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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

우미 優美 grace(영)

우미는 종종 협의의 미(das Schöne), 즉 순수미와 같은 의미 내지 이에 가까운 개념으로 고찰되며, 그 의미도 한편으로는 숭고*와, 다른 한 편으로는 추*와 대립되는 미적 범주*이다. 또 우미와 미*를 각기 구별하기 위해서 우미와 숭고를 대립시키는 경우도 있다. 우미는 미의 개념과의 근사성 때문에 고전적 예술의 미적 특성으로서, 특히 조형예술에 입각해서 논해진 적이 많았지만, 이를 일반화하여 이후 우미론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쉴러Friedrich von Schiller이다.
쉴러는 우미를 우선 객관적이고 우연적인 운동의 미이면서도 인간 독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 있어서는 신체적 운동도 정신의 표현이며, 여기에서 표현된 미는 도덕성을 함유한 광의의 인간적 태도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견해로부터 ‘아름다운 혼(Schöne Seele)’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우미의 특성을 설명했다. 즉 쉴러는 이성과 감성, 의무와 경향의 완전한 조화*인 아름다운 혼의 현현에서 우미를 찾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미하다고 말해지는 미적 대상은 유려, 섬세, 조화적인 쾌를 그 특징으로 한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의 <마돈나> 등이 우미한 대상으로 자주 거론된다.

우산화파

우산화파 虞山畵派

중국 화파의 하나. ‘우산파虞山派’라고도 한다. 청대(淸代) 산수화가인 왕휘王絮(우왕 후웨이, 1632~1717)와 그를 전후로 한 왕감王鑑(우앙 지엔, 1598~1677), 왕시민王時敏(우앙 스민, 1592~1680) 등은 송宋, 원元의 여러 대가들에게서 기법을 취하여 성조聖祖 강희 연간(康熙, 1661~1722)에 명성을 떨쳤다. 그들에게서 배운 주요 화가로는 양진楊晋(양 친), 고방顧昉(꾸 황), 이세탁李世倬(리 스주어, ?~1770), 상예上叡(상 르웨이), 호절胡節(후 지에), 금학견金學堅(진 쉬에지앤) 등이 있다. 왕휘는 강소성江蘇省 상숙常熟 출신으로, 상숙이 우산에 있기 때문에 ‘우산화파’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우점준

우점준 雨點皴

수묵 산수화*에서 사용되는 준법*의 하나. ‘지마준(芝麻皴)’ 혹은 ‘호마준(胡麻皴)’이라고도 한다. 세로로 긴 작은 타원형의 붓자국을 밀집시켜 바위나 산을 묘사한 것이 비오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아랫부분에서는 크게 나타내며 위로 올라갈수록 작게 찍는다. 중국 북방산수의 웅장한 형세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준법이다. 바위절벽보다 황토절벽을 즐겨 그렸던 북송北宋 초기의 산수화가 범관范寬(환 쿠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의 소위 미점*과는 다르다.

우진각지붕

우진각지붕

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를 짓고 있는 지붕형식으로,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며 측면에서는 삼각형으로 되어있다. 팔작지붕*이 중국 중원(中原) 지방의 한식(漢式)이라고 한다면 우진각지붕은 북방성의 요식(遼式)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지붕은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이 보편적이었고, 당나라와의 교류 이후로 팔작지붕*이 크게 보급되었다고 추측된다. 남대문, 창덕궁, 돈화문, 덕수궁 대한문, 해인사 대장경판고 등이 우진각 형식이며 궁궐건축 중에 정문이나 문루 등에 많이 보이는 형식이다.

