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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

잡화 雜畵

동양화에서 회화*를 분류한 13과(科) 외의 회화류. 남송南宋의 등춘鄧椿(덩 추운)의 《화계》 권7에 ‘소경잡화(小景雜畵)’라는 말이 최초로 보인다. 말 그대로 인물화*, 화조화*, 산수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다한 그림을 가리킨다.

장 章

→ 인장

장강만리도

장강만리도 長江萬里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장강도(長江圖)’라고도 한다. 장강은 양자강揚子江을 말하고, 청해성淸海省 서남쪽 경계에서 시작하여 강소성江蘇省 동쪽을 지나 동지나해로 흘러 간다. 전체 길이가 5,800km로 아시아 제일의 강이다. 양자강 유역은 예부터 땅이 기름지고 풍광이 좋아, 그 경관을 장권(長卷)으로 그린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명대(明代)의 하규夏珪(시안 꾸에이)가 그린 <장강만리도>(대북 고궁박물원)가 있고, 청대(淸代)의 이세탁李世倬(리 스주어, ?~1770)의 <장강만리도권長江萬里圖卷>이 있다. 현대에는 1968년에 제작된 장대천張大千(즈앙 따지엔)의 <장강만리長江萬里>(대북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장곡천파

장곡천파 長谷川派

→ 운코쿠파

장르

장르 genre(영, 프)

예술의 종류를 의미하는 개념. 문학이나 미술 분야에서 문체, 양식과 같은 뜻으로 다룰 때도 있다. 미술에서는 일정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그리는 회화를 장르화, 풍속화*, 세태화 등으로 이름한다. 일반적으로는 일정한 작품군이 외형, 내용, 표현 대상, 표현 태도 등에 관하여 공통의 특질을 지니며, 하나의 유형을 이룰 때 이를 장르라고 한다.
또한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회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애호되었던 주제들을 다룬 회화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와틀레와 같은 비평가들에 의해, 꽃이나 동물 같은 유형의 회화나 어느 특수한 분야의 전문적인 화가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1769년 프랑스 아카데미*가 그뢰즈Jean-Baptiste Greuze(1725~1805)를 ‘장르 화가’로 인정했고 그의 작품은 그가 유행시켰던 중류 계층의 ‘도덕적’ 주제를 다룬 회화로 이해되었다. 이미 풍경화*나 정물화*처럼 다른 전문화들은 고유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용어는 그 밖의 달리 분류될 수 없었던 회화를 가리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용어는 추수하는 장면이 그려진 이집트 무덤 벽화나 그리스 항아리에 있는 운동 경기 장면, 나그네나 양치기들이 그려진 중국의 족자, 그리고 사회주의 사실주의*에서의 승리에 찬 트랙터 운전사 등 이질적인 대상들을 ‘장르’로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만 이 용어의 기원에 주목하여, 특정 유형에 국한시켜 사용하는 것이 보다 의미있을 것이다.
장르화는 로마시대의 남부 이탈리아 회화에서 유행했는데, 이들은 귀족들의 삶과 서민 생활, 가정 생활과 시장, 거리, 극장 등을 모두 다루었으며, 장르화의 대중적 형태는 벽화* 및 패널화 그리고 모자이크*로 표현되었다. 그 후 유럽 회화사에서 장르는 오랫동안 아카데미 비평가들에 의해 빈축을 샀다.
‘장르’는 18세기 무렵 에르트센Pieter Aertsen에서 라에르Pieter van Laer에 이르는 네덜란드의 농부 화가들을 가리키는 낮은 개념의 명칭으로 간주되었다. 이탈리아 회화는 전통적으로 영웅적 내용에 관한 종교적, 역사적 주제에 탁월성을 보여 왔던 반면에 사소하거나 하찮은 주제는 피해 왔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목가적 연주회나 화장하는 여인들을 다루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그림들 역시 대개 종교적이거나 우화적인 주제와 결합되게 마련이었으며 16세기말 카라치Annibale Carraci(1560~1609)와 카라밧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에 의한 새로운 장르의 유입 역시 북유럽의 도전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에 반해, 일상 생활의 현실 장면들에 대한 북유럽 미술의 편애 성향은 중세의 전통에로 수급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현실적(realistic)’이라는 용어는 문학이나 미술에 있어서, 현실 생활에 대한 과학적 관심도, 혹은 후에 ‘사회적 리얼리즘’이라고 알려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익살스러운 시골뜨기’를 재미의 대상으로 삼고 오직 궁정만이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장소라고 여겼던 군주나 봉건 영주의 유머러스한 초연함이었던 것이다.
중세 후기, 고딕* 화가들의 회화적 사실주의와 교훈적 전통이 결합된 작품으로는 보슈Hieronymus Bosch(1450~1516)의 그림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특수한 장르에 대해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최초의 ‘전문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수수께끼같은 많은 작품들은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상징하기 위해 농부나 영락한 인간들을 다룬, 하나의 풍자적인 설교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 후 종교개혁*으로 인해 종교화의 특권이 박탈됨에 따라 화가들은 초상화*에서 벗어나 대가의 예술적인 기교를 응용할 수 있었으며, 브뤼겔Pieter Bruegel(c.1525~1569)은 보슈의 기묘한 형태를 일상적 삶의 모습들로 바꾸어 현실적인 농가의 장면들을 다루었다. 장르의 영역은 점차 넓어져서, 17세기 네덜란드의 장르의 역사는 이른바 네덜란드의 회화사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의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카라밧지오나 프랑스의 르 냉Le Nain 형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네덜란드의 삶의 즐거움을 보여 주는 장르화의 풍부함과는 달리, 아직 종교화에 머물러 있거나 완고한 농부의 상을 그리는데 그치고 있다.
18세기초 네덜란드의 트루스트Cornelius Troost에 의해 풍자적인 장르화가 부흥되며, 영국에서는 호가드William Hogarth(1697~1764)에 의해 새로운 유형의 도덕적인 주제가 탄생된다. 한편, 감상적 교훈조의 ‘장르’를 도입한 그뢰즈는 장르 개념의 기원을 환기시켰다.
19세기 윌키David Wilkie 등의 일화적인 그림은 정감적이며 은밀하기도 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인데 대부분 놀라운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일화적 묘사와 대조적으로 밀레Jean François Millet와 쿠르베 등은 농부나 노동자의 표상을 새로운 영웅적 면모로 제시했다. 이러한 당대의 삶의 반영이라는 요청은 콩쿠르 형제 등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일본의 우키요에*와 함께 인상주의*를 낳는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시커트Walter Sickert가 장르의 대가로서, 나이트Laura Knight부인은 서커스 장르화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 다음 세대에 와서는 잭 스미스Jack Smith 및 존 브래트비John Bratby의 ‘키친 싱크’파 등이 두드러지고 있다. 19세기 말 이후 장르에 있어서의 중대한 발전은 영화 예술에서 행해지고 있다.

