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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화 翎毛畵
ling-mao-hua(중)
중국화의 화제(畵題). ‘영’은 새의 날개, ‘모’는 짐승의 털을 뜻한다. 곧 영모화란 새나 짐승의 깃이나 털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꼼꼼하게 그리는 그림이다. 주로 작은 동물을 그리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새를 소재로 한 것을 영모화라 부르고, 짐승은 축수도(畜獸圖)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북송北宋의 화원(畵員)들 사이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영자팔법 永字八法
서예의 기본 필획을 ‘영(永)’자의 여덟 필획에 의해서 보여주는 방법. 측(側), 늑(勒), 노(努), 적(趯), 책(策), 약(掠), 탁(啄), 책(磔)을 말한다. 당唐 장회관張懷瓘(즈앙 후에이꾸완, 8세기 전반기 활동)의 《옥당금경玉堂禁經》 등에서 보이므로 당대(唐代)부터 이미 성행하였다고 여겨지나 그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전설에는 예서(隸書)로부터 생겨나 후한後漢의 최원崔瑗(츠웨이 위앤), 장지張芝(즈앙 즈), 삼국시대 위魏의 종요鍾繇(쭝 야오),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에 전해져 수隋의 지영智永(즈 융)이 그 내용을 명확히 하고 당대의 우세남虞世南(우 스난)에게 전수된 이후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정 影幀
고승들이 입적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린 초상화*. ‘정상(頂相)’ ‘진영(眞影)’ ‘조사도(祖師圖)’라고 많이 불린다. 조사도는 달마선사達磨禪師를 초조(初祖)로 하는 선종에서 중요시했다. 따라서 영정은 달마선사나 선종승려들의 초상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종파에 관계없이 고승들의 초상을 가리키게 되었다.
영정은 사자상승(師子相承)의 증표로서 법통을 확인하고 각 종파의 가르침과 전통적 유대를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초조 이하의 조사상을 법당에 걸어 공양하며 이것을 ‘괘진(掛眞)’이라 한다. 정상의 형식은 앉아서 오른손에 대나무 지팡이를 잡은 전신상이 많으며 특히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중국 송대(宋代)에 성행하였으며, 남송南宋의 〈무준사범상無準師範像〉(1238, 교토 東福寺) 등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성행, 특히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사찰의 조사당이나 국사당(國師堂)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송광사 국사전의 16국사진영도〉(1789) 등 120여점의 작품이 남아 있다.
예서 隸書 li-shu(중)
한자의 서체. 진팔체(秦八體)의 하나. 진대(秦代)에 소전*(小篆)을 간략화하여 만든 서체. 진秦의 옥리(獄吏)였던 정막程邈(츠엉 먀오)이 옥에 종사하는 사무원(從隸) 문서의 번잡함을 줄이기 위하여 고안하였다 하여 ‘예서’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한대(漢代)에 이르러서 전서*를 대신하여 통용되었다. 전한 중기까지는 아직 소박한 서체*를 보여 이를 ‘고예(古隸)’라고 한다. 전한 말기부터 차츰 파책(波磔, 영자팔법* 가운데 여덟 번째 책, 즉 파임)을 수반하는 기법이 발달하고 형식이 정비되었으며, 후한에 이르러 완성된 모양을 이루었다. 이것을 ‘팔분*(八分)’이라고 부르는데, 비각(碑刻)에 많이 사용되었다. 팔분의 서체는 위魏, 진晋 무렵까지 통용되었는데, 차츰 파책을 잃어 해서*로 옮겨 갔다. 이것을 ‘금예(今隸)’라고 부른다. 뒷날 고예, 팔분, 금예를 총칭하여 예서라 부르게 되었다.
예술 藝術 art(영) Kunst(독)
본래 반드시 예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일정한 생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어떠한 재료를 가공하고 형성하여 객관적인 성과나 물건을 산출하는 능력 또는 활용으로서의 ‘기술’을 총칭하며, 오늘날에도 넓게는 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어원적으로도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는데, ‘art’는 그 원어인 라틴어의 ‘ars’에서 ‘조립하다’ ‘고안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Kunst’는 본래 ‘알고 있다’ ‘할 수 있다’라는 의미의 ‘können’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모두 곤란한 과제를 교묘하게 해결할 수 있는 숙련된 특수한 기술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예술과 함께 수공(handicraft, handwork), 기타 실용적인 기술들을 포괄하는데, 특히 Kunst는 옛날에는 학문, 지식, 지혜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기술 일반으로부터 예술을 그 특수한 성격에서 다른 여러 기술과 구별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시대를 내려옴에 따라 자각되어 왔다.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야 겨우 단순히 손으로 하는 세공의 일과는 다른 미술 관념이 생겨났는데, 이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효용의 측면으로부터 기술을 이분화하여 한쪽을 생활의 ‘필요를 위한 기술’이라 하고, 다른 한 쪽을 ‘기분전환과 쾌락을 위한 기술’이라고 명명했다. 전자는 실용적인 기술, 후자는 소위 예술을 가리키는 것인데, 예술 쪽이 높은 수준의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미적 의미로 한정된 예술의 관념은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두드러졌으며, 예술을 일반적인 기술과 구별하기 위하여 특별히 파인 아트(fine art), 쇠네 쿤스트(schöne kunst), 보자르(beaux arts)라고 하는 표현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 기술로부터 구별된 협의의 예술은 좁게는 기술적 형성활동으로부터 특징이 가장 뚜렷한 조형예술(미술)로 국한되는 일도 있지만, 그 이외의 분야, 즉 음악, 문예, 연극, 무용 등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미적 가치의 실현을 본래의 목적으로 하는 기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술 활동으로부터 나온 성과물은 자연의 피조물 또는 기술이나 지식에 의한 산물과 구분된다. 자연에서의 창조는 자발적이며, 또 기술이나 지식에 의한 창조는 개념적인데 반해 예술은 이른바 직관적이다.
