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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예술

반예술 反藝術 anti-art(영)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제기한 후 현재까지 폭넓고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반예술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 마르쿠제Herbert Marcuse(1898~1979)는 반예술 작품을 그림이 있기는 하지만 예술로서 의도되지 않은, 예를 들어 낙서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배트코크Gregory Battcock는 기존 도덕을 위반하는 것, 예를 들면 불법 섹스만화 따위를 반예술로 본다. 미국의 미학자 디키George Dicky는 예술을 관습으로 보고, 진정한 반예술이란 그 관습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이루어지면서도 관습의 규범을 교묘히 이용하여 어떠한 예술 장르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반예술의 개념은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서 기성 가치의 부정을 표명했던 취리히 다다*에서부터 태동하였다. 다다는 입체주의*를 부정하면서 근대로부터 근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속적인 흐름으로서의 예술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반예술의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것은 뒤샹이다. 뒤샹은 1916년 반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앙데팡당*전에 가명으로 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했지만 전시를 거부당했다. 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변기가 기성 가치를 부정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전개와 그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것처럼, 반예술은 무엇보다도 예술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뒤샹은 고전 예술의 대표격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넣어 기존의 미의 관념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신사실주의*, 팝 아트*, 미니멀 아트*, 개념 미술* 등은 그 부정의 대상으로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미학을 중심에 놓았다. 이렇듯 다다에서 시작된 반예술 개념은 예술의 외재적인 자기 비판을 거쳐 예술 자체의 구성요소를 검증하는 내재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발견된 오브제

발견된 오브제 found object(영) objet trouvé(프)

주로 기계 제작된 일상용품으로서 기성의 물건이지만, 미술작품이나 미술작품의 일부분으로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오브제*를 의미한다. 발견된 오브제를 최초로 착안한 작가는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인데 그는 1913년부터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명명한 작품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변기나 삽처럼 대량생산된 물건에 변형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작품으로서 제시한 뒤샹에 의해 기성품은 예술로 승화되었다. 레디메이드를 통한 뒤샹의 의도는 미술창작 과정에서 수반되는 작가의 신체적 활동과 손재주에 대한 관심을 지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가들도 발견된 오브제의 가능성을 탐구하였으며,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키엔홀츠Edward Kienholz(1927~1994), 보이스Joseph Beuys(1921~1986), 존스Jasper Johns(1930~ ) 등의 미술가들에 의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 ‘레디메이드’ 참조

발묵

발묵 潑墨

수묵화의 용묵법(用墨法). 필(筆)이나 준법*을 쓰지 않고 먹을 붓거나 뿌려가면서 형태를 그리는 방법이다.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 전하는 바로는, 당唐의 왕협王冾(우앙 스)이 흰 종이에 먹을 뿌리고 발로 차고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 형상을 따라 바위, 구름, 물을 그렸는데, 마음먹은대로 손을 놀려 구름과 노을, 비바람을 그려 내니, 신이 기교를 부린 듯 아름답고, 엎드려 보아도 먹이 얼룩진 자국이 없었다 한다.
명대(明代)의 이일화李日華(리 르화)는 《죽란화잉竹雅畵媵》에서 “발묵은 먹을 오묘하게 사용해서 붓의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하고, 마치 먹을 뿌린 것처럼 그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청대(淸代)의 심종건沈宗騫(선 쫑지앤)은 《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에서 “먹은 발묵, 산색은 발취(潑翠), 풀색은 발록(潑綠)이라 하니, 발(潑)의 쓰임새는 그림 속의 기운(氣韻)을 피워내는 것이라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했다. 번지는 효과를 이용하여 우연의 미를 얻을 수 있으므로 주로 일격을 나타낸 문인화가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먹물이 풍부하고 기세가 가득한 모든 것을 다 ‘발묵’이라 불렀다. 현대에도 채색을 위주로 한 붓놀림이 호방한 화법을 ‘발채(潑彩)’라고 부른다.