장명등

장명등 長明燈

장명등은 묘역에 불을 밝히는 등(燈)이며, 모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를 상징한다. 조선시대에는 일품(一品)이상의 재상(宰相)의 묘에만 설치할 수 있어서 결국 피장자(被葬者)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물이 되었다. 불을 밝힐 수 있는 장명등의 화창(火窓)부분에 초기에는 실제로 기름잔을 놓아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하였으나 후기에는 형식적인 장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장명등의 구성은 받침대와 몸체 부분, 지붕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벽화

장벽화 障壁畵

일본의 성이나 사찰, 또는 귀족들의 대규모 주거건물의 내부를 칸막이하는 데 사용한 후스마(襖) 문이나 병풍 등에 그린 그림. 일명 ‘장병화(障屛畵)’라고도 한다. 장벽화는 넓은 실내 공간을 필요에 따라 크게 또는 작게 칸막이할 수 있는 일본 건축의 특수한 구조의 산물로 어두운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해서 주로 금, 은박이나 금, 은니*를 사용하였다. 밝고 화려한 색채를 두껍게 칠하는 특수한 장식기법을 사용하였으며 강한 필치에 금니를 섞은 선염의 수묵화* 기법도 구사하였다. 장벽화는 주로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의 모모야마(桃山)와 에도(江戶) 시대에 크게 성행하였으며 그 화파로는 가노파*狩野派가 대표적이다.

