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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

비디오 아트 Video Art(영)

비디오 즉 텔레비전을 매체로 하는 현대 미술의 한 경향. 비디오 아트는 1965년 당시 플럭서스* 미술가였던 백남준白南準이 소니의 최신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하여 최초의 비디오 작품을 제작하여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카페 아 고고Café à Go Go에서 상영함으로써 시작되었고, 196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수많은 작가들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비디오는 양식이 아니라 매체이며, 따라서 비디오 아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분야로 나뉘어진다. 비디오 테이프 작품과 설치비디오가 그것이다. 설치 비디오는 비디오 장비, 주로 TV 수상기를 이용한 설치물로서 그 본질상 조각의 성격이 강하다. 백남준처럼 비디오 모니터와 화면을 재료로 이용한 작품이며, 일반적으로 여러 대에서 수십, 수백대의 TV 수상기를 이용하여 작품을 꾸미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설치된 수상기에 다큐멘터리 이미지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실험적 이미지를 녹화하여 재생할 경우, 비디오 테이프와 설치 비디오의 혼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설치 비디오는 비디오를 새로운 매체로 파악하는 측면이 약하며 오히려 비디오 테이프 작업이 비디오 아트의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분야이다. 비디오 테이프 작품이란 비디오 테이프의 내용을 만드는 것에 더 주목하는 것으로서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우와 실험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우로 나뉜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비디오 테이프들에는 형태와 색의 변화, 율동 등 기계적 아름다움이나 작가 개인의 미묘한 심리 상태에 집중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현대 미술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비디오 테이프 작업을 중심으로 하되 그것을 설치 형식으로 제시하는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비디오 아트는 미술이 대중 문화의 위세에 눌리자 그 반격이자 대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분야이다.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과 상영이 편리하며 영화와 같이 대자본에 종속될 염려가 없다는 점, 그리고 특히 대중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담아 내기에 적절한 도구라는 점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비디오 아트는 상업 TV의 전반적인 기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 TV의 기본적 원칙들의 상당 부분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비디오 미술가들은 커뮤니케이션과 대중 미학, 전자기술의 잠재성과 그 진보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의 대중에게 가장 친밀한 매체인 비디오를 선택한 것이다. 시청자에 대해 TV가 갖는 직접성과 단순성, 강한 영향력 등은 비디오 아트가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서 대중적이며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신케 한다.

→ ‘비디오 조각’ 참조

비디오 조각

비디오 조각 video sculpture(영)

TV 수상기를 재료로 하여 영상 및 음향과 함께 사용한 조형 작품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조각에 비디오 카메라와 모니터를 부착하거나 이러한 장치들과 함께 놓여 있다. 그러므로 비디오 장비를 제거하면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도 보여진다. 비디오 아트*에서 비디오 조각과 설치 비디오는 두 요소가 흔히 혼합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비디오 조각의 경우 비디오 장비를 제거해도 조각의 형태가 남아 있지만, 설치 비디오는 TV 수상기를 제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비디오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과는 달리 강한 견인력을 가진다는 장점이 있다. 모니터가 장착되었으므로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면에 주목한 관람객들이 모니터 안으로 흡인되기 때문이다.
즉 관객은 일반 조각처럼 그냥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 앞으로 이끌려 가도록 유도되어지는 것이다. 1970년 백남준은 자신이 개발한 신시사이저를 이용하여 최초의 비디오 조각을 제작하였으며, 그의 아내이자 비디오 미술가인 구보타 시게코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바쳤던 <뒤샹피아나> 연작에 비디오 조각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 ‘비디오 아트’ 참조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 毘盧遮羅佛
Vairocana(범)

불교의 진리를 부처로 신격화한 법신(法身). ‘광명이 두루 비친다’라는 뜻으로 부처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佛身)의 진신(眞身). 비로사나(毘盧舍那), 노사나(盧舍那)라고도 한다.
《화엄경華嚴經》의 주존불로서, 태양신을 이상화한 것으로 모든 세계를 포용한다고 한다. 밀교(密敎)에서의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일한 이름으로, 이것을 전개시킨 것이 법신불(法身佛)이다. 그의 불정토(佛淨土)를 ‘연화장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 하고, 그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무수한 수미산세계(須彌山世界)가 있고, 각 세계에는 화불(化佛)이 교화(敎化)한다고 한다. 형상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로 배치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노사나불과 석가불을 좌우에 모시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 이후 특히 9세기 중엽경 유행했으며, 현존 최고(最古)의 비로자나불상은 ‘영태2년명永泰二年銘’(766)이라는 명문*을 가진 경남 산청군 내원사 소장의 석조 비로자나불상이다. 그 밖에 대표적인 예로는 〈보림사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상〉 〈도피안사到彼岸寺 철조비로자나불상〉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 大光明殿)이나 비로전(毘盧殿)이 있는데, 비로자나불을 중앙 본존으로 모시고 노사나불과 석가불을 좌우 협시불로 배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비마나

