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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 Minotaur(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소인 크레타의 전설적인 괴물. 그 명칭은 그리스어로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의 ‘Minotauros’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크레타의 황소 숭배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제물로 쓰라고 보낸 눈처럼 흰 황소를 미노스 왕이 살려두자, 포세이돈은 약속을 어긴 벌로 미노스왕의 왕비인 파시파이를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 미노스 왕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머리는 소, 몸은 인간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미궁(迷宮) 라비린토스에 가두어 두고 소년, 소녀들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가 왕의 딸 아드리아네의 도움을 받아 이 괴물을 처치하였다. ‘미노타우로마키아Mynotauromachia’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는 그리스의 도기화에서부터 현대에 들어와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주제로 널리 쓰였다.

미니멀 아트

미니멀 아트 Minimal Art(영)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나타난 미술경향으로서 작가의 감정과 주관이 지배적인 추상표현주의*에 반하여 최소한의 조형 수단을 사용, 극도의 몰개성을 지향한다.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은 1965년 1월 영국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볼하임Richard Wolheim이 뒤샹Marcel Duchamp(1887~1968),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 라인하트Ad Reinhardt(1913~1967),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1925~ ) 등의 작가를 논평한 동명의 에세이에서 따왔다. 미니멀 아트는 로즈Barbara Rose에 의해 ‘에이비시ABC 아트’로, 프리드Michael Fried에 의해서는 ‘리터럴 아트(Literalist Art)’로 명명되었으며, 이 밖에도 ‘차가운 미술(Cool Art)’ ‘환원적 미술’ ‘오브제 아트’ ‘프라이머리 스트럭처(Primary Structure)’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최소한, 극소의 미술’이라는 의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욕적이리만큼 절제된 양식과 극도로 단순한 제작방식을 채택하여 미술 작품의 실재와 본질을 강조하였다.
미니멀 회화는 재현된 형상과 환영적인 회화의 가상 공간을 거부하고, 미니멀 조각은 역시 재현된 형상이나 받침대를 배제함으로써 작품을 하나의 오브제*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인 저드Donald Judd(1928~1994)가 1965년 《특수한 물체Specific Objects》에서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회화도 조각도 아닌 삼차원의 특수한 물체를 제안하였듯이, 실제로 미니멀 아트에 있어서 회화와 조각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리스Robert Morris(1931~ )와 저드의 작품처럼 대부분의 미니멀 아트는 구성상 나눌 수 없는 단일한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각 단위들 사이에 위계적 질서나 내부적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전통적으로 은유나 상징체계가 작품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가정을 거부하는 미니멀 아트는 그 의미를 외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다. 즉 공적인 공간에서의 경험을 유도함으로써 미니멀 아트는 실제 공간 속에서 관람자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그 제작과정에서는 작가 개성의 흔적이나 손질이 가해지지 않으며 대신 공장에서 주문 생산된다. 이 때문에 미니멀 아트는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1994)에 의해 비예술(non-art)에 근접한 것이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진기한 미술(novelty art)’의 극단적인 형태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추상표현주의가 그랬듯이 미니멀 아트 또한 1960년대 후반의 미술계를 주도한 대표적인 경향이었다. 그리고 미국 태생의 작가들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된 최초의 국제적인 미술운동이기도 했으며, 멕시코와 일본에서는 모노파*와 같은 미니멀 아트의 아류가 등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로는 저드, 모리스, 르윗Sol Lewitt(1928~ ), 플래빈Dan Flavin(1933~ ), 스미스Tony Smith(1912~1980), 안드레Carl André(1935~ ), 세라Richard Serra(1939~ ), 마틴Agnes Martin(1908~ ), 마든Brice Marden(1938~ ) 등이 있다.

미니어처

미니어처 miniature(영, 프)

아주 작은 크기의 초상화*로서 목걸이 등의 장신구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서양의 성경 삽화(illumination), 특히 극채색(極彩色)으로 장식된 필사본* 그림이나 장식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원래 명칭은 서양 중세 사본의 각 장에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두문자(頭文字, initial letter)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붉은 색의 납 ‘미니움(鉛丹, mini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어원이 작다는 뜻의 ‘minute’로 잘못 알려지면서 17세기 이후 모든 종류의 사본 삽화에 적용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미니어처라고 부르는 것은 중세 시대의 ‘히스토리아(historia)’에 해당한다. 초상화용 미니어처는 중세 사본 삽화와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메달이라는 두 가지 전통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7~18세기에는 에나멜* 기법의 미니어처가 유행하였으며, 아주 작고 세밀한 유채화나 애완용 회화, 의복의 장식, 보석 세공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사용되었다. 16세기초부터 융성하였던 미니어처는 사진이 등장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이후에 소멸하였다.

