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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大篆
소전*(小篆)과 대칭되는 서체. 넓은 의미에서는 소전 이전의 글자체 전체를 가리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주문*(籒文) 및 전국(戰國)시대에 통용되었던 육국문자(六國文字)를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주문만을 가리킨다.
→ ‘주문’ 참조
대족석굴 大足石窟 Dazu shiku(중)
중국의 불교석굴. 사천성四川省 대족현大足縣 현성의 전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북산, 보정산, 남산, 석문산, 묘고산 등 대략 10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북산과 보정산의 마애조상이 가장 유명하며, 만당(晩唐), 오대(五代)에서 남송대(南宋代)에 이르기까지 석굴의 발전된 면모를 볼 수 있다.
북산 마애불군은 현성 북쪽 2.5㎞의 북산에 있으며, 1950년에 조사되었다. 불감*(佛龕) 290개소, 3,000여구의 조상이 있다. 당唐 건녕 2년(895)에 창주자사(昌州刺史) 위군정韋君靖이 불상을 제작한 것이 시초이며, 남북 약 250m에 당, 송(唐宋)시대의 석굴이 있고 그 중에도 만당기(晩唐期)의 정토변상감과 송대의 심신차굴(心神車窟)이 주목된다.
이어서 만든 것이 북탑파의 마애군인데, 전방에 서 있는 송대 말기의 다보탑은 8각12층의 전탑이고 탑 꼭대기에 청좌(請座)와 복발*(覆鉢)이 있으나 상륜(相輪)은 없고, 높이는 40m, 일층의 한변이 약 5m이다. 안벽에 남송南宋 소흥 연간(1131~1162)의 불상, 석각 100점, 제6층에는 송대의 부문각직학사(敷文閣直學士) 빙씨일족(憑氏一族) 10여인의 공양상이 있다. 대불만(大佛灣)의 마애군(磨崖群)은 규모가 장대하고 남북 양안에 걸쳐 비로동(毘盧洞)과 원각동(圓覺洞)의 2석굴과 다수의 마애불로 되어 있다. 제20호 마애의 지옥변상 부조는 중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예이다.
대좌 臺座
상을 안치하기 위한 대(臺). 불교조각의 대는 단순한 받침대만이 아니라 불상*의 장엄구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불상을 제작할 때에는 불신(佛身)을 반드시 대좌에 안치한다. 32길상 80종호에는 대좌에 관한 설명이 없어 그 기원과 전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원래는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불도(佛道)를 깨달았을 때 앉았던 풀방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 자리를 금강좌(金剛座)라고 한다.
대좌는 불상의 종류, 시대 또는 재질에 따라 형태가 다양한데, 연꽃을 본뜬 연화좌(蓮華座)와 방형(方形)에서 발달한 수미좌(須彌座), 상현좌(裳懸座), 운좌(雲座), 생령좌(生靈座) 등이 있다. 연화좌는 불, 보살을 비롯한 여러 불상에 널리 사용되나 사자좌는 여래상에만 쓰인다. 상현좌는 결가부좌한 불상이 입고 있는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은 형상인데, 인도 간다라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특히 중국화하는 과정에서 옷주름이 강조되면서 나타난 형식이다. 생령좌는 천인부터 아귀축생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대좌로 한 형식이다. 이는 옳지 않은 생령을 힘으로 항복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그 밖에 원형대좌(圓形臺座), 의좌(倚座) 등이 있다.
대중문화 popular culture(영)
서구의 대중 민주주의와 관련,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 출판사, 레코드 회사, 영화사, 공공 박물관, 중계소, 여행사 등을 통하여 구성된 문화. ‘매스 컬처(mass culture)’라고도 불리지만, ‘대중 문화’가 더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영화, 재즈, 팝 음악, 라디오, 광고, 만화, 텔레비전 등 수많은 형태의 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형성되는 대중문화는 19세기에 서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탄생한 모더니즘*적인 현상이다.
한편으로 대중문화는 증가하는 노동 생산성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 여가의 증대와 모든 사회 계층들에게 문화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상대적인 복지의 증대에서 기인하며,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더 이상 특정 계층의 이익이 되지 못하는 문화적 재화의 상품적 특성에 기인한다. 또 대중문화란 무엇보다 강력한 추세의 획일화와 정신적 수준의 하락을 통해서 특징지어진다. 시리즈로 된 기술적인 생산을 허용하는 대중문화의 공급은 표준화를 지향함으로써 국가적, 지역적인 차이나 특성도 점차적으로 균등하게 만든다. 거래상의 위험을 의미하는 새로운 것이나 신기한 것은 종종 배제되는 대신에 영화, 소설, 음반 등은 이미 시험된 상투적인 것으로 구성되기 쉽다.
