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준
수직준 垂直皴
조선 후기에 활약한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창안한 준법*. 예리한 필선을 수직으로 죽죽 그어내려 나타낸다. 금강산 내외경의 뾰족한 암산을 묘사하는데 많이 사용된다. 준법은 본래 중국 화보에서 발전되어 왔으나 수직준은 진경산수*를 대성시킨 정선의 독특한 준법을 말하기 위하여 근래에 만들어낸 용어이다. 수직준법은 그 후 김홍도金弘道 등 진경산수화파에 이어졌다.
→ ‘정선파’ 참조
수직준 垂直皴
조선 후기에 활약한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창안한 준법*. 예리한 필선을 수직으로 죽죽 그어내려 나타낸다. 금강산 내외경의 뾰족한 암산을 묘사하는데 많이 사용된다. 준법은 본래 중국 화보에서 발전되어 왔으나 수직준은 진경산수*를 대성시킨 정선의 독특한 준법을 말하기 위하여 근래에 만들어낸 용어이다. 수직준법은 그 후 김홍도金弘道 등 진경산수화파에 이어졌다.
→ ‘정선파’ 참조
수채화 水彩畵
water-color painting(영)
물에 용해되는 매재(일반적으로는 아라비아 풀)와 혼합된 안료로 그린 회화를 가리키며, 서양 회화의 양식들 중 유화*와 대응되는 용어다. 넓은 의미에서 르네상스* 전후에 유화기법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대부분의 회화기법은 물을 직접 또는 간접적인 매개로 사용하였으므로, 동양의 수묵화*나 담채화를 포함하여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그림, 템페라*나 과슈*, 중세 유럽의 도판 필사본*에 그려진 장식화들도 수채화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채화는 과슈, 템페라, 미니어처* 등과는 구별된다. 과거에 수채화는 유화와 비교하여 유화 과정을 위한 밑그림이나 미술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나 사용하는 방식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소묘*와 더불어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중요 회화 양식이 되었다.
갈색 비스터 물감이나 오징어 먹으로 된 엷은 색조의 단색 도료가 17세기의 펜 소묘화에서 인물이나 풍경 묘사를 위해 쓰였으며, 로랭Claude Lorrain(1600~1682)과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는 이 방법으로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은 공간의 느낌, 원거리와 대기의 인상을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표현했으며, 이런 효과는 단색조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되었다.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와 반 다이크Anton van Dyck(1599~1641) 등의 화가들에 의해서 시도된 예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18세기말 이전의 수채화에서 다양한 색채를 구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수채화의 획기적인 발전은 18세기와 19세기초의 영국에서 일어났다. 단색조의 바탕에 일정 범위의 색을 점차 많이 사용하였지만, 영국의 수채화는 네덜란드의 전통으로부터 광선과 대기의 자연스러운 효과를 잘 이어받았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 중기 이래 샌드비Paul Sandby(1725~1809)의 작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토포그래피(topography, 지역의 풍토에 맞는 기법)는 계속해서 허언Thomas Hearne(1744~1817), 루커Michael Angelo Rooker, 맬턴Thomas Malton과 같은 영국 수채화가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1802년 요절한 거틴Thomas Girtin(1775~1802)은 단색조와 결별하고 색채가 가미된 매체를 자유분방하고도 직접적으로 밑그림 없이 사용했으며, 광선 효과를 위해 화폭의 흰 표면을 여백으로 남기거나 아주 엷은 색조로 처리하였다. 터너William Turner(1775~1851)는 50년 동안 이 기법을 바탕으로 작업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기법은 콘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에 의해 개척되었다. 낭만주의* 정신과 닿아있었던 그의 접근방법은 수채화의 전반적 성격을 변화시켰다.