미디어 아트

미디어 아트 Media Art(영)

미디어는 ‘매체*’를 뜻하는 미디엄의 복수형으로서 미디엄이 미술에서 작품의 재료를 의미한다면, 일반적으로 미디어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 매스미디어를 가리킨다. 즉 미디어 아트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수단인 대중매체를 미술에 도입한 것으로서, 책이나 잡지, 신문,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등 대중에의 파급 효과가 큰 의사소통 수단의 형태를 빌려 제작된다. 1920년대에 전조를 보인 미디어 아트는 제1, 2차세계대전을 통한 대중매체의 기술적 발전과 매스컴 이론의 영향에 따라 1960년대에 대두하였고 197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미디어는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지적대로 미디어 아트는 매체 자체가 지닌 독특한 속성을 내세워 대중의 의식과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의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지배되는 대량소비사회의 면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팝 아트*였다. 전직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타블로이드 사진을 이용하여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워홀Andy Warhol(1928~1987)이나, 대중만화*의 내용과 형태를 차용한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1998)이 그 예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는 대부분 여론 조작, 권력에의 봉사 같은 대중매체의 부정적인 효과를 비난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예로 게릴라 걸스Geurrilla Girls는 여성의 성적 차별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포스터*로 제작하여 거리의 벽에 붙임으로써 사회의 숨겨진 비리를 폭로하는 언론인의 역할을 자처했고, 레빈Les Levine은 옥외 광고판을 사용하여 권력층에 의해 독점되는 매체의 속성을 고발하였다. 이러한 접근 방법들은 그간 대중매체의 무차별한 자극과 지대한 파급효과에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아왔던 미술이 이제 미디어 아트라는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통해 매스미디어에 반응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래주의

미래주의 未來主義 Futurism(영) Futurismo(이)

20세기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련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으로서 미술뿐 아니라, 시, 음악, 연극, 문학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대두된 움직임이었다. 시인인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1876~1944)가 1909년 2월 20일자 파리의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에 최초로 <미래주의 시(時) 선언>을 발표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이듬해인 1910년 3월 8일 보치오니Umberto Boccioni(1882~1916), 카라Carlo Carra(1881~1966), 세베리니Gino Severini(1883~1966), 루솔로Luigi Russolo(1885~1947), 발라Giacomo Balla(1871~1958) 등 다섯 명의 화가들이 트리노의 키아레라 극장에서 3천 명의 관중 앞에서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공표하면서 미술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우리가 화폭 위에 재현하고 싶은 것은 역동적 세계의 고정된 한 순간이 아니라, 세계의 역동성 그 자체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일체의 과거를 청산하고 속도와 다이내믹한 힘이 넘치는 기계문명의 표현을 강력히 주장했다. 1912년에는 <미래주의 제2차 선언>과 보치오니에 의한 <미래주의 조각 선언>이 뒤를 이었다. 제2차 선언문에서는 회화의 고전적 기교를 공격하면서 이를 분리파* 미술의 피상적 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하였다.
과거와 전통을 거부하고 대신 새로움과 젊음, 기계, 운동, 힘, 속도를 찬양하였던 미래주의 작가들은 “세계는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더욱 풍요로워졌다. 그것은 바로 속도의 아름다움이다. 달리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스 섬의 승리의 여신상보다 아름답다”고 말한 마리네티의 사상을 회화와 조각에서 실천할 것을 표명하였다. 특히 미래주의는 구상 회화에 움직임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미(美)인 보편적 힘으로서의 다이나미즘*을 화면에서 구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 영국의 사진작가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1830~1904)와 프랑스의 생리학자 마레이Etienne-Jules Marey의 사진기술과 고속촬영 등 동시대의 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공간 속에서의 다이내믹한 연속성을 포착함으로써 동시성(simultaneity)*을 실현하였다.
즉 공간과 시간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소리, 빛, 운동 등을 회화에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는 보치오니가 사망한 1916년 이후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역동성과 동시성* 개념은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1881~1964)나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1881~1962),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 등의 러시아 작가들과 영국의 보티시즘*에 영향을 주었으며, 과격한 선동 기법과 우상파괴주의, 반전통의 정신은 다다*로 이어졌다.