예술의 근원, 즉 예술 창조의 근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를테면, 상상력, 유희 충동, 모방 충동, 표출 충동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또 예술의 존재 양식이 공간적인가 시간적인가 또는 그 매체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예를 들면 건축, 조각, 공예 등의 공간예술, 무용, 연극, 영화 등의 종합예술, 또는 회화, 조각, 문예, 연극, 영화 등의 종합예술과 건축, 음악 등의 자유예술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예술관에는, 예술의 성립을 절대정신이라든지 우주의지, 계시 등에 의한 표현, 또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구상이나 잠재의식으로부터의 감정의 표현에 있다고 하는 관념론 내지는 낭만주의*가 있고, 실재하는 것을 형상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한다고 보는 사실주의*가 있다.
근대에는 예술 매체의 다양화에 따라 예술의 분류가 점점 세분화되는 경향이 있고, 또 급속한 기술의 발전은 예술과 기술의 화해(고대와는 다른 의미이지만)를 꾀하고 있는 듯이 보여지기도 한다. 예술학*, 미학*, 또는 기타의 학문적 방법의 응용이 예술 현상을 해명하고 있다.
예술미 藝術美
art beauty(영)
예술미란 넓은 의미의 미(美)의 범주 속에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자연미와 구별하여 사용한다. 자연미는 자연적 현실의 사물에서 찾아낼 수 있는 미이지만, 통상적으로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미, 예를 들면 풍경미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미학의 영역에서는 예술미에 대립하는 명칭으로 인간, 역사, 사회 등을 포함하는 일반적으로 현실생활에서 체험되는 미를 총칭한다.
이에 반해 예술미는 예술적 소산에 귀속시킬 수 있는 미인데, 이것은 예술의 본질상 인간이 미적으로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자연이 부여해 준 소재를 가공하고 형성하는 일에서 성립한다. 예술미 속에서 다시 예술의 종류에 따라 건축미, 조각미, 회화미, 음악미, 문예미 등을 구별할 수 있으며, 또 동일한 미적 대상 내지 예술품에 있어서도 형식과 내용의 양면에 대응하는 형식미와 내용미가 구별된다. 형식미는 미의 형식 법칙에 따라서 전체를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질서를 부여한 조화있는 형식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내용미는 유기적 및 정신적인 삶의 충실이 이 내용에 적응하는 형태에서 나타나는 바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다.
자연미에 대응하여 예술이 의도된 표현을 하고, 실현된 미를 어떻게 관련시키고 또 구별하는가는 예부터 미학*, 예술학*의 중심 과제중 하나였다. 이를테면 자연미와 예술미를 모두 미적 가치로 보는 칸트Immanuel Kant, 예술의 표현성 또는 의도성을 중시하여 자연미에서 예술적인 것을 구별하는 데소아르M. Dessoir, 자연미도 예술미에 의해서만 발견된다고 하는 낭만주의적 입장에서 예술의 일원성을 취한 셸링Friedrich Schelling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예술사회학 藝術社會學
sociology of art(영)
예술의 창조나 대중에 의한 향수의 연구를 통해서 사회 기구의 인식을 목표로 하는 사회학의 한 부문. 어떤 예술현상을 사회 현상의 하나로 간주하며, 특히 사회 내의 일정한 계급이나 집단과의 관련을 전제로 한다. 예술은 예술 내적인 여러가지 인자에 의해서 규정되나 동시에 표현이나 전달의 기능에 의해 사회에 작용하므로 이러한 예술과 사회와의 관련성에 대한 해명이나 규명은 예술학의 영역인 동시에 사회학적인 연구도 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제2차세계대전을 경계로 하여 다소 그 양상을 달리 한다.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예술의 생산과 수용에 미치는 사회적 규정 작용을 해명하는 것이 주요한 이론적 관심사였지만, 전후에는 훨씬 구체적으로 예술이 발휘하는 사회적 기능의 갖가지 모습이 학문적 조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대체로 이러한 예술의 사회학적 연구에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의 구별에 관계없이, 기술의 발달이 물질적 생산량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교환되는 정보량도 비약적으로 증대시켜 결국에는 인간관계의 사회적 기초를 변혁시킴으로써 선진제국에 점차 대중사회를 성립시키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즉 기술문명이 낳은 사회적 모순들에 직면하여 전후의 미학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관계없이,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의 진보가 예술 그 자체의 성격을 변질시켜, 예컨대 대중예술과 같은 것이 사회생활 속에서 점차로 발언력을 강화해가고 있다는 사실도 예술사회학을 기대의 급선무로 간주하는 일부 미학자들의 동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텐느Taine, 귀요Guyau 등이 예술사회학적 입장에 속하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하우젠슈타인Hausenstein에 이르러 비로소 예술사회학이라는 명칭과 그 입장이 명확해졌다. 프리체 등이 이 분야에서 활약하였지만 이들은 도식주의적인 견지를 취했다 하여 비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