아도르노Theodore W. Adorno, 뢰벤탈Löwenthal 등은 무엇보다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압도적인 여가와 인간 조직 속에서 대중 문화의 정치적 기능을 본다. 문화산업은 대리 충족을 만들어내고 일상에서의 도피를 조장하며 획일적 방식으로 교육하고 환상과 자발성을 위축시키며 기존의 지배 관계를 안정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술계 내부에서 살펴보면, 20세기 전반기 동안 고급미술과 대중미술을 가르는 벽은 매우 높았다. 현대미술은 스스로를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비판자이자 혁명자로서 간주하였다. 또한 현대미술은 비타협적인 이상주의적 태도를 견지했고 매매가 어려운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반면에 대중문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했느냐 아니면 실패했느냐에 의해 규정됐다. 그러나 1960년 무렵 팝 아트*의 등장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미술은 20세기 중엽의 삶에서 매우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된 소비자 지향적 이미지로부터 더 이상 고립되지 않았다. 미술과 대중문화 간의 공생적인 관계는 1960년대의 팝 아트로부터 시작되었고, 1970년대의 개념미술*에 의해 개화(開花)됐다. 1970년대 후반기에 퍼포먼스* 예술가, 미디어 아트* 미술가, 그리고 비디오 아트* 작가들은 소프 오페라(soap opera), 이류 소설, 광고 같은 대중문화의 여러 형태를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대지미술 大地美術
Earth Art, Land Art(영)
1960년대 후반 영국과 독일, 특히 미국에서 성행했던 미술 경향. 그 용어는 대표적인 대지미술 작가인 스미슨Robert Smithson(1938~1973)이 소설가 앨디스Brian W. Aldiss의 동명(同名)의 과학소설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전람회의 이름에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대지미술은 1960년대의 두 가지 주요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미술의 상업화에 대한 반대와 당시에 부상한 환경운동에 대한 지지가 그것인데, 후자는 ‘땅으로 돌아가자(back-to-the-land)’라는 반도시화(反都市化)주의와 지구라는 혹성에 대한 정신적인 자세 등으로 나타났다. 대지미술가들의 폭넓은 방법과 목표는 다양한 예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손피스트Alan Sonfist(1946~ )는 도시의 현장을 조경하여 그 장소를 예전의 자연적 상태나 선사시대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시도했으며, 홀트Nancy Holt는 스톤헨지*를 연상시키는 천문학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건축적인 구조물을 세웠다. 하이저Michael Heizer와 스미슨은 고대의 무덤봉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지조각을 창조해 내기 위해, 미국 서부의 사막에서 수톤에 이르는 흙과 바위를 퍼냈다. 롱Richard Long(1945~ )은 그가 돌아다닌 자연 풍경과 도중에 그가 일시적으로 재배치한 바위와 꽃을 아름답게 구성된 사진 속에 담았다.
한편 대지미술은 작품과 그것을 보고 체험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생기는 관계에 주의를 환기했던 미니멀 아트*의 연극적인 측면이 화랑의 공간을 불만족스럽게 느꼈던 결과로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똑같은 발상에서 나온 해프닝*과 같은 관계를 지닌 채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장소와 규모 등이 갖는 특성 때문에 사진에 의한 도큐먼트(document)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대지미술 작품의 형태는 드디어 작품이라고 하는 형태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낱말, 문자, 사진 등에 의한 개념미술*이 전개되도록 했다.
대칭 對稱 symmetry(영)
균제(均齊), 상칭(相稱)이라고도 하며, 미술용어로는 좌우 대칭, 좌우 균제 따위로 불린다. 좌우 또는 상하로 동일한 형상의 상사(相似)형의 한 짝이라는 뜻이다. 중심점 또는 중심축을 둘러싼 여러 단위, 여러 부분이 양쪽으로 대응하고 있는, 물체의 구조 또는 배치를 말한다. 인체, 동식물, 기구(器具) 등에 그런 예가 많다. 대칭적인 미술은 보는 이에게 정지, 안정, 장중, 엄숙, 신비한 느낌을 주어 종교적인 목적이나 효과를 위한 회화와 조각에 많이 이용된다. 그러나 대칭을 기계적으로 남용하면 경직감을 낳고, 유기적인 생명감이 손상되는 단점도 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大韓民國美術展覽會
1949년부터 1981년까지 총 30회 동안 이어온 한국의 관전(官展). 약칭 ‘국전(國展)’이라고도 한다. 8•15 해방 직후 신진작가를 많이 배출하여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으며 한국 미술계의 역사와 영욕을 같이했다. 국전은 1947년 미군정청 문교부가 조선종합미술전을 개최한 것이 처음이었으며 1948년 정부수립 기념전을 계기로 정부가 주도하게 되었다.
정부는 문교부(현 문화관광부) 고시 제1호에 의해 기존에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鮮展)>의 규약을 모태로 국전제도를 규정했다. 초기에는 운영을 문교부에서 주관하고 심사위원 및 간사직에 문교부 공무원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철저한 정부 통제하에 있었으나, 그 뒤 주관부처가 문화공보부로 옮겨지고 심사위원장도 순수 미술인이 맡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이념아래 민족미술을 널리 알리고 능력있는 신인을 발굴한다는 취지 아래 실시된 국전은 실제로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일정하게 특선을 거듭하면 추천 작가로 승격시키고 심사위원이나 초대작가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러한 국전 경력은 학력에 상관없이 대학교수나 교사 채용의 자격으로서 문교부가 보장하는 등 관전체제가 갖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심사위원들 사이에 파벌이 생겨 심사과정에서 잦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반면 1970년대부터는 화단에서 비구상(非具象) 양식이 득세하고 신문사와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민전(民展)이 생겨났으며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작가들이 늘어나 국제전에 출품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짐에 따라 국제전의 참여경력이 중시되면서 이것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원로 작가들의 사망, 은퇴 등으로 심사위원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국전폐지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에 주관부처는 서울에서 전시하던 이전까지의 관례를 깨고 전국 순회전을 가짐으로써 관람객 확대를 꾀하고 일부 평론가 및 심사위원을 영입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으나 1981년 제30회를 끝으로 국전은 막을 내렸다. 이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大韓民國美術大展>이 열렸으며 이 전람회는 1986년부터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대혼점 大混點
동양화에서 타원형처럼 생긴 비교적 큰 점으로, 붓을 옆으로 뉘어서 혼란하게 찍는 기법. 무성한 여름 나뭇잎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며, 산의 표현에도 가끔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