비마나 vimāna(범)

힌두 사원*에서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나 혹은 다른 힌두교의 신상*들이 봉안되는 성소(聖所)를 가리키며 평면은 정방형이다. 오리사 지역에서는 데울*(deu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마나의 위쪽에 솟은 높은 탑의 형태에 따라 힌두 사원은 북방 형식과 남방 형식으로 구분된다.
비마나는 원래 신을 태우는 수레를 의미한다. 힌두 사원 중 초기의 예로는 남인도 타밀 지방의 마말라푸람Māmallapuram에 남아 있는 5개의 라타rathas(수레, 성전)를 들 수 있다. 이 사원들은 만다파*가 없는 비교적 간단한 형식이다. 그렇지만 비마나를 둘러 싼 요도(繞道)가 있는 형식, 세 방향으로 발코니가 튀어 나온 형식, 외벽에 여러 개의 작은 사당을 붙인 형식 등도 있다.

→ ‘힌두 사원’ 참조

비물질화

비물질화 非物質化
non-materialization(영)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뒤이어 미니멀 아트*의 강력한 물결이 수그러든 뒤 1970년대에는 개념 미술*,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등 비물질의 미술이 주도했다. 20세기 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물질적 요소를 비물질적인 실체로 대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정신성을 지향함으로써 물질을 거부하는 경향이다. 리파드Lucy R. Lippard는 현대미술에서 비물질화 경향이 물질을 에너지와 시간, 움직임으로 대치하는 ‘움직임으로서의 미술’과 물질을 거부하고 이를 관념으로 전도시킨 ‘관념으로서의 미술’의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퍼포먼스나 키네틱 아트* 같은 움직이는 미술이라면, 후자의 예는 개념 미술이다. 클랭Yves Klein(1928~1962)은 물질인 마티에르*의 탐구를 추구한 앵포르멜* 미학에 대한 비판으로 비물질화를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파랑은 그림물감이 아니라 파랑이라는 비물질이다. 그는 작품 제작에 있어서 유화 물감의 사용을 거부했는데 안료 자체가 회화를 비물질화하는데 부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년에 클랭은 불, 물, 공기와 같은 자연이나 우주의 근원적인 것을 추구했는데 이것 역시 작품을 물질로서 보는 일반적인 회화 관념에서 탈피하여 영원한 비물질적 회화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백서

비백서 飛白書

일종의 특수한 서체. 중국 동한(東漢) 영제靈帝때 채옹蔡邕(차이 용)이 홍도문(鴻都門)을 장식하는 장인(匠人)들이 백분(白粉)을 쓸어내는 빗자루를 이용하여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이를 창시했다고 전한다. 그어진 필획이 끊일 듯 이어지는 듯 하는 가운데 속도감 있는 흰 여백이 남기 때문에 비백이라 불리는 이 서법은 필획의 속도감과 역동적 힘, 생명력이 특징이다.
한말(漢末)과 위초(魏初)에 관청과 궁궐의 제서(題書)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당唐, 송宋에 이르러서는 어제비문(御製碑文) 역시 이 서법으로 제액(題額)된 것이 많았다. 당대(唐代)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승선태자비升仙太子碑〉는 현존하는 비백서의 걸작이다.

비슈누

비슈누 Visnu(범)

시바*와 함께 힌두 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다. 비슈누는 우주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슈누는 의례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을 통해 구원을 베푸는 부드럽고 인자한 신으로 묘사된다. 베다 시대의 태양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비슈누가 《브라흐마나》에서 아난타 위에서 쉬고 있는 우주의 창조자인 나라야나Narayana와 동일시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기원전 4~3세기경부터 인도 서부 지역에는 바수데바Vasudeva라는 인격신을 예배하던 바가바타파Bhāgavatas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 크리슈나*Krsna라는 영웅이 신격화되어 바수데바와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대중적인 신앙운동은 바수데바-크리슈나를 비슈누신과 동일시하면서부터 더욱 발전하여 그 후 비슈누 신앙이 성행하게 되었다. 비슈누신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여러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顯現, 아바타르*)하기도 한다.
신화에 나타난 비슈누의 신적인 특성들을 기반으로 한 도상*이 이미 굽타시대*에 성립되어 조각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찬드라굽타Candragupta 2세가 401년에 조성한 우다야기리Udayagiri의 제6굴 입구 옆에는 높은 왕관 형태의 보관을 쓰고 4개의 팔에는 각각 수레바퀴(차크라cakra), 곤봉(가다gada), 연꽃(파드마padma), 소라(샹카shankha)를 들고 몸에는 바나말라(vanamala)라는 화환을 두른 비슈누상이 조각되어 있다.
비슈누신은 이런 도상으로 후대까지 계속 표현된다. 가루다*를 타는 비슈누신의 배우자는 락슈미*이다. 비슈누는 여러 문헌으로부터 유래하는 24가지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라야나와 바수데바도 그 중의 하나이며 이 외에 하리(Hari, 신), 바이쿤타(Vaikuntha, 천계의 보호자), 비슈바루파(Vishvarupa, 모든 모습을 갖춘 이), 다타트레야(Dattatreya, 힌두교의 세 신이 모두 합쳐진 형태), 요기슈바라(Yogishvara, 요가 수행자)라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비엔나

