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낙선전

낙선전 落選展
Salon des Refusés(프)

1863년 프랑스의 관전 심사에 낙선된 그림들이 당시의 편파적인 심사의 결과라는 여론에 따라, 나폴레옹 3세가 살롱* 옆에 낙선작들의 전람회 개최를 허락하여 생긴 전시회의 명칭. 여기에 출품되었던 마네Édouard Manet(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Déjeuner sur l’herbe> 등 종래의 도덕 관념을 타파한 시민적인 작품들은 도덕적으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황제 자신도 이 전시회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아 단 1회로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마네가 추구한 종래의 전통적인 어두운 화면을 벗어나는 선명한 색조는 무명의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네 주변에는 많은 청년 화가들이 모여들었고, 그로부터 인상주의*가 탄생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또 이 전시회는 관(官)의 심사에 의하지 않은 최초의 살롱으로서, 오늘날의 앙데팡당*전의 효시가 되었다.

낙신부도

낙신부도 洛神賦圖

중국 동진東晋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가 그렸다는 산수인물화. 젊은 선비 조식曺植(차오 스, 192~232)이 낙수洛水의 선녀 복비宓妃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은 헤어진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위魏나라의 조식이 쓴 낙신부의 마지막 부분을 묘사한 것이다. <낙신부도>는 문학과 회화의 결합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결합은 이미 한대(漢代)부터 보이며, 고개지의 <여사잠도*女史箴圖> <경거시도輕車詩圖> 같은 작품도 문학작품을 제재로 하였다. <낙신부도>는 두루마리* 그림으로, 동일한 인물을 이야기의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등장시키는 연속적인 해설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화면 구성시 형상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공간이나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취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고개지가 그렸다는 모본만 전하고 있다(워싱턴 프리어갤러리 소장이나 대북臺北 고궁박물원 소장은 모두 일부분이며, 북경北京 고궁박물원, 심양瀋陽 요녕성 박물관 소장이 있다). 또 미인도의 하나로서 낙신만을 그린 것으로는 청대(淸代)의 고낙顧洛이 그린 것이 있다.

난가

난가 南畵

→ 남화

난순

난순 欄楯

→ 베디카

난엽묘

난엽묘 蘭葉描

수묵에서 인물의 옷 무늬를 그리는 방법. 온화하게 그리기 시작하여 도중에 완만하게 넓혔다가 붓을 뺀다. 묘선이 부드러운 난초의 잎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남송南宋의 선종수묵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으로서 백묘화*(白描畵)에서 옷무늬를 그리는 기법에 다시 수묵화적인 표현을 가미하여 완성한 것인 듯하다. 목계牧谿(무 시)의 작품인 〈관음도觀音圖〉(京都 大德寺)에서 전형적인 기법을 볼 수가 있는데, 일찍이 당대(唐代)의 오도현吳道玄(우 따오쉬앤)이 이러한 옷 무늬의 묘사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응용한 기법에 유엽묘*(柳葉描), 죽엽묘*(竹葉描)가 있다.

난정서

난정서 蘭亭序 lantingxu(중)

중국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가 쓴 행서첩(行書帖). 동진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 회계산음會稽山陰(浙江省 紹興)의 난정에서 당시의 명사(名士) 40여명이 어울려 놀며 시를 지었는데, 그 시집에 붙인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 이를 〈난정서〉라 하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의 주(註)에는 문장은 조금 다르지만 〈임하서臨河叙〉라고 나와 있다.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서예가의 글씨본 《난정첩蘭亭帖》으로서 애호되고 모사된다.

남북서파

남북서파 南北書派

중국에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 이래로 남북의 서풍(書風)이 다르다하여 후대에 이론적으로 구분한 서예의 유파.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자오 멍진, 1199~?)이 중국 서예를 남북의 양대 유파로 분류한 이래 청대(淸代)의 완원阮元(완 위앤)에 의해 그 이론이 완성되었다. 그는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의 지리적 위치와 그 양식을 연관시켜 종요鍾繇(쭝 야오), 위관衛瓘(웨이 꾸완) 이래로 남조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 왕헌지王獻之(우앙 시앤즈) 등에서 지영智永(즈 융), 우세남虞世南(우 스난)에 이르기까지를 남파(南派)로, 종요, 위관 이래로 북조의 색정索靖(쑤어징), 최열崔悅(추 이예), 노담盧湛(루 간), 고준高遵(까오 준), 심복沈馥(천 푸), 요원표姚元摽(야 웬피아오), 조문연趙文淵(자오 원예), 정도호丁道護(딩 따오후) 등에서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주 쑤에리앙)에 이르기까지를 북파(北派)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록 남북조의 서예가 다양하지만 남북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이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남송사가

