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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적 추상

유기체적 추상 有機體的抽象
organic abstraction(영)

추상*은 기본적인 양식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기하학적이거나 하드엣지* 같은 이성적인 추상으로 구축주의*나 구체미술*과 같은 미술운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유기체적(organic)’인 양식으로 알려진 보다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추상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추상 작품은 꽃의 형태나 남성과 여성의 성기(性器) 및 다른 생명체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생물 형태적(biomorphic)’ 추상이라고도 불린다. ‘유기체적 추상’을 행한 대표적인 사조로는 독일 표현주의* 중 청기사파* 화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의 작품들과 추상표현주의*를 꼽을 수 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é d’Habitation(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설계하여 건축한 마르세유에 있는 건축물.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이 건물은 1920년대 건축의 평평한 건물 표면의 미적 특성을 거친 시적 표면 특성을 지닌 ‘베통 브뤼(béton brut, 노출 콘크리트)’로 대치함으로써 새로운 건축 개념을 제시한 건물이었다. 이것은 또한 미래사회에 대한 르 코르뷔지에의 비전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 반면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그 자체상의 모습으로만 고찰된다면 그 요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도시 주변이 급속히 개발되어지는 대도시의 경우,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고층집합주거 블록을 건설하는 것이 적절한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대담성은 한 지붕 밑에 1,600명을 수용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인 기능 수행이라는 점에 있는데, 이 주거단위의 가장 흥미로운 시도는 구매시설을 가로나 지상면에 설치하지 않고 그 건물의 중앙층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보면 이 중앙상가는 2층 높이의 수직 루버에 의해 그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루버는 건물의 중앙부에 있는 계단실에 수직으로 나란히 있는 네모창과 함께 건물외관 전체에 활기를 주면서 스케일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17층에는 150인용의 육아실이 설치되어 있고 하나의 램프가 옥상 테라스에 직접 통해 있다. 거기에는 필로티* 위에 만들어진 휴식실이나 얕은 풀 등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는 여러 가지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24×165m의 넓이를 가진 옥상 테라스의 다른 부분은 성인의 사회활동을 위해 계획되어 있다. 일부 옥외 체육관이 있고 건물의 북쪽 단부에는 강한 북풍을 막기 위해 큰 장벽이 있으며, 이것은 야외 연극 공연때에는 배경이 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 건물의 특이하고 훌륭한 점은 설계기본 모듈을 사용한 그 조형적 특질에 있다. 르 코르뷔지에에 의해 노출콘크리트, 즉 베통 브뤼의 무정형적인 재료는 천연의 암석같은 특색을 갖게 되었다. 그가 이 건물의 개관사에서 ‘이 건물은 모든 부분이 일치해서 외치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콘크리트 형틀작업의 흔적이나 예기치 않은 흠, 조악한 작업솜씨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그 표면을 평활하게 손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콘크리트면에 생기를 주기 위해서 거푸집 그대로의 흔적을 그냥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우처럼 철근콘크리트가 자연석이나 목재나 테라코타*와 같은 자연재료에 비견될 만큼 그 질감을 살려서 철저히 사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수년 후 영국에서 이런 접근방법을 출발점으로 한 브루탈리즘*이라 부르는 건축적 경향이 일게 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의 현대건축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니트 원

유니트 원 Unit One(영)

1933년에 내시Paul Nash(1889~1946)에 의해 결성된 영국의 전위예술가 그룹. 건축가, 화가, 조각가 등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영국에 진정한 현대 미술을 보급할 의도를 가진 예술가들이 모여 1934년 런던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그룹에는 공통된 하나의 미학 지지자들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모인 장소라 말할 수 있다. 비평가 리드Herbert Read(1893~1968)가 그 이론적인 추진자로, 그는 예술가란 종래의 좁은 껍질 속에 갇히는 일 없이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제작해야 한다고 이 그룹의 입장을 대변했다. 즉 영국의 지리적 조건에서 보아도, 유럽 및 미국의 전위 운동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브리티시 카운슬British Council’이 1934년에 설립되었다.
1948년의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의 유럽 순회전은 이것의 성과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터너William Turner(1775~1851) 이후 약 1세기 동안 고립되어 있던 영국은 예술의 국제적인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11명의 멤버는 화가 내시, 니콜슨Ben Nicholson, 워즈워드Edward Wardsworth, 버러Edward Burra, 암스트롱John Armstrong, 헬리어Tristan Hellier, 존 빅John Bigge과 조각가 무어Henry Moore, 헤프워드Barbara Hepworth, 그리고 건축가 코츠Wells Coates, 루카스Colin Lucas였다. 유니트 원은 추상의 추종자들과 펜로즈Roland Penrose의 노력 덕택으로 런던에 알려지기 시작한 일군의 초현실주의 지지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로 인해 일년 쯤 지나 스스로 와해된다. 비록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유니트 원의 활동은 세계 대전 이전 영국의 미술계에서 급진적인 반(反)아카데미즘의 출현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유리질화

유리질화 琉璃質化 vitrification(영)

도자기 태토가 유리질로 되는 것. 한두 가지 물질을 녹는 점까지 열을 가한 다음 물이나 땅 속에 넣어 식힐 때 유리질화하는 것으로, ‘Fritting’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독성이 있는 납을 무독성으로 만드는 중요한 처리과정이지만, 유약을 마련하는 데에도 널리 사용한다.

