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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빌 stabile(영)
칼더Alexander Calder(1898~1976)가 1930년대 말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정지된 조각(immobile sculpture)’의 총칭으로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과 대조적인 개념이다. 그 명칭은 1932년 파리의 비뇽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칼더가 모빌을 발표했을 때, 이것을 본 아르프Jean Arp(1887~1966)가 이전의 움직이지 않는 칼더의 철사 조각 작품을 보고 ‘스태빌’이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이후 강철로 제작된 기념비적 추상 조각들도 스태빌에 포함되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가벼운 모빌에 비해, 육중한 구조의 스태빌은 대지의 중력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1950년대 이후 거대한 스태빌 작품들은 도심이나 공원, 광장, 고층건물에 자리잡으면서 대표적인 공공 조각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1960년대에 제작된 것 중에는 사람이 걸어다니기에 충분할 정도로 대규모적인 작품이 많고, 스태빌은 개방적인 옥외 환경 속에 설치되어 고층 건축물과도 조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도시 미관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 ‘모빌’ 참조
스테인 페인팅 stain painting(영)
색면 회화*에 속하는 스테인 페인팅은 캔버스 위에 붓을 사용해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처리 즉 초벌질이 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주로 희석된 아크릴 도료)을 직접 부어버림으로써 얼룩지거나 스며들도록 하는 회화이다.
대개의 경우 얼룩회화는 캔버스를 이젤이나 벽 대신 바닥에 펼쳐 놓은 채 제작된다. 얼룩회화 기법은 1952년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의 드리핑* 페인팅에서 영향을 받은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1928~ )가 시작하였으며, 1953년 4월 그의 작품 <산과 바다>를 본 루이스Morris Louis(1912~1962)가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의 양식을 변화시켜 새로운 스테인 회화에 몰두하게 되면서 확산되었다.
평론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1994)는 그의 변화에 대해 “색채와 바탕과의 밀접한 일치감을 얻어내는 방법은 기름에 수채화 물감의 기법을 차용하여 흡수력 있는 표면에 안료를 얇게 펴바르는 것이다. 루이스는 크기가 정해지지 않고 바탕칠이 안된 두꺼운 목면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흘려 안료가 아주 얇게 모든 부분에 퍼지게 한다. 그리고 그 색채의 막이 아무리 많다 해도 밑에 있는 섬유의 짜임새가 드러나도록 가볍게 부착시킨다. 이 경우 섬유는 단순히 물감으로 덮였다기 보다 그것이 스며들어 젖었기 때문에 오히려 안료 그 자체, 색 그 자체가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실제 루이스의 스테인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작품과는 아주 다른 물질적 효과를 발산하며, 그 채색과정은 색채의 형태와 명암에 대한 반동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작품은 색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나아가 폴록이 입체주의*에서 물려받은 얇은 공간을 벗어나는 동시에 뉴만Barnet Newman(1905~1970)과 로스코Mark Rothko(1903~1970)의 희미한 상징적 공간에 비해서도 훨씬 실재적인 ‘평면성’을 성취할 수 있었다. 표면처리가 되지 않은 캔버스는 겹치거나 주름이 잡혀 다양한 구성을 창출하였으며, 완성 단계에 이르러 주름이 펴지게 되는데, 이것은 화가들에게 있어 위치 안배의 문제, 즉 화면 이미지와 액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희석된 아크릴 도료는 천 속으로 스며들어 자체의 색이 겉으로 보기에 실체가 없는 것처럼 드러나게 함으로써 도료의 질감이나 광택은 느껴지지 않는다.