비엔나 공방 Wiener Werkstatte(독)

1903년 비엔나 분리파* 화가인 모제Kolomann Moser와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인 호프만Josef Hoffmann(1870~1956)이 사업가인 바애른도르퍼Fritz Waerndorfer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에 설립한 수공예품 공방(工房). 건축과 공예의 통일을 주장한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의 사상과 미술과 공예운동*에서 영감을 받았다.
비엔나 공방은 1905년 잡지인 《호헤 바르테Hohe Warte》에 ‘현재 끔찍한 재난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저질 대량생산이고, 또 하나는 고대 양식의 어리석은 모방으로 인해 전세계의 수공업 미술이 피해를 입는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가구나 식탁, 은제품 등 모든 공예품들이 회화나 조각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0년 분리파* 전시회에서 소개된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1868~1928)의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아 실내장식과 가구, 식기, 직물, 금속세공품 등을 주문 제작하였다.
비엔나 공방은 재료의 존중, 구조의 간소화, 기능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아 분리파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예품의 생산과 기술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즉 과거의 감각적, 장식적 수공예로부터 탈피하려는 현대의 합리적 사고에 입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우하우스*에서 보여지는 공업화와 기능주의*화를 추구하지 않고 작가의 창조적 감흥을 중심으로 하여 우아함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 결과 로코코와 바로크 양식을 현대화한 것 같은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대표적 작품은 분리파 건축 운동과 협동작업한 브뤼셀에 있는 스토클레트Stoclet 저택의 실내장식이며, 식당의 모자이크 벽화는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가 디자인하였다.
1930년 제1차세계대전 후 경제적 곤경으로 말미암아 폐쇄되었지만 비엔나 공방은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유리공예와 수공예에 널리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초 공예사상의 한 획을 그었다.

비엔나 환상파

비엔나 환상파 Wiener Schule des Phantastischen Realismus(독)

정확하게 말하면 비엔나 환상적 사실주의(幻想的寫實主義).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로 비엔나 조형미술아카데미의 귀터슬로Albert Paris Gutersloh 교수 밑에서 공부하며 작업을 시작한 하우스너Rodolf Hausner, 렘덴Anton Lehmden, 후터Wolfgang Hutter 등의 화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표현 양식을 말한다.
잊혀진 신화 속의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중세의 종교와 문화에 심취하였던 비엔나 환상파 작가들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의식 밑의 영역에 대한 강렬한 동경과 기묘하고 침울한 환상, 묵시록*적인 비전을 특징으로 한다. 그들은 기술적인 정교함을 통해 환상적인 우주 신화를 추구하고, 전생의 기억, 완전무결한 자연에 대한 환영을 재현하였다. 일관적으로 구상 회화를 고집했던 비엔나 환상파의 화풍은 화려한 색채와 정밀한 묘사 기법으로 극히 문학적인 회화 세계를 이룩했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 보슈Hieronymus Bosch(c.1450~1516), 브뤼겔Pieter Bruegel(c.1525~1569), 이탈리아의 보티첼리Botticelli(1445~1510),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와 쉴레Egon Schiele(1890~1918) 같은 작가들이 그 기법적 모델이 되었다. 투명한 색채에 의한 화려한 장식과 감수성은 신화적 이미지라는 소재에 적합한 회화적 표현효과를 얻고 있다.
비엔나 환상파는 그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시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비현실적인 세계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며, 인간 심리의 분열상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비엔나 환상파의 작업은 당시 미술계의 일반적인 동향과 비교해 볼 때 지극히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으나, 1965년 독일에서의 전시를 계기로 이후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비엔날레

비엔날레 biennale(이)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라는 뜻으로 미술 분야에서 2년마다 열리는 전시 행사를 일컫는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길며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은 베니스 비엔날레이다. 1895년에 창설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2년마다 6월에서 9월까지 여름 동안 27개국의 독립 전시관과 가설 전시관을 설치하여 세계 각국의 최신 미술 경향을 소개하는 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제45회 전시부터 독립된 국가관을 개관하여 참가하고 있다.
그 밖에도 휘트니 비엔날레(미국), 상파울루 비엔날레(브라질), 리옹 비엔날레(프랑스), 이스탄불 비엔날레(터키), 하바나 비엔날레(쿠바),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1995년에 처음 열린 광주 비엔날레가 개최되고 있다. 이같은 국제 비엔날레 행사들은 실험성과 지역성, 젊은 미술가를 육성하려는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최근에는 상업성과 국가 경제와 문화 이미지의 측면에서 접근하려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