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향토색
조선 향토색 朝鮮鄕土色
‘조선 향토색’이란 ‘조선 정조(情調)의 표현’으로 정의된다. 이는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의 아카데미즘이었다. 이 조선향토색 작품의 특징은 조선의 민속적인 소재들을 사용하거나, 문명발달 이전의 동양의 목가적인 산천과 그 속에서의 삶을 자연주의적인 형식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향토색’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향토 예술’에서 온 것으로, 이는 독일에서 19세기말에 벌어졌던 향토 예술 즉, ‘Heimatkunst’에서 온 용어이다. 이 용어는 1906년경 일본 문단에 수입되어 쓰여지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일제시대 다시 한국으로 수입되어 문단과 미술계에서 사용되었다.
식민지 시대 미술계에서는 1922년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가 탄생되어 1920년 중반이 되면 이 전람회 일본인 심사위원들에 의해 조선의 향토색을 그릴 것이 권장되어, ‘조선 향토색’은 아카데미즘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조선향토색이 아카데미즘화한 배경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였던 지방색, 동양풍의 유행과 일본인들의 이국취향, 그리고 한국의 농업과 농촌을 찬미하여 농업생산성을 높여서 이를 자신의 침략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일제의 중농주의 정책,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전 아시아가 하나되어 서구와 대항하자는 아세아주의와도 관련된다.
‘조선 향토색’의 영향력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정치적 상황과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경제적 상황 속에서 매우 광범위하여, 우리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민족주의에서 찾을 것인가, 사회주의에서 찾을 것인가, 아세아주의라는 국제주의에서 찾을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논의가 유발되었고, 그러한 작품이 시도되었다.
그 대표적인 논자는 김용준金瑢俊(1904~1967), 심영섭沈英燮, 오지호吳之湖(1905~1982)이다. 김용준과 심영섭 논의는, 당시 프로미술에 대한 반동으로서 그리고 당시의 아카데미즘에 반하여 제기된 것으로, 아세아주의를 토대로 ‘조선 향토색’을 추구하여 조선적 모더니즘*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갖고 있던 서양미술사에 대한 인식 부족과 일제의 탄압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이룩해내지는 못하였다. 오지호는 원색을 조선적인 색채라고 정의하고, 조선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할 것을 강조하여, 조선 향토색 표현에 있어 하나의 주요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리 화가들의 노력은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양식적인 공감대나 뚜렷한 성과물을 얻기 전에 사그라 들었고, 1930년 후반이 되면 조선미술전람회의 일본심사위원들은 향토색을 더욱 노골적으로 권장하여 이후 조선향토색은 화단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아카데미즘화한 조선향토색은, 해방 이후에도 국전*을 통해 계속적으로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에 우리나라가 급속하게 산업화됨으로써 도시민들에게 고향의 향수로 어필되어 계속적으로 존재가치를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박항섭朴恒燮, 박창돈, 유경채柳景採, 양달석梁達錫, 최영림崔榮林, 박상옥朴商玉, 박수근朴壽根 등이 있다. 이는 이후 1970년대까지도 우리 화단을 지배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존재하다가 1970년대 이후 추상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점차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