유미주의

유미주의 唯美主義
Aestheticism(영) Esthétisme(프)

미(美)가 인생에 있어 가장 높은 단계의 것이라 하여 미를 위한 미,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입장. 미와 예술은 오직 자족적이며 자율적이고 자기 목적적으로서, 사회, 정치, 종교 등 어떤 기준들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탐미주의’라고도 하며 원리적으로는 순수주의에 통하는데 영국, 미국에서는 순수 미학, 순수 유미주의라고도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도 미를 예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귀족적인 유미주의의 실천이다.
부르주아적으로는 향락주의 생활 조건의 미화(美化)를 가리키며 종교적, 도피적이며 자연적 인간의 소박미에 안식과 구원을 구하는 것 등 일률적인 것이 아닌데, 인간이 노력할만한 최고 목적은 순수미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인상주의*, 상징주의*에서 볼 수 있는 세기말적, 악마적, 관능적 유미주의나, 와일드Oscar Wilde, 페이터Walter Pater 등과 같은 엑조틱한 것, 또는 북유럽 신화, 슬라브 정신, 켈트 정신과 결부된 민족적 신비주의 또는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심리적 상징주의 등도 포함된다.
미술에서는 날카로운 색채보다는 파스텔조의 음영을, 문학에서는 정확한 말의 사용보다는 암시적 사용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예술적 기준의 자율성은 미적 판단 기준을 도덕적 선이나 유용성, 그리고 쾌락으로부터 구별한 칸트Immanuel Kant에 의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이어 괴테Goethe, 쉴러Friedrich Schiller, 셸링Friedrich Schelling과 영국의 콜리지, 카알라일Thomas Carlyle, 미국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포Edgar Allan Poe 등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소개, 강조되었다. 에머슨은 그의 시 <로도라Rhodora>에서 ‘눈이 보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아름다움이란 있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스탈 부인, 철학자 빅토르 쿠쟁V. Cousin과 그 제자 테오필 주프로아가 있다. 쿠쟁은 소르본 대학에서 진, 선, 미에 대한 강의(1818년, 출판은 1836년)를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티에Théphile Gautier는 《모펭양》(1835) 서문에서 ‘예술이란 그 미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더라도 미적인 것 외에 여하한 가치를 위해 진력해서는 안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보들레르C. Baudelaire로부터 말라르메Stéphane Malarmé에 이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역시 의도적으로 미적 가치를 중시했다. 그렇지만 보들레르는 ‘도덕을 벗어나는 데 있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유치한 유토피아적 이상’에 반대했다. 공쿠르 형제Edmund & Jules de Goncourt들은 ‘회화란 눈과 감관(感官)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신경의 즐거움 그 너머의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1870~1880년대에는 라파엘전파*의 특정 요소들에 의해 고취된 초감수성이 페이터에 의해 공식적 재가를 얻었다. 그는 《르네상스*》(1873)의 결론에서 ‘시적 열정, 미에의 열망,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사랑’ 등 감수성을 고취시켰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1891) 역시 미적 체험의 우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반동은 모리스William Morris와 레다비William Richard Lethaby의 공예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러스킨John Ruskin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난 예술에 반대했으며, 휘슬러James Whistler(1834~1903)와의 예술지상주의에 관한 논쟁은 유명하다. 이어서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도덕 기준과 일상인으로부터 유리된 이른바 순수 미술을반박하였다.
예술이 종교나 정치, 사회 등 어떠한 다른 동기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편향성은, 시각 예술의 가치를 그 형식적 속성에 두는 클라이브 벨Clive Bell이 주장한 ‘형식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에서 그 잔영이 엿보이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거의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미적 기준이 자율적이며 아름다운 예술의 창조 및 감상은 자기 보상적 행위라는, 보다 완화된 형태의 유미주의는 20세기 미학적 견해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유보

유보 遺寶 klad(러)

구소련 고고학에서 주인이 숨겨 놓은 물품을 뜻하는 말. 대개의 경우, 이 유보는 땅 속에 묻혀 있다. 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 시대에는 의식용, 무기, 장신구 등이, 철기 시대에는 주로 귀금속이나 보석, 화폐 등이 은닉 대상이었다. 사회적으로 큰 변란이 있을 경우에 자주 나타나며, 러시아에서는 1230~1240년대 몽골 침입기나 17세기 대혼란시대의 것이 특히 많다.

