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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모한

자가모한 jagamohan(범)

오리사 지역에서 힌두 사원*의 만다파*를 부르는 명칭이다.

→ ‘만다파’ ‘힌두 사원’ 참조

자기

자기 磁器
ci-qi(중) porcelain(영)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어 태토가 유리질화된 반투명체의 그릇. 자기화되기 이전의 도자기는 태토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석기(炻器)로 나뉜다. 토기는 유약*을 입히지 않고 700~1,000도에서 구워낸 선사시대의 그릇이다. 도기는 토기보다 단단하며 대개 유약을 입혀서 1,000~1,100도에서 구워낸 것으로 대개 물의 흡수율이 15% 이하이다. 붉은 화분이나 떡시루 및 청동기시대 민무늬 토기가 도기의 예이다. 석기는 1,200도 전후의 고온에서 구워내어 태토 속의 장석(長石)이 녹아서 유리질화되어 단단한 기벽을 만든 것이다. 물이 기벽으로 스며들지 않으나 아직 자기에 이르지는 못하며, 통일신라의 경질(硬質)토기를 들 수 있다.
자기는 태토로서 고령토*를 사용하고 고화도에서 구워내어 석기보다 더 유리질화되고 치밀하며 태토의 흡수량이 0.5% 이하인 그릇이다. 자기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생산하여 전세계에 널리 퍼져 ‘차이나(china)’라고 불렸다. 중국에서는 본격적인 자기가 대체로 성당(盛唐)시기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한국에서는 신라 말경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주로 ‘자기(瓷器)’로 표기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조선 이후에 ‘자기(磁器)’라고 많이 썼다. ‘자(瓷)’는 ‘견치(堅緻)한 도기(陶器)’란 뜻이며 한국에서는 ‘오지그릇’이란 의미로 광범위하게 쓰였다. 유럽에서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중국의 자기를 모방하여 고령토* 대신 석고와 골회(骨灰)를 사용하여 1707년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베트가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이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로 퍼져갔다.

자동기술법

자동기술법 自動記述法
automatisme(프)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무의식적 자동작용, 자동 묘법(自動描法)이라고도 한다.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20세기 미술 및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엄밀하게 《초현실주의 선언*》에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는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견 없이 행하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듯이, 의식 하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히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자연히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 또는 말은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의 초기에는 특히 ‘수면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자동기술법, 꿈의 기술, 영매술적(靈媒術的) 실험 등이 많이 행해졌다. 그들은 꿈과 우연, 원시적인 이야기 등에서 힌트를 얻어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자유로이 전개, 새로운 미의 세계를 펼쳐 예술계를 풍미했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에 의해 시작된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등도 자동기술법의 일종이며 오브제*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1930년경 이러한 비합리성의 강조란 결국 현실 도피의 데카당스, 독선적인 관념의 공전(空轉)에 빠질 뿐이라는 비난이 자체 내에서 일어났다. 그 후 자동기술법은 전용되어 마티에르*의 처리나 필세(筆勢)에 있어서 무의식적인 취급이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때, 그 우연의 효과를 가리키는 조형의 일반적인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또 숙련된 기술이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때에도 이 용어를 쓴다. 문학상에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등에 의해 시도된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도 이 자동기술법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자동파괴적 미술

자동파괴적 미술 自動破壞的美術
Auto-destructive Art(영)

메츠거Gustav Metzger가 1960년초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 그는 액션 페인팅*의 테크닉을 다소 변형시켜 캔버스와 물감 대신 나일론과 산(酸)을 사용함으로써 같은 시대의 팅겔리Jean Tinguely(1925~1991)의 자기 파괴적 기계와 그 개념이 비슷한 파괴적인 미술의 한 형태를 발전시켰다. 1961년 7월 3일 런던의 사우드 은행에서 실연하면서 메츠거는 나일론 천으로 된 시트에 산(酸)을 뿌렸다. 산은 즉각 나일론을 부식시켜 그 시트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급속하게 모양을 변화시켰다. 즉 그 작품은 자동 창조적인 동시에 자동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파괴를 이용한 것은 현대 여러나라에서 진전되고 있는 거대한 병기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자동 파괴적 미술이 인간의 공격성을 사회적으로 수용, 발산시킬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실주의

자본주의 사실주의 Capitalist Realism(영)

이 용어는 구동독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구서독의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다. 피셔-루엑Konard Fischer-Lueg, 폴케Sigmar Polke(1941~ ),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그림 및 그래픽은 현대의 인간성과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자본주의 사실주의는 1960년대 초기에 전개되었으며 팝 아트*의 독일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자연주의

자연주의 自然主義 naturalism(영)

자연 대상을 양식화하거나 그 관념적 표현을 행하지 않고, 보는 그대로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예술 제작 태도. 이 경우,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의 존재와 가치의 원리가 있기에 자연 대상의 미가 작품에 반영된다고 생각하고, 자연의 재현에는 필연적으로 자연미의 탐구와 존중이 들어 있다. 그 결과는 꼭 자연의 이상화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미추(美醜)를 불문하고 자연을 표현한다는 뜻에서 사실주의와 대립되는 지점도 있다. ‘자연주의 미학’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실증주의로부터 나타난 철학 이론에 적용되며, 에밀 졸라Emile Zola의 문학 이론에서 정점에 이른다.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 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한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1856)과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철학적 양상에 상응하는 예술적 양식이 사실주의*이다. 그것은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낭만주의*에 의해 조장된 개인적 감정의 득세에 의해 촉발되었다.
자연주의는 예술 비평에 있어서, 이집트의 예술과 같이 양식화되거나 ‘개념적인’ 예술과는 반대로 자연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의 유형을 지시할 때 쓰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의 고전기는 때로 최초의 ‘자연주의적’ 예술이라고 주장되기도 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은 자연주의의 부흥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러한 자연주의적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추구될 경우, 그것은 예술작품에 반영된 자연 대상의 아름다움이지 예술 작품 자체에 내재한 아름다움은 아니다. 예술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로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주의는 자연에 대한 이상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주의*’와 불일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정 화파와 연관지어 보면,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1672년 만프레디Bartolommeo Manfredi(c.1580~1620), 리베라José(Jusepe) de Ribera(1591~1652), 발렌틴, 혼도스트 등과 카라밧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의 제자 벨로리Giovani Pietro Bellori(c.1615~1695)였다. 충실하게 모사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자유구상