스테인 페인팅은 상당히 자동기술적인 제작 양상을 띤다. 미국의 비평가들이 지적한 스테인 페인팅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손이나 팔의 움직임이 전혀 개입되지 않음으로써 화가는 전통적으로 붓을 갖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림의 선이 함축하는 속성으로부터 해방된다. 안료의 얼룩진 부위는 순수한 색채로 존재하고 색조의 변화를 기하는 문제는 초월된다. 스테인 페인팅은 제작과정이 그대로 기록되는 회화이며 따라서 회화의 구조와 제작과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은 스테인 페인팅의 미를 ‘결함을 감추는 화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로젠버그Herold Rosenberg(1906~1978)는 스테인 페인팅의 색채 흡수성을 비판하면서 여기에서 청결함과 편안함이라는 중산층의 가치가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영)
재료에 안료를 넣어 만든 색유리나 겉면에 색을 칠한 유리를 기하학적이거나 장식적인 형태 또는 회화적 도안으로 자른 후, 납으로 된 리본으로 용접하여 만든 창유리. 유리의 착색에는 구리, 철, 망간과 같은 여러 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 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이러한 제작기술이 생겨난 이후에는 세부 사항들만 수정, 발전되었을 뿐 원칙상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이슬람 지역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슬람 건축에서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스테인드 글라스 기법이 찬란하게 발달한 곳은 서구 기독교 국가, 특히 프랑스 북부를 중심으로 한 북서 유럽 국가에서였다. 서구에는 12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 건축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특히 고딕 건축은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게 되었으므로 창유리가 벽화를 대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신비하고 감동적인 효과가 인식되어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 건축에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프랑스의 사르트르 대성당, 르망 대성당, 영국의 요크 및 캔터베리 등의 여러 교회의 창유리들이 12~13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며,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1~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성당의 예언자 다니엘을 묘사한 창문이다.
일반적으로 초기의 창유리들은 유리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착색에 얼룩이 지고 섬세한 표현이 어려웠으나, 오히려 광선의 미묘한 굴절과 투과를 일으켜서 매력을 더하고 있다. 1250년경까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청, 녹, 홍, 황금색이 중심이 된 강한 색깔에 각각의 유리 조각의 크기도 작고 투명하여 강렬한 색으로 진동하는 모자이크*같은 느낌을 준다. 또 대부분의 초기 작품은 회화적이어서 조각이나 벽화같이 건축물을 장식해 줄 뿐만 아니라 성경 속의 사건, 성자들의 생애 등 서술적인 요소가 많다. 14세기에는 기법상의 혁신으로 스테인드 글라스에 변화를 가져왔다. 은(銀) 용접기술이 개발되어 엷은 놋쇠빛에서부터 짙은 금색 또는 황갈색에 이르는 색의 표현이 가능해진 동시에 안료를 사용해 중간색을 만드는 방법도 개발되어 좀더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공예적이라기보다 회화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공법이 진보하긴 하였으나, 지나치게 회화*와 같이 되어 초기 창유리의 독특한 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영국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자체의 보수적인 방법에 따라 교회 예술에서 제작되었으나, 15세기부터는 점차 세속적인 건축물에도 사용되었다. 창유리는 18세기 이후 영국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사실상 쇠퇴하였다. 19세기 후반,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 등의 미술과 공예 운동*을 계기로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이 재인식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 프리커Thorn Prikker, 비겔란트Gustav Vigeland(1869~1943) 등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활용하였다.
