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조선미술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 朝鮮美術展覽會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1922~1944년 총23회에 걸쳐 개최한 종합 미술전람회. 약칭 ‘선전(鮮展)’, 혹은 ‘조미전(朝美展)’이라 한다. 일제는 3 • 1운동을 계기로 문화통치를 표방하는데, 이 과정에서 1921년 조선인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가 전시회를 열자 이를 견제하고 조선 미술의 근본적 개조를 촉진하기 위해서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전람회(文展)와 제국미술전람회(帝展)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초기에는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조각, 제3부 서예, 사군자*로 국한하여 작품을 공모하고 입선, 특선의 심사전시를 하다가, 1932년 11회전부터는 서예, 사군자*부를 제외시키고 제3부를 공예*, 조각*부로 개편하여 운영하였다. 심사에는 조선인이 동양화부와 서예, 사군자부에 한해 참가하기도 했으나, 1927년의 제6회전부터는 전원 일본인으로 교체되어 일본의 관전출신 작가들이 심사위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일본인으로는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이케가미 슈호池上秀, 마에다 세이손前田靑과 같은 일본화가와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미나미 군조南薰造, 다나베 이타루田邊至, 고바야시 만고小林萬吾와 같은 양화가도 있었다.
한편 초기에 실시한 참고품제도는 이후 출품작가의 창작방향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가와이 교쿠도의 <폭포>,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의 <나무들 사이의 가을>과 같은 근대 일본화(日本畵)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백부용白芙蓉>,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郞助의 <욕장에서>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일본풍의 미술이 직, 간접으로 유도되는 양상을 나타나게 하였는데 특히 동양화부에서 그러한 현상이 심하였다.
선전은 관전으로서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하였지만 그 규모와 권위가 지속되었으며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따라 점차 시국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늘어났다. 1932년 제도개편에 따라 조선의 향토미술을 장려한다는 취지아래 공예부가 신설되고부터는 향토색*을 드러내며 일본인의 이국취미에 부합하려는 경향들이 확산되어갔고, 이는 소재 및 내용상 뚜렷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또한 선전의 추천작가제도는 관전의 권위를 배경으로 한 미술계의 엘리트층을 양산하고 조선의 미술을 일본미술의 아류로, 식민통치에 순응하는 식민지미술로 재편하는 제도적 장치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민족의식과 현실의식을 지니지 못한 미술가들의 창작태도와 맞물려 동양화에서는 일본화와 소재 및 내용이나 양식상의 유사성이 두드러지게 되었으며 서양화와 조각도 일본식 서양화와 조각의 아류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아카데미즘*적 경향의 작품들이 주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 근대 미술은 전통과의 단절과 자율적 발달의 제약, 그리고 현실대응력의 상실이라는 문제점에 봉착하였다. 그리고 관전 아카데미즘의 폐단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까지 지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선전은 여러 분야에서 재능있는 신진들을 발굴하고 미술계 진출을 뒷받침함으로써 한국 근대 미술의 양적 성장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동양화의 김은호金殷鎬(1892~1979), 이상범李象範(1897~1972), 김기창金基昶(1914~ ), 장우성張遇聖(1912~ ), 서양화의 김종태金種泰, 이인성李仁星,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1908~1962), 조각의 김복진金復鎭, 김경승金景承, 윤효중尹孝重 등이 선전을 통해 발굴된 대표적인 작가들로 이들은 해방 후 한국의 미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