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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셰타주

카셰타주 cachetage(프)

‘봉인(封印)하다’ ‘(도장을) 찍는다’는 뜻의 ‘cacheter’ 동사에서 나온 말로, 슈라이브Werner Schreib가 의미론적 회화(意味論的 繪畵)의 표현 기법으로 개발해낸 조형적 방법의 하나. 슈라이브는 법칙화된 의미론적 기호를 채색된 합성수지 판 위에 찍는다는 반입체적인 방법을 통해 작품을 제작했다. 이 경우 톱니바퀴, 나사, 화폐(주화), 병뚜껑, 캡슐, 버튼 따위의 오브제*를 스탬프(도장) 대신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사용된 오브제는 일상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물건의 제시라는 다다*적인 의미와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용도로 전환된다. 즉 최초의 있는 그대로의 수동적인 이용에서 서체적인 기호로서의 능동적인 표현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다다에서는 오브제가 그 미적 현상성(現象性)만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서 슈라이브는 오브제를 미적인 창조 과정의 주요한 매체*로서 사용하고 있다.

카슈미르 미술

카슈미르 미술 Kashmirian Art(영)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카슈미르는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Aśoka 시대부터 인도 문화권의 일부였다. 이 시기에 불교도 전해졌으며 카니슈카왕Kaniska 재위시(2세기)에는 카슈미르에서 ‘제4결집(結集)’이 행해질만큼 불교 중심지의 하나였다. 시리나가르Śrīnagar 근처 하르완Hārwan에서는 쿠샨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 사원지가 발견되었다. 스투파*가 있는 차이티야*를 주목할만한데 벽의 하단부와 뜰의 바닥 부분에는 얕은 부조*가 장식된 테라코타* 타일이 남아 있었다. 아크누르Akhnur와 우슈쿠르Uskur에서는 5세기말~6세기초로 추정되는 테라코타 두상(頭像) 몇 점이 출토되었다.
카슈미르는 카르코타Kārkota 시대(약 625~855), 우트팔라Utpāla 왕조(855~939), 로하라Lohāra 왕조(10~14세기) 시대로 구분된다. 카르코타 시대의 조형 활동은 라리타디티야Lalitāditya 통치 시대(약 724~750)에 활발해지는데 이 시대는 사원 건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마르탄다Mārtānda 사원을 들 수 있다. 만다파*와 그 양 옆에 2개의 사당이 있는 건물이 사원 중앙에 있는데 이 건물은 독특한 카슈미르 양식*의 지붕과 외관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 건물은 84개의 작은 성소(龕)가 있는 열주*식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형식은 간다라*나 박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8세기 이후 카슈미르에서는 힌두 사원*이 많이 건축되었다. 한편 8세기의 카슈미르는 불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파리하사푸라Parihāsapura에 있는 라리타디티야의 차이티야가 중요한 유적이다. 그리고 돌이나 상아, 금속으로 된 불상*, 힌두 신상*도 만들어졌다. 14세기 이후에는 이슬람교의 세력이 강화되어 무갈 왕조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카운터 릴리프

카운터 릴리프 counter relief(영)

구소련의 구성주의자 타틀린Vladimir Tatlin은 1913~1917년간의 서유럽 여행 도중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와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를 파리에서 만나 재료를 콜라주*로 합성하는 방법을 알게 된 이후, 거친 금속이나 철사, 유리판과 목재판을 재료로 하여 추상적이면서 입체적인 벽면으로 구성된 카운터 릴리프를 창안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틀린은 사물의 미적인 색채의 외관에 중점을 둔 입체주의* 화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강렬함으로 추구했다. 타틀린은 철사 조각이나 널빤지 같은 것을 물질적 특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고유한 구축적 결합 상태를 담고 있는 새로운 기능적 구조로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카운터 릴리프에서 구현하고 있다. 타틀린의 카운터 릴리프에서 사물은 더이상 끈이나 철사나 목재와 같은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그 내부의 특수한 구성적인 관계 속에 있는 기능적인 가능성인 것이다. 콜라주한 카운터 릴리프는 이와 같은 의미로 그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탑 구성의 기초적이고 실험적인 선행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타틀린은 이 기념 건축에서 3단계로 피라미드 형의 동적인 철골 구조를 세웠다. 그 철골 구조는 소재가 지니는 무게가 경감된 것처럼 보여지며 무게를 상실한 물질이라는 관념을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카운터프루프

