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
화상 畵商 art dealer(영)
주로 회화를 취급하는 미술상(美術商). 유럽에서 특정한 후원자와 화가 간의 주문생산과 더불어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17~18세기경부터 급속히 발달하였다. 19세기 시민사회에서는 예술가와 시민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상은 때로는 새로운 유파*, 젊고 유능한 작가를 위한 후원자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화상 畵商 art dealer(영)
주로 회화를 취급하는 미술상(美術商). 유럽에서 특정한 후원자와 화가 간의 주문생산과 더불어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17~18세기경부터 급속히 발달하였다. 19세기 시민사회에서는 예술가와 시민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상은 때로는 새로운 유파*, 젊고 유능한 작가를 위한 후원자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화상석 畵像石 hua-xiang-shi(중)
석재에 여러 가지 그림을 선각하거나 얕은 부조*로 조각한 것으로, 주로 중국고대의 묘실(墓室)과 묘 앞의 사당(祠堂), 석궐(石闕) 등의 분묘건축에 장식되었다. 서한西漢 중엽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동한東漢 초에는 하남, 산동, 호북에서 주로 발견된다. 후한後漢 중엽부터 후한 말까지는 산동山東과 남양南陽의 화상석 수량이 급증하는데 기타지역에 영향을 미쳐 지방색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말(漢末) 혼란기에 존재기반이 없어지면서 쇠퇴했다.
화상석에 다양하고 풍부하게 표현된 내용은 대략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①농경, 수렵, 유목(遊牧), 채상(採桑), 방직, 채염(採鹽) 등의 장원경제(莊園經濟)의 생산활동. ②묘주(墓主)의 공적인 사회활동으로 거기출행(車騎出行), 사렵(射獵), 알현(謁見), 속리(屬吏;지위가 낮은 관리), 수조(收租), 강학(講學) 등. ③묘주의 일상생활. 한거(閑居), 연음(宴飮), 빈객(賓客), 포주(庖廚), 백희(百戱), 박혁(博弈;장기와 바둑, 노름) 등의 내용. ④역사고사와 역사인물상으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이야기,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공자와 그 제자, 열녀, 효자 등의 이야기 등. ⑤신화고사(神話故事)와 상서로운 물상 및 천상도(天象圖)로서 서왕모(西王母), 후예사일(后羿射日), 복희(伏羲), 여와(女媧), 용*(龍), 우인(羽人), 옥벽(玉璧), 선초(仙草) 등 신과 신격을 가진 물상이나 인간과 천계의 사자(使者). 이는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는 우주관과 신선방술사상을 보여준다. 동한대에 이르러 참위(讖緯)사상이 범람하자 이런 내용이 증가했다.
화상석은 전국시대의 목곽묘(木槨墓)가 한대 전실묘(磚實墓)로 변화하면서 생겨난 후장(厚葬) 풍속의 산물로서 사후에 영혼의 승천을 바라는 염원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묘실은 묘주생전의 환경을 축소한 일개의 우주와 동일한 공간으로 죽은 후 재생한다는 관념이 합해져서 묘 안에 화상석이 점차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화상석의 표현방식은 평면적이고 층을 상하로 나누어 배치하며 공간감이나 화면의 깊이가 없는 개념적인 공간 속에 표현되었다. 형상은 윤곽선을 강조하고 윤곽선 안에 선조로 표현하는 예가 많으며 음각선이나 부조*(浮彫), 투조(透彫), 양각(陽刻) 등을 두루 사용하는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는 얕은 부조와 바탕면을 깎아내고 음각선을 사용했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부근에서 출토되는 화상석은 다른 지역의 것과 다소 양식이 다르고 낙산樂山 마호애麻浩崖의 애묘(崖墓)에서는 조기의 불상*(佛像)이 보인다. 한 이후 남북조(南北朝)시대에도 만들어져 《효자전도孝子傳圖》가 유명하며 석관에 조각한 예도 상당히 많다.
화상전 畵像磚
hua-xiang-zhuan(중)
흙으로 만든 벽돌(磚)의 표면에 형틀 등으로 선각 또는 부조풍의 그림을 찍거나 그린 전돌. 채색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전돌무덤의 시작은 전국시대 후주後周에서부터이고 전돌 내부가 빈 대형의 공심전(空心磚)은 한대(漢代) 이전부터 만들어졌다. 공심전은 두 개의 직사각형의 틀로 뜬 후 합쳐서 굽는 것으로 한대 이전의 목곽묘를 대체한 것이다.
동한東漢 초까지의 공심전은 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정주鄭州 부근에 군집되어 있다. 공심전 무덤은 동한 초까지 작은 전돌로 대체되면서 중국, 한국, 만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화상전은 위진, 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 이후까지 계속 제작되었고, 장식문양은 시대별로 다르다. 한대 이전에는 주로 기하학적 문양이 주를 이루다가 한대에는 요리, 사냥, 연회, 곡예, 서수(瑞獸), 문루(門樓) 등의 다양한 장면이 찍혀지거나 그려졌다.
동진東晋 이후 당초문*과 인동문*, 연화문* 등이 4세기경 남조(南朝)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이후 남북조시대에 성행했다. 대체로 한 개의 전돌에 하나의 그림을 표현하지만 때로는 여러 전돌을 합쳐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표현법도 등장하는데 5세기 무렵 남경南京의 죽림칠현묘(竹林七賢墓)와 호교묘(胡橋墓), 서선교(西善橋)의 근교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하남성의 등현묘(鄧縣墓)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나 노래자老萊子, 곽거郭巨 등의 고사 인물 뿐만 아니라 행렬, 서수(瑞獸), 문지기, 연화문 등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이 화상전에 장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