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영)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330년부터 시작되어 터키의 오토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방 기독교 사회에서 전개된 미술. 비잔틴은 콘스탄티노플의 옛이름 ‘비잔티온Byzantion’에서 나온 말로서 16세기 역사가들은 동로마 제국의 문화나 미술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다. 비잔틴 미술은 고대 로마 미술* 및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에 고대 아시아, 더 나아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이 가미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장장 11세기 동안 존속하면서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7세기 이후 점차 영토를 잃어갔다. 그러나 비잔틴 미술은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그 예술적 전통이 지속되었으며 러시아 등 슬라브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527~565)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던 때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로마 제국을 재건하여 비잔틴의 영광과 위대성을 찬미하는데 역점이 주어졌다.
두번째 황금기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기(867~1057)였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불렸던 당시에는 이슬람 예술의 소재가 풍미하였으며 고대의 유물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수용되었다. 11세기 중엽부터 서유럽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고 비잔틴에 대한 유럽 측의 공격도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쇠퇴하기는 커녕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으며, 바로 이 세번째 전성기가 비잔틴 르네상스 시기이다. 이 무렵 비잔틴의 국력은 최악에 달하였지만 예술은 오히려 베네치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비잔틴 미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강한 종교적 색채이다. 공예와 모자이크*화, 세속적인 그림 등 비종교적인 미술도 있었지만, 이는 기독교 미술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자유보다는 정통 교리와 교회의 강령에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비잔틴 미술은 신학적이었다.
즉 비잔틴 미술은 신학자들의 사상과 종교회의의 결정 사항들을 신자들에게 미술의 언어로써 가르치고 유포하기 위한 사명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비잔틴 미술은 익명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자연히 미술가의 역할은 사제의 그것과 유사하게 되었으며 교훈보다는 예배적인 기능이 더 강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비잔틴의 신학적인 미술은 본질적으로 중세 서양의 교훈적인 미술과는 차이가 있다.
비잔틴 미술 중 건축의 유적은 콘스탄티노플에만 남아 있으며 고대의 시공법을 채용한 절충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교회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4~6세기에는 거대한 바실리카*가 그리스와 로마 지역권에서 제작되었다. 6세기 이후 비잔틴 건축은 벽돌과 둥근 천장, 돔*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궁륭* 양식이 선호되었다. 성당 건축은 종교의식을 위한 기능적인 요소와 신의 집이라는 강한 상징성을 동시에 보유하였다. 바실리카식 구조에서 애프스*의 반원개(半圓蓋)와 집중식 구조에서의 원개는 신의 좌(座)로서 성스러운 천계를 상징한다. 콘스탄티노플에 소재한 소피아 성당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기술과 재력을 총결집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한편 건축을 장식하기 위하여 주두*나 원주*, 코니스* 등에는 평면적인 부조*가 조각되었다. 그러나 인물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으며, 성수(聖樹), 사자, 기하학 무늬 등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문양 뿐이었다. 이에 비해 색채에 의한 벽면 장식은 성상(聖像)이 주를 이루며 예수나 성모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도가 성당의 사방 벽면과 천장을 가득 채웠다. 소재로는 색유리를 사용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모자이크는 대형 기념물에 자주 사용되었고 프레스코화는 비잔틴 말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비잔틴 미술에서 화려한 색채는 현세를 초월하는 비물질적인 영적 세계를 가시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비잔틴 미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성상(聖像)의 표현이 예배 대상으로 될 수 있느냐의 여부와 관련된 우상파괴 논쟁이었다. 성상을 부정하는 움직임은 특히 8~9세기 성상파괴주의* 시대에 절정에 달하였고 숱한 기념물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성상을 긍정할 때조차도 삼차원의 실제성 부여가 완강히 거부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미술은 환조적인 성상 대신에 이콘의 발달을 보았던 것이다.
비잔틴의 도상은 고대 알렉산더 시대의 미술에서 차용하여 거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가하였다. 신자들을 교육하고 경전에 대한 시각적인 해설을 위해 신약과 구약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사본 삽화들이 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 비잔틴 제국은 퇴조하고 있었지만 비잔틴 미술은 오히려 서유럽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도상과 더불어 그 양식도 자유분방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차차 변해 갔다.
한편 비잔틴의 공예는 제국의 궁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하였다. 특히 상아로 제작된 인물상이 성당 장식품으로 유명했고, 금은 보석의 세공품과 칠보 제품도 애호되었다. 이외에도 모직물, 동방풍의 주단, 수예품은 비잔틴의 특산물로 손꼽혔다. 비잔틴 미술은 서구의 기독교 미술의 형성, 특히 건축과 도상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칸으로부터 슬라브 지역으로 퍼져나가 세르비아, 러시아 등지의 기독교 미술을 개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