자유구상 自由具象 Figuration Libre(프)

1980년대 이래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의 구상회화를 일컫는 말. 자유구상은 당시의 지엽적인 구상회화의 양상 가운데 가장 활발한 움직임과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1980년대 프랑스 구상회화의 동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구상회화에로의 복귀를 유도해냈던 1980년대 상황 전반의 동시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의 분석적이면서 냉담한, 혹은 정체되어 있는 듯한 미니멀 아트* 및 개념미술*, 쉬포르 쉬르파스* 등의 추상회화에 대립하면서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주목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린다는 회화적 행위에 일차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었고, 이에 따라 주어지는 회화적 이미지와 그것이 회복시켜내는 서술적인 의미구조를 강조하는 일이었다. 회화적 기법 역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어 가장 소박한 차원의 소묘에서부터 이미지의 차용 및 모방, 사진의 사용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졌다.
물론 이같은 움직임은 대부분 젊은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가운데 몇몇은 1970년대의 미니멀 아트 계열의 추상회화를 체험한 바 있는 대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특별히 젊은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유발되고 진행되었던 ‘자유구상’의 부류는, 뒤늦게 구상으로 복귀한 대가들의 서정성에 비한다면 다분히 도발적이며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기법상으로 만화 및 각종 대중매체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즉각적인 표현성을 구사하거나, 저속하거나 유아적인 묘법을 자의적으로 자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1980년대 이후의 문화적 혼선의 모습을 반영하면서 하나의 문화적 기호물처럼 대입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자유구상은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나 독일의 신표현주의*, 그리고 뉴욕의 낙서미술* 등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 포함되어진다.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콩바스Robert Combas, 디 로사Di Rosa, 보아스롱François Boisrond, 블랑샤르Blanchard 등이 있다.

자이나교 미술

자이나교 미술 Jain Art(영)

마하비라Mahāvīra(기원전 599~527)가 창시한 인도의 자이나교에서는 카르마(karma, 業)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수행 방법은 엄격한 금욕과 고행이라고 믿고 있었다. 또한 자이나교는 신성(神性)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신상*(神像)이 필요 없었다. 그렇지만 자이나교의 신상도 불상*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5~8세기 자이나교는 시베탐바라Shvetambaras(흰옷을 입은 사람들)와 디감바라Digambaras(벌거벗은 사람들)의 두 종파로 나뉨에 따라 교의에 대한 해석과 도상*도 달라졌다. 즉 분파 이전의 자이나교 신상들은 모두 나체였으나 그 이후에는 시베탐바라파(派)의 상에 옷이 입혀졌다. 24명의 티르탕카라(tīrthankara, 지나*) 상들은 결가부좌한 자세와 팔과 다리를 똑바로 편 직립 자세의 두가지 형태가 있으며 각 상들의 지물*에 따라 구별이 가능하다. 자이나교 초기의 문헌들에서는 보관(寶冠)을 쓰고 장식물과 사자옷을 걸친 채 명상을 하고 있는 마하비라의 목조상이 그의 생전에 유행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 후에는 이 상을 모방하여 제작한 조각*상이나 주조*상들이 ‘지반타스와미(jīvantaswāmī)’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8세기경부터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24명의 지나에게 각각 그들의 신도와 교를 보호해주는 약샤*와 약시*들이 배당되었다. 그 중 리샤바나타Rishabhanatha와 차크레슈바리Chakresshvari, 네미나타Neminatha와 암비카Ambika, 파르슈바나타Parshvanatha와 파드마바티Padmavati, 마하비라와 시다이카Siddhayika는 특히 자이나교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자이나교의 경전을 도해(圖解)한 세밀화*들도 많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작품은 마하비라와 다른 지나들의 일대기인 〈칼파 수트라Kalpa sütra〉와 자이나교 승려인 칼라카의 이야기를 다룬 〈칼라카차리야카타Kālakācaryakathā〉이다.

자주요

자주요 磁州窯 ci-zhou-yao(중)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의 관대진觀臺鎭에 위치한 고대의 도요*. 송, 금, 원대(宋金元代)에 대중들이 선호한 민간자기를 제작하는 도요였다. 제작되는 도자기는 백유(白釉)가 많고 흑유(黑釉), 녹유(綠釉), 삼채(三彩)가 있다. 장식방법이 극도로 풍부해서 유약 아래 회화를 그리거나 음양각(陰陽刻) 또는 가채(加彩) 등이 다양했고 때로는 여러 종류의 방법을 결합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자주요의 독특한 박지*문양(剝地文樣)과 철회문양(鐵繪文樣)은 색깔 있는 바탕과 문양이 흰색과 검은색, 흰색과 갈색처럼 선명하고 강렬하게 색채 대비를 이루어 특징적이다. 또한 문양이 분방하고 소탈하여 호방한 풍격을 보여준다. 자주요는 당시 영향이 매우 커서 하남과 하북, 산서, 강서의 길주요*(吉州窯)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류의 도자기를 생산하여 자주요의 계통을 형성했다.

자타카

자타카 jātaka(범)

→ 본생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