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추 醜 ugliness(영) laideur(프)
미학상의 용어로 추는 미*의 대립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미적 규범에 어긋나며 미적 관조를 방해하는 것, 즉 반(反)미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미에 대립하는 미적 범주*의 일부분이다.
미를 잃을 경우, 혹은 미의 반대 요소가 강한 경우의 미의식*의 내용으로 좁은 의미로는 예술의 표현 내용이 미적 형식을 파괴하고 나아가 숭고*, 힘, 비장(悲壯) 등의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킬 때의 미적 감정*을 말한다. 그것은 적극적인 가치를 가지므로 예술의 대상으로서는 형식적인 미보다도 그것의 미적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추는 그 자체로는 절대적 가치를 갖지 않지만 전체 속에서의 대비에 의해 미를 한층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서 중시된다. 그것은 현실의 자연 현상 및 정신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며 예술 작품에도 종종 혼입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고전적 예술은 추와 전혀 관계가 없거나 거리가 먼 미의 예술이며, 따라서 고전적 미학은 추를 미의 부정적 의미로밖에 다루지 않았다. 예컨대 헤겔Hegel이나 피셔Vischer의 미학에서는 추는 악(惡) 또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을 가져오며, 따라서 이념의 순수한 현현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배척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있어서는 바로크*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의 문예 및 미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추가 점차 예술의 세계에 침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학상에서도 추의 미적 의의를 찾으려는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헤겔학파의 관념론적 입장에서도 샤슬러는 소재의 추는 미가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의식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계기라고 했으며, ‘추의 미학’을 역설한 로젠크란츠는 예술이 이념의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것과 서로 뒤얽혀 있는 부정적인 것, 다시 말하면 추가 결여되어서는 안된다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립스T. Lipps의 미학에서도 추는 ‘소극적 감정이입의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미가 한층 돋보이게 하는 역할, 즉 미를 한층 인상깊게 두드러져 보이도록 하는 배경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미에는 직접적인 그 실현을 위한 조건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미가 그것에 대해서 항쟁하며 자기를 주장함으로써 그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추의 적극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추는 미적 대상*의 형식과 내용 및 이들 양자의 관계인 표현의 어느 쪽에 존재하는가에 따라서 구별된다. 로젠크란츠는 이것을 구별하여 ①부형태, 불균제, 부조화와 같은 ‘형식성’ ②표현의 부정확성 ③정신적 자유의 부정에 근거하는 왜곡이라고 구분하며, ③을 다시 비속한 것, 혐오스러운 것, 희화로 구분하고 있다. 이로써 어떤 종류의 숭고*는 그 몰형식성에 있어서 추의 요소를 포함하며, 비장은 종종 혐오스러운 것, 사악한 것에 대한 표현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골계(滑稽)는 비루하고 약소한 것에 대한 표현이나 희화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추와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특성미도 모종의 감각적 또는 정신적 특성을 일방적으로 고조시킬 때에는 추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미적 유형은 많든 적든 추를 그 구성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경우 추는 미적 인상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전체의 생동감을 높여주는 자극제로서의 힘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떤 예술 경향에 있어서는 두드러지게 추의 몰골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으로 일종의 미적 매혹을 불러 일으켜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다수 발견된다.
특히 현대의 실존주의 문예나 그 밖의 예술에는 이른바 ‘추한 미’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이러한 사례로부터 볼 때, 추는 그 자체가 미적 범주의 하나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의미의 추는 미적 범주의 체계에 있어서는 최대한 불쾌 및 불협화음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협의의 미, 즉 순수미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진다. 물론 추를 취급하는 방법은 미학설에 따라서 다양하게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미적 범주론에 있어서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의의는 특히 오늘날의 예술 상황에서 볼 때 경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