→ ‘맞배지붕’ 도판 참조

우키요에

우키요에 浮世繪(일)

일본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서민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화*. 우키요에의 ‘우키요’는 덧없는 세상, 속세를 뜻하는 말로 미인, 기녀, 광대 등 풍속을 중심 제재로 한다. 목판화를 주된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서민의 수요를 충당했다. 근대 풍속화의 시작이라고 할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는 출판 문화의 흥행에 따라 소설 삽화에 판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삽화에서 점차 목판화*로 독립, 단일색의 수미주리(墨摺)는 목판화의 각선이 갖는 견고함과 더불어 대중적인 취향 때문에 서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우키요에는 붉은색의 간결한 채색과 역동적인 탄에(丹繪), 검정색에 광채의 금속분을 첨가한 우루시에(漆繪), 그리고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는 목판 채색의 베니주리에(紅摺繪) 등으로 발전해 갔다.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繪)의 기법을 개발한 뒤 우키요에의 판화 기법은 정점에 달했다. 목판에 의한 명쾌한 색면 배치와 조각도의 생생한 각선의 표현은 일본의 미니어처*라 불릴 만한 독특한 미적 형식을 개척했다.

운간파

운간파 雲間派

명대(明代) 후기 화정華亭에서 활약했던 화파. 운간(雲間)은 화정의 옛 이름. 심사충沈士充(선 스충)을 개조(開祖)로 하여 그 제자인 장애蔣藹(즈앙 아이)와 대수大樹(따 수)로 이어진다. 만력 연간(萬曆, 1573~1619), 오파*의 화가들을 많이 배출했던 화정 지방의 동기창董基昌(똥 치츠앙, 1555~1636) 등의 송강파*, 조좌趙左(자오 쭈어)등의 소송파*, 고정의顧正誼(꾸 즈엉이)등의 화정파*와 함께 오파*지류 중의 하나. 심사충은 송무진宋懋晋(쏭 우친)과 그 동문인 조좌에게 사사했지만 운간파의 화풍에는 동기창의 영향이 강하다.

운강석굴

운강석굴 雲岡石窟 Yün-kang(중)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서쪽 15㎞지역인 운강진雲岡鎭에 있는 석굴사원. 무주천武州川의 남서쪽 벼랑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전체 길이는 약 1km이며, 대굴 21개 중굴 20개와 무수한 소굴, 불감*(佛龕)으로 되어 있다. 석질은 밝은 색의 사암(砂岩)으로 거의 전부가 북위北魏 시대에 조성된 것이며 벽에 직접 조각하여 색을 칠하였다. 《위서魏書》 〈석노지釋老志〉에 화평 원년(460), 사문통(沙門統) 담요曇曜(탄 야오)의 발의로, 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의 오대불(五大佛)을 다섯 석굴 속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이 제16~20동의 소위 담요오굴(曇曜五窟)인데, 석굴군의 서쪽에 있다.
제일 큰 석굴은 돔*형식의 제19동으로 높이 16.48m의 좌불본존(坐佛本尊)을 중심으로 둘레벽의 천불(千佛), 좌우협동(左右脇洞)으로 되어 있고, 협동에는 협시*불(脇侍佛)에 해당하는 큰 상이 있다. 제20동의 본존은 높이 13.46m의 좌불인데, 앞쪽 벽이 무너져서 상이 노출되어 있다. 어깨 폭이 넓은 상체나 융기선으로 된 옷주름의 표현은 서방 양식을 연상시키고, 협시와 같이 평평하면서 늠름한 얼굴 모양은 운강 초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제18동은 높이 16.38m의 본존 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 입상이 있고, 다시 그 협시상과 본존 사이에는 보살이 있으며 위쪽에는 십대제자가 있다.
제17동의 본존은 높이가 16.25m에 두 다리를 교차시킨 교각의 미륵상이고, 제16동의 본존은 높이 13.5m의 불입상인데, 둘 다 얼굴모양이나 체구는 풍만하고 법의는 얇아서 굽타 양식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기법을 종합한 운강 특유의 양식을 보여준다. 석굴군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담요 5굴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 8동은 작은 감을 나란히 배치한 석굴인데, 이것은 뒤이어 제9, 10동, 그 다음으로 제1, 2동이 만들어지고, 태화 18년(494)에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제5, 6동도 만들어져, 전부 21개의 대굴이 거의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석굴은 탑을 중앙에 배치한 탑굴도 있어서 인도의 고대 탑원굴 형식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초기의 담요 5굴, 제7, 8동과 말기의 제5, 6동에서는 꽤 심한 양식적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초기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상의 특징 즉, 균형이 맞지 않는 소박한 형태는 말기 불상*에 이르면 보다 세련되고 잘 다듬어져서, 신체 표현도 눈에 띄게 화사해진다. 신체에 밀착된 얇은 법의와 융기선으로 처리된 옷주름은 말기가 되면 전신을 덮은 두꺼운 주름으로 나타나고, 옷자락이나 소매부분에서는 지느러미처럼 넓어진다. 보살과 공양인상*(供養人像)도 초기의 거칠고 뻣뻣한 모습에서 부드럽게 변한다. 또한 선비족(鮮卑族)이 중국과 동화되면서 중국식 복제(服制)를 채택하는 등의 정치적인 원인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21동 이하 서쪽에 있는 동굴들과 오화동(五華洞, 제9~13동) 등의 소불감(小佛龕)은 낙양 천도 이후, 즉 용문기(龍門期)에 만들어졌다. 운강석굴 양식이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퍼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북위가 지배했던 화북華北 일원까지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며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에 영향을 준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운곡파