카운터프루프 counterproof(영)

동판화* 등을 교정인쇄하는 기법. 판면(版面)으로 지면(紙面)에 직접 인쇄한 화상(畵像)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별도의 종이로 화면을 포개어 압착기로 눌러 복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은 원판의 수정 등 제판(製版)의 작업에 용이하다. 이때 그림이 거꾸로 인쇄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자기의 작품을 거꾸로 봄으로써 신선한 인상을 받기 위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으나, 원판의 위작을 만들 때 간편한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작은 상이 뒤집혀 나타나기 때문에 쉽사리 구별될 수 있다. 오프셋* 인쇄도 카운터프루프와 같은 것이지만, 보다 넓은 용도를 지니고 있다.

카타콤

카타콤 catacomb(이)

초기 기독교의 지하 묘지. 나폴리, 시라쿠사이, 말타,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그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로를 종횡으로 뚫고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을 잇고 있다. 또한 무덤으로 이용하는 벽감이 늘어선 통로와 기념 예배를 드리는 작은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기독교 미술의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카툰

카툰 cartoon(영)

원래는 두꺼운 종이, 판지(板紙) 등을 말하나 전용되어 밑그림, 화고(畵稿)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벽화*, 그 밖의 대규모적인 그림이나 공예품(융단, 자수 따위)을 그리기 전에 준비 과정으로서 분필, 목탄 또는 연필로 두꺼운 종이에 그리는 것을 말한다. 완성된 본 그림과 같은 크기로 두꺼운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 벽면에 옮기기 위해서는 대개 엷은 종이의 밑그림(윤곽에 따라 바늘로 모사한 것)이 쓰인다. 이 밑그림을 벽면에 갖다 대고, 바늘로 뚫은 작은 구멍에 숯가루를 뿌려, 소묘의 윤곽을 옮긴다.
카툰은 기본적으로 완성된 그림을 위한 밑그림, 혹은 보조 그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또 카툰은 때때로 ‘거울상(mirror-image)’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원그림에 사용된 카툰을 그대로 떼어낸 다음 뒤집어서 다른 속에 사용하면 된다. 한편 신문 잡지에 게재되는 시사만화, 풍자화라는 뜻도 있다.

카페 게르브와

카페 게르브와 Café Guerbois(프)

파리 몽마르트의 바티뇰가(현 클리시가 9번지)에 있었던 카페. 낙선전*을 계기로 마네Eduard Manet(1832~1883)의 주위에 모였던 예술가들이 1866년경부터 이곳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모임을 갖게 되었다. 1868년경에 절정을 이루다가 1870년대에 소멸했으며, ‘마네파’라든가 ‘바티뇰파’라는 명칭으로 세간에서 불려졌던 이 모임에는 마네를 중심으로 에밀 졸라Emile Zola(1840~1902), 뒤랑티Edmond Duranty, 뒤레Théodore Duret(1838~1927) 등의 작가, 비평가들과 바질Jean Frédéric Bazille(1841~1870), 드가Edgar Degas(1834~1917), 르누아르Pierre August Renoir(1841~1919),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모네Claude Monet(1840~1926),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등의 화가, 그리고 조각가이자 시인인 으스트뤼크, 판화가 브라크몽Félix Bracquemond(1833~1914), 사진가 나다르Nadar 등이 모여 새로운 예술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 모임은 인상주의* 탄생의 한 계기가 되었다.