유사

유사 類似 similarity(영)

조형의 모티브*에서 서로 비슷한 것의 차이가 작아지면 동등하게 되는데, 이 동등 또는 동등에 가까운 관계를 유사라고 한다. 유사의 반대 개념이 대조*이다.

유스턴 로드파

유스턴 로드파 Euston Road School(영)

영국에서 일어난 화파. 1937년에 성립되어 1939년까지 존속했다. 이 화파는 ‘유스턴 로드 그룹Euston Road Group’으로 알려진 일군의 화가들에 의해 결성된 것으로, 주요 멤버는 로저스Claude Rogers, 벨Graham Bell, 패스모어Victor Pasmore, 콜드스트림William Coldstream 등이었다. 이 그룹은 당시 서구 추상미술*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대한 반동적 입장에서 결성되었으며, 여기에 속한 작가들은 이전에는 추상화를 실험했지만 이 운동을 계기로 서정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화풍으로 돌아섰고, 예술가의 자연에 대한 객관적 관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들은 추상을 주장하는 모더니스트의 이론들과 초현실주의를 다같이 배격하고, 보다 친근한 주제들, 즉 풍경이라든가, 정물, 초상화, 그리고 누드화 등으로 화제(畵題)를 옮겨갔다. 특히 이들은 자연의 접근에서 무엇보다도 구도를 강조함으로써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의 뒤를 이었다. 유스턴 로드의 화가들은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지만, 결국 그들의 실험은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유약

유약 釉藥 glaze(영)

①도자기의 표면에 덧씌워 광택과 무늬를 아름답게 하는 유리같은 분말의 약품. 잿물, 도자기를 구울 때 덧씌우는 약으로 단순히 유(釉)라고도 한다. 바탕의 흡수성을 없애고 도자기 자체의 강도를 늘리며 기면을 광택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소성화도(燒成火度)에 희한 고화도유와 저화도유, 외관에 따라 투명유와 불투명유, 성분에 따라 철유(鐵釉), 동유(銅釉), 연유(鉛釉), 장석유(長石釉), 회유(灰釉), 소다유 등으로 분류된다. 규산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이고 거기에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이 첨가되며 종류에 따라 연(鉛), 아연 등이 사용된다.
고대 자기의 유약은 소다유(알칼리유*), 연유, 회유의 3종으로 대별된다. 소다유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고, 그 후 서아시아와 로마에서 사용된 바 있으며 이슬람 도기에 많이 쓰였다. 연유는 중국 전국시대와 한漢나라 이후에 성행하였다.
유약의 색조는 함유하고 있는 금속의 종류와 양, 소성할 때 환원염(還元焰), 산화염(酸化焰), 중성염(中性焰) 및 용제(溶劑)의 성질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한다. 유약 및 금속으로서 철이 색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여 청자유, 흑유, 황유 등이 되고, 동(銅)은 녹유(綠釉)와 홍유(紅釉, 長砂, 桃花紅, 牛血紅) 및 소다유의 청유(靑釉), 망간은 자유(紫釉), 흑유(黑釉), 코발트는 남유(藍釉, 唐藍釉, 瑠璃釉)가 된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에 걸쳐서 이슬람 세계에서 예부터 쓰인 석유(錫釉) 도기가 유행했다. 스페인의 이스파노모레스크, 이탈리아의 마용리카, 프랑스나 독일의 파이앙스, 네덜란드의 델프트, 영국의 잉글리시 델프트 등이 모두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 말기부터 17, 18세기의 독일 라인 지방에서는 소성 중에 식염을 투입하는 식염유를 바른 석기가 다량으로 구워졌다. 회유는 나무재나 석회를 용제로 하고, 1,200도 이상의 고온에 녹기 때문에 내열성이 뛰어나 중국에서는 자연유로부터 발달하여 자기의 유약으로 보급되어 왔다.
②서양 회화에 나타나는 그림의 기법적인 용어. 색채나 바탕 위에 바른 또다른 색조풍. 그림물감은 혼색하면 뒤로 후퇴하는 반면에 유약을 바른 색채는 앞으로 드러나듯이 보인다. 많은 화가들이 유약을 여러 번 덧칠하는데,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가 특히 이 방법을 애용하였다. 티치아노Tiziano(1485~1576)와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의 그림에서 의상의 화려한 심홍색은 불투명한 밑그림의 심홍색에 유약을 바른 것이다. 19세기에는 유약을 거의 바르지 않는 그림을 선호한 까닭에 유약이 쓰이지 않았다. 19세기의 와니스 유약은 불완전한 부분을 감추고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었던 색채의 눈속임식 조화를 그림에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터너William Turner(1775~1851)가 빛과 대기의 효과를 그리고자 했을 때, 그는 유화에 수채화의 기법을 원용하였다. 그 때 밝은 바탕 위에 투명한 유약이나 밝은 그림물감으로 된 얇은 층을 주로 사용했다.

유엽묘

유엽묘 柳葉描

→ ‘인물십팔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