유행했던 ‘한식경(漢式鏡)’은 도안 제재가 풍부하고 길상의미의 명문*(銘文)을 가진 것도 있다. 동경은 위진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쇠했다가 당대(唐代)에 부흥하여 성행하였는데, 조형이 다채롭고 제작이 정교했다. 또한 금은 평탈*(平脫)과 나전 등 화려하게 장식된 동경이 출현했다. 송대(宋代) 이후 동경은 날로 쇠퇴하였다. 뒷면에 꼭지가 치우쳐 달린 다뉴경(多鈕鏡)은 중국 동북부와 연해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성행하였고 일본에도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다뉴세문경*을 비롯하여 낙랑지역에서 출토되는 한식경과,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文鏡〉, 황룡사지의 목탑 심초석에서 나온 〈한경계漢鏡系 동경〉 등이 있지만, 동경은 고려시대에 가장 활발히 제작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동경이 많이 출토되었지만, 출토상태가 분명치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동남아시아 미술

동남아시아 미술 Southeast Asian Art(영)

미술사에서의 동남아시아는 일반적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 즉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인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비롯하여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가리킨다. 이 지역은 기원 초기부터 인도의 문화를 수용한 인도 문화권이었다. 인도의 불교 미술*과 힌두교 미술*이 각국에서 전개되어 탑*과 사원, 불, 보살상과 신상*들이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인도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나지만 각국의 토착적인 문화 전통이 점차 초기의 인도 문화와 융합되어 나라마다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8세기 후반~9세기 초에 조영된 자바섬의 보로부두르*와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 와트*를 들 수 있다. 남아 있는 회화는 별로 없으나 건축물과 조각 작품은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8~9세기에, 캄보디아와 미얀마는 10~12세기에 문화적인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14~15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에서의 조형활동은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한 편이었다.

동시성

동시성 同時性 simultanéité(프)

19세기의 물리학자 쉬브렐Michel-Eugène Chevreul의 ‘색채 동시 대비의 법칙’을 근거로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가 자기 미학의 근거로 삼은 개념.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의 설명에 따르면, 쉬브렐의 법칙은 ‘만일 어떤 단순색이 그 본색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그 색은 대기 속으로 사산(四散)하여 스펙트럼*의 온갖 색을 낳는다’는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쉬브렐의 법칙을 본능적으로 화면에 적용한 셈인데, 들로네는 그것을 하나의 구성 원리로까지 높임으로써 아폴리네르의 이른바 오르피슴* 회화를 낳았다.
동시성의 개념은 미래주의*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운동하는 것의 시간적 경과를 하나의 화면에 정리한다는 의미로, 들로네의 경우와는 내용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