칼라

칼라 Kala(범)

①힌두교에서 시간을 의인화한 것으로, 죽음을 의미하며 죽음의 신인 야마Yama와 동일시 된다. 야마의 바하나*는 물소이며 배우자인 칼리Kali 여신과 함께 해골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②인도네시아의 자바에서는 귀면(鬼面)인 키르티무카Kirtimukha를 말하며 건축물의 입구나 벽감*(壁龕) 또는 문미(門楣, 아치*형이 많다)의 중앙을 꾸미는 장식의장으로 사용된다. 크고 둥근 눈, 넓적한 코, 입을 크게 벌려 치아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코의 윗부분에서 뻗은 꽃잎 형태의 장식문양이 이마를 가득 채우고 다시 그 위로 펼쳐져 있다. 동부 자바에서는 귀면의 눈이나 입, 치아 부분까지 꽃잎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귀면의 좌우 아래쪽에는(입구에서는 기둥의 밑부분) 대칭적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마카라Makara(물에 사는 악어와 유사함)를 배치하여 함께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칼라와 마카라의 장식’이라고 한다.

칼로타입

칼로타입 calotype(그)

1841년 영국의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가 발명하여 특허를 받은 사진술. 칼로타입은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를 얻는 현대적 사진의 공정을 최초로 사용한 사진술로 탈보트는 사진의 발명자로 불린다. 탈보트가 1844년에 자신의 발명과정과 공정을 공개하고 사진을 붙여서 만든 《자연의 연필》은 최초의 사진집으로 여겨진다. 칼로타입의 공정은 다음과 같다. 질산은 용액을 바르고 요오드화 칼륨 용액을 적셔 말린 종이에 다시 질산은과 갈릭산 혼합용액을 바르고, 이것을 카메라에 넣어 찍은 후 다시 질산은과 갈릭의 혼합 용액으로 현상하고 티오황산나트륨 용액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거쳐 투명한 네거티브를 만든다. 여기에 왁스를 바르고 탈보트가 발명한 염화은지로 인화하면 사진이 완성된다.
칼로타입은 동시대의 다게레오타입*에 비해 화질이 떨어지는 흠이 있었지만, 비용이 저렴하고 한 장의 네거티브로 여러장의 사진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1851년 콜로디온 습판법*이 발명되기 전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칼리그래피

칼리그래피 calligraphy(영) calligraphie(프)

글자를 아릅답게 쓰는 기술. 넓게는 일반적으로 활자에 의하지 않은 서체(書體), 좁게는 서예를 의미한다. 기호나 상징을 기계 따위를 이용하여 나무나 돌에 새긴 경우는 ‘레터링’이라고 부르지만, 칼리그래피의 본질은 레터링과 대조적으로 자와 컴퍼스 등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작업하는 데 있다.
칼리그래피는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회화와 서예가 거의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회화와 서예가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를 아름답게 쓰려는 시도는 동양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처음부터 문학적인 작품의 목적으로 사용한 필적(字體, uncial)과 문서와 편지에 사용한 필적(흘림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구분 하에서 몇 개의 뚜렷한 양식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데, 펜을 쥐는 방법의 차이, 그리고 관습의 차이에서 개인적인 차이도 생긴다.
이것이 서양에서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목적에 맞게 특별한 필적을 사용한 중세이며,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특징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회화 표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칼리그래피가 20세기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기호 및 운동 표현으로서의 그 역동적이고 암시적인 표현력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외계 현실의 재현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던 사실주의*가 19세기말에 쇠퇴한 이래, 선이나 형태 자체의 표현력이 새삼 재인식되어,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의 파리, 뉴욕의 화가들인 술라주Pierre Soulages(1919~ ), 아르퉁Hans Hartung(1904~1989), 슈네이데르Gerard Schneider(1896~?),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등에게서 칼리그래픽한 추상화가 성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