남송사가 南宋四家

중국 남송南宋의 원체산수화가(院體山水畵家)인 이당李唐(리 탕)유송년劉宋年(리우 쏭니앤),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를 일컫는 말. 그들의 화풍은 간략하고 호방함이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처음에는 이런 명칭이 없었으나, 원대(元代)의 탕후湯垕(탕 허우)가 남송 화원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들, 예컨대 이당주증周曾(저우 쩡), 마원, 하규, 이적李迪(리 띠), 이안충李安忠(리 안쫑), 누관樓觀(로우 꾸완), 양해梁楷(량 카이) 등에 대해, “나는 이당에 대해서만 약간의 감상을 덧붙일 수 있을 뿐, 그 나머지에 대해선 모두 구별할 수 없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이후 명대(明代)의 당인唐寅(탕 인)이 유송년의 《춘산선은도春産仙隱圖》에 시제(詩題)를 붙이면서 ‘이, 유, 마, 하(李劉馬夏)’란 명칭을 썼다. 그 뒤에 도륭屠隆(투 롱)이 “이당, 유송년, 마원, 하규 네 사람이 남송의 사대가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

남종화

남종화 南宗畵

중국 명말(明末)의 막시룡莫是龍(모 스롱),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가 제시한 남북종론에서 나온 북종화*에 대립되는 개념의 산수화* 양식. 문인들이나 사대부가 주류를 이루는 문인화*와 혼용되어 남종문인화라고도 부르는데, 대개 남종화는 산수화를 의미하고 문인화는 산수화 외에 사군자, 화조화 등 좀더 넓은 범위를 가리킨다. 남종화의 계보는 당唐나라의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를 시조로 하여 오대송초(五代宋初)의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을 거쳐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 실질적 개조(開祖)인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예찬倪瓚(니 짠), 왕몽王蒙(우앙 멍), 오진吳鎭(우 즈언) 그리고 명대(明代)의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과 예림백세(藝林百世)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동기창 등으로 이어진다.
화풍상의 특징은 수묵선염을 주로 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하였다. 준법*(皴法)도 비교적 부드럽고 우아한 피마준*(披麻皴), 미점*(米點) 등을 자주 사용하고 발묵*(渤墨)과 파묵*(破墨)을 애용하여 운치 있는 산수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초부터 부분적으로 유입되다가 후기부터 크게 유행하여 조선화단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러나 남북종론은 문인화와의 모호한 구분과 회화양식에 대한 편협적인 가치평가로 인해 현재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남진북최

남진북최 南陳北崔

중국 명말(明末)에 활약한 진홍수陳洪綬(츠언 홍서우, 1598~1652)와 최자충崔子忠(츠웨이 쯔총, ?~1644) 두 화가를 이른다. 진홍수는 남방의 절강성浙江省 출신이고 최자충은 북방의 산동성山東省 출신이어서 그 호적수를 나타내기 위해 ‘남진북최’라는 말이 생겼고, 《국조화징록國朝畵徵錄》에 그 용례가 보인다. 명말에 이르러 왕조의 부패가 구제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사회적 혼탁양상이 가속화하자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골동취미적인 경향의 그림이 성행하였다. 진홍수와 최자충의 그림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물화에 뛰어났다. 진홍수의 화풍은 기이하고 생졸하며, 과장되고 변형된 조형을 즐겨 사용하였다.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에서 유래된 고대 인물화 양식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등 전통적 방식을 연구하였다. 명말의 혼란과 붕괴 상황 속에서 자신의 화풍을 전통에 의지한 것은 고도의 개인주의적인 자아탐구일 뿐만 아니라 명明 왕조나 문화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물 뿐만 아니라 화조도 잘 그렸다. 나아가 역사화와 풍속화*에 뛰어났는데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과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의 화법(法)을 겸비하였고 설색(設色)은 오도현吳道玄(우 따오쉬앤)의 유법(遺法)을 얻었다.
최자충 역시 명말의 혼란스런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그는 명말의 서화고동취미(書畵古董趣味)를 반영하는 인물화들을 많이 그렸다. 이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혼란기에 전통에 의탁하여 현실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상적 취향의 문인화풍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최자충의 화풍도 전통을 추구하여 당唐, 송宋 화풍을 따랐다. 따라서 묘사기법이 세밀하고 치밀하며 색채가 청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