스톤헨지 Stonehenge(영)
영국 윌트셔의 세일즈베리 평원에서 북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있는 거석 문화의 유적. 외곽이 흙 구조물로 둘러싸인 원형으로 배치된 거대한 선돌* 구조물로서 스톤헨지라는 명칭은 앵글로 색슨어의 stanhengest, 즉 ‘매달린 돌’에서 유래하였다. 선사 시대인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해서 기원전 1400년경에야 완성된 스톤헨지는 1700여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실행된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직경이 141m나 되는 원환(圓環)을 바깥 테두리로 하는 삼중의 원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앙부에는 이중의 원환상의 입석이 배치되어 있다. 지름이 약 32m에 달하는 바깥의 원은 본래 30개(현재 16개)의 입석 위에 대들보가 올려져 있었다. 그 안의 원은 소형의 돌을 늘어 놓았고 역시 보를 얹어 다섯 열로 줄지어 놓았다. 여기에 사용된 석재의 일부는 현장으로부터 2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운반되어 온 것이다. 스톤헨지는 묘 혹은 일종의 종교적 성소로 건설되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하지의 일출 방향과 일치하는 방향의 도로를 덧붙여서 선돌로 테를 삼고 있다는 점과 중심 축을 1년 중 중요한 날의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방향과 나란히 배치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태양이나 하늘의 숭배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스투코 stucco(영)
건축의 천장, 벽면, 기둥 등을 덮어 칠한 화장도료. 소석회(또는 석고)를 주재료로 대리석 가루, 점토분 등을 섞어 만들며, 고대부터 건축의 마무리 작업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어 부조*, 모양 붙이기, 채색 등으로 장식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대리석 가루를 섞은 순백색의 섬세한 재료를 사용하고 표면에 부조를 새겨서 대리석으로 마무리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했으므로 대부분이 흰색 바탕이지만 채색한 것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된 이 기법은 각 궁전과 저택을 호화롭게 장식하였으며, 건축의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투파 stūpa(범)
불교에서 불타의 사리를 봉안한 기념비적인 건조물을 가리킨다. 자이나교*에서도 성현의 유골을 안치한 건축물을 스투파라고 부르지만 원래 베다 문학에서 스투파는 ‘정상, 꼭대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불교의 스투파는 반구형의 돔* 형태로 되어 있으며 벽돌이나 돌로 만들어졌다. 동아시아에서 쓰는 ‘탑파(塔婆)’, 혹은 ‘탑*(塔)’이라는 말은 팔리어의 ‘투파thūpa’에서 유래되었으며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스투파는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의 불교 문화권에서도 널리 숭배되었는데 각 나라마다 건조물의 형태가 조금씩 서로 다르다. 스리랑카*의 다가바*(dāgaba), 타이의 체디*(chedi), 미얀마*의 제디(zedi), 파고다*(pagoda)도 모두 스투파를 의미하는 말이다. 마우리야 시대* 아쇼카왕Aśoka의 명문*은 기원전 3세기경에 이미 인도에서 스투파 숭배가 있었음을 입증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스투파는 슝가시대*부터이다.
인도의 스투파는 정확한 비례 체계에 따라 설계되었는데, 이는 스투파가 우주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스투파의 기단(메디medhī)은 원형 또는 방형이며 그 위에 안다*라는 반구형 돔이 올려진다. 안다의 내부에는 불타의 유골을 모신 관이나 방을 만든다. 돔의 정상부에는 발코니 모양의 하르미카*가 있고 그 위에 야슈티*라는 기둥이 솟아 있다. 그리고 야슈티는 여러 단으로 된 차트라*를 받치고 있다. 안다(복발)를 중심으로 세속 세계와 성역을 구분하는 의미의 원형 울타리(난순, 베디카*)가 둘러져 있고 네 방위에는 각각 문(토라나*)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스와스티카(卍) 형태의 요도(繞道)를 따라 스투파 주위를 돌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울타리와 문에는 불타의 전생이나 일생을 묘사한 부조* 장식이 남아 있다. 시대가 내려오면 기단의 형태가 십자형이나 별모양으로 바뀐다.
스펙트럼 spectrum(영) spectre(프)
분광(分光)이라고도 한다, 자연광이나 다른 방사선이 프리즘을 투과하면 파장에 따라 굴절률이 다르므로 서로 다른 색으로 분산하게 되는데, 이처럼 분산되는 현상 또는 그것들을 한면에 투사시켜 파장 순서대로 배열한 것을 말한다. 백색 자연광의 경우, 대개 가시적으로 판명될 수 있는 것은 최단 파장으로 보이는 보라에서부터 파랑, 녹색, 노랑, 주황 그리고 최장 파장의 빨강까지 이르는 스펙트럼 색상이 나타난다.
미술에 있어서 빛의 스펙트럼의 인식은 인상주의*에서부터이다. 인상주의자들은 팔레트* 위의 색채를 광선 분석에 의한 선명한 색에 한정시키고 프리즘 분석에 나오지 않는 흑색이나 갈색을 팔레트에서 배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빛을 통한 색채가 새로 발견되고 색과 색의 관계에서는 색가*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