여러 가지 물감을 사용함으로써 미술가들은 색채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었고, 초상화를 제외한 모든 영역의 영국 회화에 수채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시회 그림용으로 수채화를 활용하는 것은 1804년 ‘올드 워터 컬러 소사이어티Old Water-Color Society’가 창립되면서 활발해졌다. 낭만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몇몇 외국 화가들, 특히 카를 푀르는 수채화가 공감을 주는 매체이며, 쉽게 마르는 성질이 야외 작업에 적합함을 발견했다.
20세기의 영국 수채화는 스티어Philip Wilson Steer(1860~1942), 존 내시John Nash, 폴 내시Paul Nash(1889~1946), 서덜랜드Graham Sutherland(1903~1980) 등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유럽 전역에서도 대중적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수채화는 점점 더 폭을 넓혀갔고, 그 간편하고 속도감 있는 표현 기법으로 인해 많은 화가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져 유화와 다름없는 표현수단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화 기법의 수채화가 시작된 것은 1910년 후반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유화의 기법을 연마하는 수준으로 인식되어 전시회에서 발표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중에도 이인성李仁星은 인물화와 풍경, 정물화에서도 높은 수준의 많은 수채화 작품을 발표했다. 또 현역 화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화작품과 함께 수채 재료에 의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으며, 수채화 전문화가들도 다수 활동하게 되었다.
수태고지 受胎告知 Annunciation(영)
기독교 미술의 오랜 주제 중 하나. 도상은 신약성서의 누가복음 제1장 26~38절을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었음을 알리는 대천사 가브리엘과 이 소식을 전해 듣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주요 인물이다. 때에 따라서는 시녀, 헌납자 등 제 삼자를 배치하기도 한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 때에는 성모의 순결의 상징인 백합 또는 올리브 가지를 들었고, 성모는 서거나 앉은 채로 이들을 맞는다. 중세에는 이와 같은 기본적 형태에 성부의 신, 성모 앞에 날아와 앉은 성령의 비둘기 또는 어린아이 모습을 한 그리스도 등을 배치하고 각종 상징들을 더하였다. 안젤리코Fra Angelico(c.1395~1455)의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벽화는 수태고지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순수미 純粹美
Das reine Schöne(독)
미학*상의 용어. 대체로 ‘미적인 것*’을 넓은 의미의 미*라고 할 때, 미적 범주*의 하나로서의 좁은 의미의 미를 가리킨다. 근대 예술이 특정 표현을 추구하게 되면서 미의 개념만으로는 부족하여 미와 숭고*를 대립시키기 위해 순수미를 제창하게 되었다. 순수미는 미적인 것의 특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상미와 동일시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순수란 결코 가치 개념이 아니며 순수미를 이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영화 純粹映畵 cinéma pur(프)
독일의 절대영화*와 같은 시대에 프랑스에서 크게 부흥했던 전위영화운동. 레제Fernand Léger(1881~1955), 달리Salvador Dali(1904~1989)를 위시하여 많은 미술가들이 협력했다. 무성영화 중기에 주창되었던 구소련의 몽타주* 이론이 프랑스에서는 무시낙Léon Moussinac, 뒤락Gérmaine Dulac 등에 의해 주로 시각적 리듬을 중심으로 한 포토제니(photogénie)론이 되었고, 순수영화는 이에 입각하여 감각적인 미와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절대영화에서 보이는 추상적 형태나 빛의 효과에 화면을 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소의 재현적인 요소를 가진다. 무엇보다 설명적인 기법, 문학적인 제재를 극복하고 순수하게 시각적인 표현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레제의 <기계적 발레>, 앙리 쇼메트Henri Chaumette의 <반사와 속도의 유희>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순수영화는 당시의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만 레이Man Ray(1890~1977), 달리 등의 협력으로 전위영화의 주류가 되었다.
