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루리아 미술
에트루리아 미술 Etrurian Art(영)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이탈리아 중부 에트루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로마에 지배되기 이전의 에트루리아인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특히 미술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의 조형미술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 유럽어족의 침입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던 토착민이라는 설, 북방으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반도에 이주했다는 설, 소아시아 서부의 리디아인이 바다를 건너 이주해왔다는 설 등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토착적인 빌라노바 문화를 계승하였고 또 동방 및 그리스의 수준 높은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명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 또한 그리스 미술과는 이질적인, 다이내믹하고 표현적인 에트루리아 미술 고유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는 화려하면서 동시에 생동감과 현실감이 넘치고 신비감마저 감도는 특이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미술과의 관계나 다른 이탈리아 고대민족과의 교류, 에트루리아의 흥망성쇠나 각 도시국가의 독립적 성격 등으로 에트루리아 미술 자체의 연속적인 발전은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 미술과의 대응에 의해 기원전 8~6세기 중엽의 동방화 양식기, 기원전 6세기 중엽~5세기 중엽의 아르카익*기, 기원전 5세기 중엽~4세기 말의 클래식*기, 기원전 4세기 말~1세기 중엽의 헬레니즘*기 등 네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중 에트루리아 미술이 전성기를 이룬 시기는 아르카익기로서 정치 및 경제적 번영과 궤를 같이 한다. 클래식기의 성격이 불분명한 것에 반해 헬리니즘기에는 에트루리아 미술의 부흥을 보게 된다. 이는 헬레니즘 양식의 사실성과 파토스적 표현성이 에트루리아인의 미감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의 미술품은 일상적인 용도에 쓰이는 공예품이 많고 장인적 성격이 뚜렷하기 때문에 <베이오의 아폴론상>의 작가로 알려진 불카Vulca를 제외하고는 미술가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에트루리아인은 토목, 건축에 뛰어나 로마인에게 도시건설을 가르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에트루리아 도시건설의 대표적인 예는 정연한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볼로냐 근처의 마르차보토를 들 수 있다. 한편 건축 유적은 극히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데, 페루자의 마르치아문, 볼테라의 디아나문 등 성문(城門)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아치* 구조는 동방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퇴석법에 의한 아치구조의 원형을 체르베테리의 <레고리니가라시의 묘갱>, 베이오의 <칸파나의 묘>에서 응용하기 시작하여 위의 문들에 이르는 아름다운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궁륭 가구법(架構法)은 로마인들에게 계승되어 서양 건축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 자신의 유해가 안치된 장소에서 계속 산다는 내세관을 가졌으므로 분묘는 에트루리아 건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되었다. 바위를 깎아 주택을 본뜬 묘실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다듬은 돌들이 쌓여 원형이나 사각형의 방을 아치 또는 돔처럼 덮도록 된 분묘는 건축기술적으로 뿐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건축을 아는 데에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들의 신전은 그리스 신전과 달리 뒷면에 주랑이 없으며, 정면성이 중시되고 기대(基臺) 위에 세워졌다. 이런 특징은 로마의 신전건축에 계승되었다. 또 그리스에서는 일찍이 사라진 목조에 테라코타 장식을 하는 방법이 에트루리아 신전에서는 유지되었다.
한편 조각에 있어서 에트루리아인은 조각의 소재로 응회암(凝灰岩)이나 사암(砂岩), 앨러버스터 등 그 고장의 재료를 사용하고 대리석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트루리아 조각의 뛰어남은 석재 조각보다 테라코타나 청동 조각에서 볼 수 있다. 신전 지붕에 장식되었던 <베이오의 아폴론상>이나 <카피톨리노의 늑대> <부부상관(夫婦像棺)> <연설자> 등이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에트루리아 조각은 그리스 조각에 비해 평온하고 다이내믹한 표현, 비율에 개의치 않고 머리 부분에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동물, 사실(寫實), 특히 초상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조각 또한 분묘 미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헬레니즘기의 훌륭한 초상의 전통이 로마인에 의해 계승되었다.
에트루리아인은 회화를 건물의 장식으로 널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분묘 안의 벽화뿐이다. 이들은 대개 석벽에 밑바탕을 만들고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타르퀴니아에 있는 <새점쟁이의 묘> <사냥과 낚시의 묘> <암사자의 묘> 등의 뛰어난 벽화군도 아르카익기의 것이다. 이들 벽화에는 연회석이나 경기, 일상적인 정경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신화적 주제는 극히 드물다.
이에 비해 헬레니즘기의 것은 매우 신비로우며 명계(冥界)의 신이나 귀신이 그려지는 등 내세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 그리스 도기의 선묘화로부터 암시를 받아 남녀 인간상과 장식 문양을 흑, 백, 적, 황색 등으로 채색했다. 공예는 에트루리아인이 자랑할 만한 분야로서 금은세공, 청동 작품에 특히 훌륭한 것이 많다. 체르베테리에 있는 레골리니 갈라시의 묘에서 출토된 황금제 장신구, 청동제인 <피코로니의 키스타>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