발해 미술

발해 미술 渤海美術

발해는 중국 당대(唐代) 후반에서 오대(五代) 전기에 걸쳐(698~926) 동북지방(東北, 滿洲)과 옛고구려 북부지방을 영토로 했던 왕국. 현재의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은 성왕이 동경용원부에서 천도한 뒤 국가가 망할 때까지 135년간 수도였다. 동경성은 발굴 결과 동서 길이 4.6㎞ 남북3.3㎞의 큰 도성으로, 당나라 장안성長安成의 조영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일본의 헤이안쿄平安京보다 그 규모가 컸다.
발해의 불교신앙에 대하여서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체계를 세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지 13년 뒤인 713년에 당나라의 책봉사(冊封使)를 맞이하고, 당나라에 보냈던 왕자가 요청한 것 중의 하나가 ‘절에 들어가 예배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라는 기록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제3대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감금륜경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經法大王’이라는 점에서 발해의 상류층이 지녔던 불교신앙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黑龍江省 東京城鎭)의 발굴 때 제1사지(寺址)에서 제4사지까지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내성에서는 동서 대칭의 위치에 다시 사지(寺址)가 확인되고 있다. 불상으로는 원화 9년(814)에 발해사신 고예진高禮進 등이 금, 은 불상 각 1좌(座)씩을 당나라에 진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상경용천부에서 발굴된 소형전불(小形塼佛)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吉林城 半拉城子)의 유지 발굴에서 출토된 〈이불병좌석상二佛竝座石像〉은 고구려 양식과 고구려 제작 기법을 이어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불상은 석조, 금동, 철, 건칠, 전, 소상 등의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고 있으며, 양식으로는 육조(六朝), 당唐, 고구려의 영향이 보인다.
또한 삼채도(三彩圖)의 파편이 발견되고 있다. 상경성내 남부의 흥륭사興隆寺 대전 앞에 있는 〈연등석탑燃燈石塔〉은 발해미술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송석(松石)과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고 하는 대간지大簡之라는 화가의 이름이 전하여지나, 순수 회화* 작품은 현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1977년에 길림성 연변沿邊 화룡현和龍縣의 서용두산西龍頭山에서 정효공주貞孝公主(757~792)의 벽화*가 발굴되어 발해의 회화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유려한 먹선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화면에는 입체감과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또한 인물들의 퉁퉁한 몸매나 복장에서는 당대 인물화*의 영향이 보이면서도 여러 가지 세부 표현에서는 발해회화의 독자적인 면이 간취되어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방문

방문 訪問 visitation(영)

기독교 미술 주제의 하나. 누가복음 1장 39~56절에 의하면, 수태고지* 후 그리스도를 잉태한 성처녀 마리아는 유다의 마을로 가 친족 엘리자베스를 방문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천사가 그의 남편 자카리야에게 고해준 바와 같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을 기뻐하고 기리며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보통 두 임부는 서로에 대하여 인사를 교환하든가, 혹은 열렬히 포옹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진다. 때로는 엘리자베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지오토Giotto(1266~1337)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파도바)에서와 같이 흔히 양자의 자궁 내에 이미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이 서로 대하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려진다.

방서

방서 榜書, 牓書

고대 중국에서 궁전(宮殿), 변액(匾額), 문액(門額)에 쓰던 큰 글자. ‘서서(署書)’ ‘제방서(題榜書)’ ‘벽과서(擘窠書)’ 등으로도 불리며 후에는 초패변액(招牌匾額) 등에 쓰인 큰 글자도 방서라 불렸다.

방염제

방염제 防染劑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의 하나. 도자기의 표면에 왁스나 그리스를 발라서 시유(施釉)할 때 유약*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소성시에 왁스나 그리스는 타 버리므로 유약이 씌워지지 않은 노태(露胎)된 부분은 반점 모양으로 남게 된다.

배드 페인팅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영)

독일 신표현주의*의 미국적 양태로서 하나의 조직적인 미술 운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접근 방식을 의미한다. 1978년 터커Marcia Tucker가 기획하여 뉴욕의 신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회 <나쁜 그림들Bad Painting>에서 비롯되었다. 표현적이고, 또한 의도적으로 조악하게 처리한 재료와 서술적인 주제, 절충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배드 페인팅의 주제는 구상*이 압도적으로 많고, 특히 작가 개인의 자전적인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평론가들에 의해서 당대의 ‘좋은 미술(good art)’로 공인받은 미니멀 아트*와 개념 미술*의 무개성적이고 감정이 극도로 배제된 태도와는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종종 하부 문화와 관련을 맺으면서 점잖은 취향의 기준을 거부한다. 즉 여기에서 ‘나쁘다’는 의미는 세련된 취향이나 기법 등에 의존하는 배타적인 고급 미술의 규범에 도전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배드 페인팅의 선구격으로는 거스통Philip Guston(1913~1980), 레드 그룸스Red Grooms, 펑크 아트*를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작가에는 롱고Robert Longo(1953~ ), 슈나벨Julian Schnabel(1951~ ), 살르David Salle(1952~ ), 알버슨James Albertson, 브라운Joan Brown, 제니Neil Jenney(1945~ ) 등이 있다. 이들은 형상의 회복을 증언함으로써 1980년대 구상회화에의 복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로의 이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랑

배랑 拜廊 narthex(영)

초기 기독교 혹은 비잔틴* 건축에서 교회의 본당으로 연결되기 전에 위치한 단층의 큰 방이나 현관. 건물의 내부에 존재하는 경우는 에소나르텍스(esonarthex), 외부에 있는 것은 엑소나르텍스(exonarthex)라고 부른다. 바실리카* 건축에서는 신랑*의 전면에 횡단으로 설치된 길고 가느다란 현관홀을, 성당 건축에서는 개방식의 둥근 방의 일부를 가리키며 안뜰과 이어지는 부분을 말하기도 한다.

배흘림 기둥

배흘림 기둥

기둥의 전체길이 중 아랫부분에서 1/3가량의 높이까지 기둥의 두께가 점차로 커지다가 그 위로부터는 서서히 좁아져 항아리와 같은 형태를 가진 기둥을 말한다. 고려와 조선 초기의 주심포계(柱心包系)와 다포*계(多包系)의 건물에는 배흘림이 없다.

→ ‘민흘림 기둥’ 도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