→ ‘절대영화’ 참조
순수주의 純粹主義 Purisme(프)
입체주의* 미학을 계승하면서 1918년 오장팡Amédée Ozanfant(1886~1965)과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가 작성한 <입체주의 이후Aprés le Cubisme>라는 선언서에서 시작된 운동. 이 글은 1919년 창간되고 1925년에 폐간된 잡지 《에스프리 누보Esprit Nouveau》에 실렸으며, 순수주의 운동은 이 잡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은 입체주의의 미학을 더욱 순수히 하여 쓸데없는 장식성이나 과장을 일체 거부한, 간결하고 명확한 조형표현을 주장하였다. 즉 그것은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배제하는 기능주의*의 관점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회화에서의 환상과 근거 없는 자유에 반대하는 순수주의는 그 모델로 기계를 취하며, 작품에 우연성과 무의식이 가해지는 것을 금하였다. 이들의 원칙을 실제로 엄격히 따른 작가는 극소수였지만, 순수주의 이론은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조각*, 공예*, 음악, 연극의 분야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건축 사상도 여기서부터 전개된 것이었다.
숭고 崇高 the sublime(영) Das Erhabene(독)
미학*상의 용어. 미적 범주*의 하나. 보통 좁은 의미의 ‘미*’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대상이 인간을 압도하는 크기 또는 힘을 갖는 경우, 소위 미적 형식은 상실되며 처음에는 그 형식과 내용의 길항(拮抗)으로 인해 불쾌감을 느끼지만 곧 그런 느낌이 사라지면 유한한 감성을 매개로 무한한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생명 감정이 자극되고 역감(力感)이 앙양되어 대상에 대한 경외, 정서적인 경악이나 황홀경, 즉 넓은 의미로의 ‘미’의 감정을 낳게 된다. 전형적인 것으로서는 해돋이나 바다와 같은 숭고한 자연(칸트Immanuel Kant), 비극적인 행위의 도덕적 신념(쉴러Friedrich von Schiller) 또는 초기의 인도적, 모하메드적, 유태, 기독교적 시와 신비주의 속에서의 신의 임재(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가 언급될 수 있다. 후기 고대의 논문 《숭고에 관하여Vom Erhabene》(수도-롱기누스Pseudo-Longinos) 이래로 숭고의 개념은 미학의 확고한 구성성분이 되었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서 체계적으로 완성되었다.
한편으로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숭고는 감미로운 미와 반명제적으로 대립되고(칸트), 다른 한편으로 미와의 차이는 양자의 더 깊은 동일성에 의해 무시된다(셸링Friedrich W.J.Schelling). 헤겔학파는 숭고를 희극적인 것이나 추한 것이라는 미적 범주와의 연관성 속에서 아직도 불완전한,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미 자체의 변양으로 파악한다. 이 개념의 체계화는 숭고한 것의 상이한 형식들의 차별화를 함께 포괄한다. 칸트는 크기의 ‘수학적 숭고’와 그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할 때에 두려운 것으로 보이는 힘의 ‘역동적 숭고’를 구분한다. 한편 쉴러는 인간의 표상 충동과 자기 보존 충동으로부터 ‘이론적 숭고’와 ‘실천적 숭고’를 구분한다. 피셔Friedrich Theodor Vischer는 보다 포괄적으로 ‘감각적 숭고(자연)’ ‘오성적 숭고(신념, 의지)’, 비극적 갈등의 ‘이성적 숭고(역사)’의 단계로 발전시킨다. 심리학적 미학에서 숭고한 것은 ‘감정이입(립스Theodor Lipps, 폴켈트Johannes Volkelt)’으로서, 즉 미적 지각의 대상에 대한 숭고한 감정의 분출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숭고한 것의 경험에 대한 주체의 강조가 정당하게 보일수록 모든 사회적, 역사적 매개로부터 주체의 격리는 문제시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미학은 이 개념을 모든 선험적 조건의 포기 아래에서 물질화하여 인간의 사회적 실천과 연관해서 규정한다. 특히 인간의 업적은 더 나은 인간적인 미래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된다. 20세기에 들어 학문적, 기술적 혁명과 종교와 형이상학의 죽음은 숭고한 것에 대한 점차적인 무관심을 초래했다. 그와 달리 이 개념은 현재의 지구적 문제와 연관하여, 그리고 평화 운동이나 생태 운동과 연관하여 위험이나 공포 또는 자연파괴의 숭고로서, 예기치 않은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