미래주의 선언

미래주의 선언 未來主義宣言 Manifesto of Futurist(영)

→ ‘미래주의’ 참조

미륵보살

미륵보살 彌勒菩薩 Maitreya(범)

석존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 즉 미래불. 미륵은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한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자씨(慈氏)’라고 의역되며 ‘매황려야梅喤麗耶’ 혹은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원래는 유가유식학을 체계화한 실재했던 인도의 학승이었는데 법상종의 교조로 신비화되어 보살로 변신한 것이다. 석가불을 계승할 미래불로서,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석가보釋迦譜》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에는 미륵이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나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미래불이 나타나서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사상이 싹틈에 따라 등장하였다.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등장하면서 도솔천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불교의 이상세계인 극락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불국정토가 되었다.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보살의 형태로 다리를 교차시켜 서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운강석굴*의 ‘담요오굴曇曜五窟’ 가운데 제 18, 19, 20굴은 모두 미륵, 연등(燃燈) 그리고 현세(現世)의 삼세불형식을 위주로 하는 반면 제17굴의 주상(主像)만이 보살의 복장을 한 미륵교각상이다. 한국에서 삼국시대에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 이 도솔천에 머무르다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에 먼 미래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겨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미법산수

미법산수 米法山水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 등의 미파米派 화가들이 주로 그린 산수화*. 점을 여러 번 겹쳐 찍어서 형태를 표현하는 미점준(米點皴)을 구사하여 부드러운 곡선의 흙산이나 멀리 보이는 나무 등을 즐겨 그렸다. 특히 미점준은 비온 뒤나 짙은 안개가 낀 습윤한 자연경관을 그릴 때 많이 사용되었다. 이 미법산수는 원元나라 때의 고극공高克恭(까우 커꿍) 이후 명, 청대(明淸代)의 문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 초기의 이장손李長孫, 서문보徐文寶를 비롯해 중기의 이정근李正根 등 도화서 화원들에게 전해졌으며, 후기에는 남종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서 허련許鍊과 같은 문인화가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미술계파

미술계파 美術界派 Mir Iskusstva(러)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일어난 러시아의 미술 운동.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1872~1929), 브노와Alexandre Benoia, 바크스트Léon Bakst(1866~1925), 뢰리히Nikolai Roerich, 골로빈Alexandre Golovine 등을 중심으로 이동파移動派의 교의(敎義)에 반항하였다. 자연의 모방보다는 자연의 해석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내세웠다. 특히 장식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으며 무대미술*, 벽화*, 서적의 삽화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미술과 공예 운동

미술과 공예 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영)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공예 개량 운동. 1851년 대전시회 이후 영국에서 제조상품의 질에 대해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민속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면서 제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중세 장인들의 사회적 제도에 대한 향수 어린 관심을 갖게 된 데서 비롯하였다. 19세기말의 유럽 공예는 로코코식, 바로크식 등의 양식을 되풀이하는, 즉 위에서 밑으로 흐르는 특수 계급을 위한 공예가 조류였다. 또 한편으로는 기계 문명의 이용으로 말미암아 조잡한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러스킨John Ruskin(1819~1900)과 모리스 등은 그러한 공예를 배척 또는 개혁하여 고딕*의 미를 찬양하였고, 수공예를 존중하여 중세의 공장 길드(guild)로 되돌아가 예술활동과 노동을 일치시킴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어보려고 하였다. 모리스는 자신의 집 건축과 가구에서, 그리고 1861년 모리스 마샬 앤드 폼커 회사를 통해 수공직물, 직조, 가구 등을 생산함으로써 기계시대에 수공업의 부활을 꾀하였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도덕적인 개념의 산물이며, 따라서 도덕 관념이 없는 기계는 예술을 생산해 낼 수 없다는 러스킨의 생각과는 달리 모리스는 완전히 기계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1860년 이후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 운동은 많은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예기술의 향상을 위해 ‘센추리 길드’ ‘아트 워커스 길드’ ‘공예전람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러스킨과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은 공예를 사회 대중화하고 수공예를 존중하여 직인(職人)을 예술가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그들의 이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대신 프랑스의 아르 누보*, 오스트리아의 분리파* 운동으로 옮겨갔으며, 특히 바우하우스*의 설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