운곡파 雲谷派

→ 운코쿠파

운기문

운기문 雲氣文 yun-qi-wen(중)

구름을 본떠 만든 중국 고대 문양의 하나. 구름은 대기 중에 생겨나는 자연현상으로 형태가 일정치 않고 변화무쌍하여 동양의 고대인들은 그 모양과 색, 생겨나는 시각 등으로 길흉을 판단해왔다. 서조(瑞鳥)나 영수(靈獸)가 나는 형상을 ‘서운(瑞雲)’이라고 하고 평상시에 보이지 않는 구름이 나타날 때는 이변(異變)의 징조로 하여 ‘괴운(怪雲)’이라고 했다. 특히 한대(漢代)에는 구름의 기운을 관찰하는 ‘망기좌후望氣佐候’라는 관직이 있을 정도로 고대인들은 다변성(多變性)의 구름이 하늘의 뜻과 음양오행에 부합하는 징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또한 구름의 기운에서 만물이 소생한다는 우주관을 갖고 있었던 고대인은 한대 화상석*과 와전, 직물, 금은공예품, 칠기* 등에 용*(龍)이나 새 혹은 전설 상의 서수(瑞獸)와 운기문이 결합된 형상으로 많이 시문했는데, 이는 신비로운 천상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구름이 흐르는 것처럼 서로 연결된 유운문(流雲文)은 잔존해있는 돌기와 C자형태, 그리고 노출된 용(龍)의 머리와 발을 근거로 훼룡문*(虺龍文)으로부터 발전했다는 견해도 있다. 운기문은 어떠한 형태로도 크기와 형태가 형상화되는 것이 가능해서 광범위하게 의장되었는데, 서초(瑞草)인 영지(靈芝)와 유사한 형태의 영지운(靈芝雲)은 주로 당대(唐代)에 유행하였고 화염과 같은 구름형태를 묘사한 화염운(火焰雲), 굽은 돌기가 붙은 와권운(渦卷雲), 불구(佛具)의 여의(如意)와 비슷하다해서 여의운(如意雲)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용문과 결합된 괴운문과 서운문, 파상 유운문 등 다양한 운기문이 보여서 역사가 오래되었고 이후 금은공예품과 도자기, 와전 등의 장식에 애용되었다.

운두준

운두준 雲頭皴

풍화 작용으로 침식되어 마치 구름이 중첩되어 피어오르는 것처럼 생긴 산을 표현하는 준법으로 이곽파* 화풍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