쉬포르 쉬르파스 Support-Surface(프)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결성된 전위적 미술단체, 때로는 그 기법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요 작가들로는 데바드Marc Devade, 칸Louis Cane, 비울레Vincent Bioulès, 드죄즈Daniel Dezeuze, 비알라Claude Viallat, 세이투르Patrick Saytour 등이며, 비평가 플레네Marcelin Pleynet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쉬포르는 ‘버팀(支柱)’ 즉 회화에서의 지지체를 뜻하고, ‘표면’이라는 말인 쉬르파스는 화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회화 캔버스*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그림 그리는 것은 아직도 가능하다. 다만 회화적 방법의 개조가 필요할 뿐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구조에의 새로운 탐구, 신사실주의*와 같은 반예술*적인 전위주의의 추방, 모든 미술이 파리에 집중되는 경향의 분쇄 등을 구체적인 목표로 내세워 회화로 실천하고 있다. 회화를 인식의 대상으로 대하기 이전에 먼저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상업적 또는 회화에 개입된 불순한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회화를 혁신하고 혁명을 그리는 것”이라는 데바드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마르크시즘과 모택동의 유물론적 변증법까지 원용하여 회화에서 정치, 경제적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1968년 프랑스 5월혁명 전후의 사상적 동향(마르크스와 프로이트로의 회귀)에 대한 예민한 반응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회화를 신화화하는 서명, 제작일자, 제목 등도 일체 포기해 화포의 중성적인 성격을 오브제*화하고 있다. 이들은 캔버스의 나무틀을 떼내어 버림으로써 종래의 화포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꾸었다. 한 장의 물질적인 천이 지지체인 동시에 표면임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틀이 없는 물질로서의 화포를 장대로 받치거나 상 위에 펼치거나 직물처럼 접어서 개어 놓음으로써 회화와 직물 도안과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특히 비알라의 경우에는 섬유의 종사와 횡사의 틈 사이가 확대된 망을 사용한다든지 혹은 그 구성요소인 실의 차원으로까지 해체시켜 천의 물질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쉬포르 쉬르파스가 미술 오브제를 회복시켜 놓은 것은 개념미술*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으며, 정치적 편향성을 지닌 작가들이 미술작품 대신 선전 선동(demonstration)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쉬포르 쉬르파스의 이론이 복잡한 것에 비해 작품은 비정치적이고, 단순하며 온화하고 장식적인 추상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술작품을 화랑과 미술관에서 안이하게 관찰하는 ‘고고학적 태도’에서부터 시대와 장소의 상황에 밀착하여 보는 ‘보편적 위상 수학’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면서 사회적 현실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으로 회화 요소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두 입장은 결과적으로 이 그룹의 이론적 대립을 심화시켰고, <쉬포르 쉬르파스>라는 명칭의 전시회가 1972년 제4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 원인이 되었다.
유물론에 의한 급속한 이론화를 추진했던 칸, 데바드, 드죄즈의 성향과 비알라, 세이투르 등의 반이데올로기적 태도가 필연적인 분열을 야기한 것이다. 이들은 마르크시즘적 입장으로부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이해가 표면적일 뿐 아니라, 이들이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기치가 될 예술작품을 제작하기보다 무계층 미술이라는 부르주아 이념 하에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작업은 물질적 형태로의 환원을 기도한다는 점에서 회화의 시각적 형태로의 환원이라는 미국의 형식주의*적 강령을 거역한다는 일단의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미니멀 아트*의 프랑스적 전개의 한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