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협회 書畵協會
일제시기에 서예가, 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 최초의 미술인 단체. 1918년 서울에서 발족하여 모두 15회의 협회전을 가졌으며 1937년 총독부의 정지령에 의해 조직활동이 중단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던 1911년 윤영기尹永基의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과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晉(1853~1920)이 주도하는 서화미술회* 등 제자들을 양성하는 강습소가 생겼다. 1915년 김규진金圭鎭(1868~1933)에 의해 서화연구회가 생기고 평양이나 대구에도 학원이 생겨나서 미술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느나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전시무대나 구심적인 단체가 없는 상태였다. 이무렵 일본인 양화가들이 한국에 건너와 조선미술협회를 만들어 화단을 끌어갈 기세를 보이자 주체성이 있는 단체의 결속을 절감한 미술가들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을 중심으로 하여 조석진, 안중식, 오세창吳世昌(1864~1953), 김규진, 정대유丁大有(1852~1927), 현채玄采(1856~1925), 강진희姜璡熙(1851~1919), 김응원金應元(1855~1921), 정학수丁學秀, 강필주姜弼周(1860경~1923), 김돈희金敦熙(1871~1936), 이도영李道榮(1884~1933) 등 13명을 발기인으로 서화협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으로는 안중식이 선출되었다. 협회의 명칭에 ‘미술’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은 것은 일본이 만든 신조어라는 거부감과 전통적인 용어를 고수하려는 원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예부총재에 김윤식金允植, 고문에 이완용, 민병석, 김가진, 박기양 등 한일합방 주역이었던 친일 고관를 내세우고 있어서, 협회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서화협회는 창립 직후 3•1운동의 격동 속에서 안중식, 강진희, 조석진의 타계와 일부 회원의 탈퇴로 2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21년 4월초에 창립전을 열어 안중식, 조석진의 유작과 안평대군安平大君, 정선鄭敾(1676~1759),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명품을 전시하고 김은호金殷鎬(1892~1979), 이상범李象範(1897~1972), 노수현盧壽鉉(1899~1978), 최우석崔禹錫(1899~1965) 등 신진의 동양화와 고희동, 나혜석羅蕙錫(1896~1948)의 유화작품을 선보였다. 이어서 1922년 3월에는 제2회 전시회를 개최하고 《서화협회보書畵 協會報》를 발간하며 서화학원도 개설하는 등 초반에는 저변확대와 신진양성을 위한 왕성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22년 6월, 문화정책을 표방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창립과 더불어, 기구의 규모나 운영의 측면에서 관전(官展)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서화협회전은 지속적인 주목과 확산에 성공하지 못하고 기존의 회원들마저 이탈하면서 선전(鮮展)과의 경쟁에서 점차 도태되게 되었다. 일부회원의 선전 출품거부와 동아일보 등 여론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 내부의 의식차이와 불화는 전시회의 부실화를 자초하여 1929년 심영섭沈英燮은 서화협회가 처음부터 뚜렷한 민족지향이나 성격이 없었다는 점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제기 속에서 서화협회는 1930년 임원진을 새로 구성하고 1931년부터 신인공모제를 채택하는 등의 개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이후 김기창金基昶(1914~ ), 한유동韓維東(1913~ ), 장우성張遇聖(1912~ ), 이여성李如星(1901~?), 이응노李應魯(1904~1989), 이경배李慶培(1900~1961), 정용희鄭用姬(1914~?) 등의 신인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협회전은 동양화 작가들을 주축으로 50여명을 넘지 못한 회원, 비회원의 출품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