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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파

분리파 分離派 Sezession(독)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일단의 미술가들이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전시(展示) 동인.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예술가협회 등의 기구 속에서는 작품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술가들이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별도로 자기들의 전람회를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창립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 이 명칭은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그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추구하고 고루한 사상을 답습하지 않는 작품의 제작이었다.
최초의 분리파는 1892년 폰 슈툭Franz von Stuck, 트뤼브너Wilhelm Trubner(1851~1917), 우데Fritz von Uhde(1848~1911)가 주도하는 뮌헨 분리파로서 제1회전에는 뵈클린Arnold Böcklin(1827~1901), 코로Camille Corot(1796~1875), 밀레Jean François Millet(1814~1875),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 등 외국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이후 1897년에는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를 회장으로 하는 비엔나 분리파가 탄생하였고 월간지 《성스러운 봄Ver Sacrum》을 출간하였다.
한편 1899년에는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작품 전시 거부를 계기로 리버만Max Liebermann(1847~1935)의 지도하에 베를린 분리파가 창설되었다. 인상주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던 베를린 분리파는 놀데Emil Nolde(1867~1956)와 펙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 등 표현주의* 화가의 출품거부가 원인이 되었다. 베를린 분리파는 1910년 재분열되어 신분리파가 조직되었고 여기에는 드레스덴의 다리파*와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화가들이 참가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분리파에는 특정한 예술 이념이나 양식은 없었지만, 예술 경향과 국적을 초월하여 전위미술*에도 관대히 문호를 개방했다는 점이 공통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 인상주의와 아르 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 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의 성과는 오히려 현대 건축과 공예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분리파는 영국의 미술과 공예 운동*,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과 더불어 근대 공예와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분본

분본 粉本

동양화에서 말하는 일종의 초벌그림 또는 밑그림으로 ‘화고(畵稿)’라고도 한다. 분본이란 명칭은 고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분필(粉筆)로 화고를 그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원래 당대(唐代)에 사용되었는데, 인물화*에 한하지 않고 산수화*, 화조화* 등에도 응용되어 사용되었다. 당대의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는 일찍이 대동전大同殿에 가릉강嘉陵江 300여리의 산수를 하루만에 그려 냈는데 현종玄宗이 그 형상들에 대해 묻자, “저는 분본이 없이 모두 마음 속에 새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원대(元代)의 하문언夏文彦(시아 원이앤)은 《도회보감圖繪寶鑒》에서 “옛 사람들의 화고를 일컬어 분본이라 한다”고 했다. 분본을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늘을 가지고 화고의 먹선을 따라 치밀하게 작은 구멍을 뚫고 분을 종이나 비단, 벽 위에 바른 후, 분점(粉點)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고의 뒷면에 백악(白堊)이나 토분(土粉)같은 것을 바른 후 비녀로 정면의 먹선을 따라 밑에 받친 다른 종이나 비단, 벽 위에 선을 새기고, 그런 뒤에 분자국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분청사기

분청사기 粉靑沙器

분장(粉粧)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인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를 줄인 말로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명명한 데서 유래되었다. 회청색의 그릇 표면에 백토를 입힌 것으로 청자*보다는 태토에 철분 함량이 적어 색이 밝고 유약도 희어서 밝은 회청색을 띤다. 중국의 분청자기는 북송北宋의 자주요*(磁州窯)가 유명한데, 분장한 태토 위에 각화문(刻花文), 철회문(鐵繪文) 등으로 대담하게 장식한 점이 특징이다.
한국의 초기 분청사기는 고려말 쇠퇴한 청자와 같이 불순물이 많은 짙은 쥐색의 태토에 탁한 회청색 등의 어두운 유약이 시유되었다. 고려말 이후 15세기 중반 세종대에 이르러 점차 유약과 태토에 불순물이 제거되고 15세기 중엽에 더욱 세련된다.
분청은 유약과 태토가 청자보다는 정선되었으나 백자*에는 못미치는 중간적인 자기이다. 백토를 분장하는 방법에 따라 백토를 상감하는 상감문(象嵌文), 도장으로 찍은 후 백토를 넣는 인화문(印花文), 백토 분장후 윤곽선을 긁어내는 조화문(雕花文), 백토 분장 후 배경을 긁어내는 박지문(剝地紋), 철분의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철회문, 거친 붓으로 백토를 묻혀 그리는 귀얄문, 백토를 탄 물에 그릇을 덤벙 담그는 덤벙문의 7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분할주의

분할주의 分割主義
Divisionnisme(프, 이)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지 않고 작고 균일한 크기의 점묘(点描)로 원색을 화면에 직접 찍어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의 눈과 망막에서 혼색이 되도록 하는 신인상주의*의 회화 기법. 형태를 선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색조의 콘트라스트*로 파악하는 인상주의*의 점묘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는 것을 지양하고 순수한 빛을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과 화면은 미세한 점으로 분할되고 색채도 순수한 원색으로 분할되었다. 신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인 쇠라Georges Seurat(1859~1891)는 직관적인 인상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이론으로서 분할주의를 세우고 이를 체계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라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2년에 걸쳐 추구된 분할주의 이론의 형성과 완성과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평론가인 페네옹Félix Fénéon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색채를 본능적인 직관에 따라 분해한 데 반하여,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최대의 광휘성(光輝性)의 표현을 위해 색조를 의식적으로 과학적으로 분할한다고 주장하였다.
원색의 미세한 점으로 그려진 신인상주의 작품들은 점묘주의*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시냑Paul Signac(1863~1935)은 이 명칭을 거부하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주장하였다. 시냑에 의하면 분할주의는 미학적 이념의 표상이며, 점묘주의는 기법적 차원의 용어로서 규정되고 있다.
한편 또다른 의미의 분할주의로는 1891년 제1회 <트리엔날레 데 브레라Triennale de Brera> 전시회 때 등장한 이탈리아의 미술사조가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의 분할주의를 연상시키는 이 사조는 한편 상징적이고 사실적이면서 공상적인 사회적 주제도 역시 발전시켰다.
주요 분할주의 작가로는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1851~1899), 프레비아티Gaetano Previati, 볼페도Pellizza da Volpedo 등이 있으며 이들은 미술 혁신과는 별도로 주관적인 창작을 우위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투명한 신체를 환기시키는 운동 혹은 광선 미립자의 확산 작업을 하면서 미래주의*적인 추구를 선언하였다. 도시적이고 산업적인 리얼리티라는 새로운 테마를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분할주의는 1920년대 중반까지 발전을 계속해서 특히 카네갈로Sexto Canegallo에 이르러서는 옵 아트*를 예견하는 추상적인 그래피즘에 귀착하였다.

→ ‘점묘법’ ‘점묘주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