장병화

장병화 障屛畵

→ 장벽화

장서표

장서표 藏書票 ex libris(라)

‘책에서’라는 뜻으로, 상징적 형상을 본뜬 그림에 그 서적의 소유자 이름, 문장 등을 찍어 넣은 종이 쪽지. 보통 표지 안쪽에 붙인다. 대개 명함 크기의 종이에 목판, 동판으로 인쇄한 것이 많은데,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는 저명한 화가들이 직접 그린 것들이 많다.

장소 특수성

장소 특수성 場所特殊性
site-specific(영)

장소 특수성이라는 개념을 개진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인물은 스미슨Robert Smithson(1938~1973)이다. 그는 특정한 장소의 위치인 ‘site’와 그로부터 옮겨진 물질이나 사진, 지도, 관련된 기록의 형식으로 화랑 내에서의 ‘site’의 재현인 ‘non-site’라는 개념을 창출했다. 그가 말하는 site와 non-site는 여러 가지의 대립점을 갖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site가 한계가 없이 열려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면 non-site는 닫힌 한계를 말하며, site가 지점의 연속이라면, non-site는 물질의 배열을, 그리고 site가 바깥 좌표를 말한다면 non-site는 내부의 좌표를, site가 삭감을 의미한다면 non-site는 더함을, site가 비결정적 확실성을 뜻한다면 non-site는 결정적 확실성을, site가 산재된 정보를 뜻한다면 non-site는 포함된 정보를, 또한 site가 반사됨을 의미한다면 non-site는 거울을, site가 가장자리의 의미를 가진다면 non-site는 중심을, site가 물질적인 특정 장소를 지칭한다면 non-site는 추상적인 비(非)장소를 뜻하고, site가 다수의 것을 뜻한다면 non-site는 하나임을 뜻한다.
스미슨을 비롯한 하이저Michael Heizer, 홀트Nancy Holt, 터렐James Turell, 드 마리아Walter de Maria 등의 작품 행위가 실제 장소에서 행해진 반면, 그들의 작품이 화랑 시스템에 의존되어 남는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구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site가 물질의 근원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라면, non-site는 관객이 화랑에서 우연히 접하는 ‘재발견된 물질’인 것이다.
장소 특수성은 작품이 설치된 환경과 합치되면서 현대미술과 알레고리*간의 연계성을 갖는 것이며, 1960년대에 그저 바라다본다는 의미에서의 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작품을 창출하는 적극적인 개입자로서의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환경(environment)’으로서의 미술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특정한 장소에 설치된 작품은 일정 기간 일시적으로 존재하는데, 그것은 작품의 우연성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 이러한 작품들의 대부분은 해체될 우려는 희박하며 단순히 자연에 내맡겨진다.
스미슨의 작품이 침식되고 풍화되어 궁극적으로 자연에 순치되는 힘을 작품의 일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시성, 또는 모든 현상들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또한 일시적인 까닭에 이러한 작품들이 사진(non-site)으로서만 남겨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결정적으로 사진의 알레고리적인 잠재력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때때로 선사시대의 거대한 기념비를 갈구하는데, 스톤헨지(stonehenge)와 나즈카 라인(nazca lines) 등과 같은 것이 그 원형으로 꼽힌다.
1970년 스미슨이 미국의 ‘대염호The Great Salt Lake’에 설치한 <소용돌이 방파제Spiral Jetty>와 같은 작품의 내용은 종종 신화적인 색채를 띤다. 작품이 설치된 위치(site)를 읽어내는데 몰입하는 경향을 예시하는 이러한 작품에서는 위치의 지형적 특성과 아울러 심리적인 여운까지 동원된다. 작품과 설치된 장소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 내에서 유지된다. 여기에서 site는 환경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고도 고고학적인 흥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장소 특수성은 단순하게 작품이 특정한 장소에서 발견될 수 있다거나 또는 바로 작품이 장소 자체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작품이 마치 어떠한 것으로 보인다거나 작품이 실현되는 공간의 배치에 폭넓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동일한 대상들이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배치되었다면, 그것들이 별개의 서로 다른 작품의 성격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것이다. 그것은 작품이 계산된 장소를 점유한다기보다는 작품이 실제적으로 장소를 구성한다는 설치(installation)나 배치(display)의 전시적 규범의 확대를 가져온다. 1970년대 이후 미술가들은 단순한 장소로서 화랑 그 자체를 이용할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익명적인 문화적 장소인 화랑을 특정한 문화적 유형을 갖는 공간으로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