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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생담

본생담 本生譚 jātaka(범)

불타의 전생 이야기로 자타카(jātaka)라고 한다. 불타는 전생에 오백번이나 생을 반복하면서 인간이나 동물로 태어났는데 그 때마다 많은 좋은 업을 쌓았기 때문에 마지막 생에서 성불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타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는 불교도들을 위해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을 본생도(本生圖)라고 한다. 산치*나 바르후트*, 아마라바티*의 스투파*에는 본생담의 내용을 조각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와는 달리 부처의 일생을 미술로 표현한 것은 불전도*(佛傳圖)라고 한다.

본생도

본생도 本生圖

→ ‘본생담’ 참조

볼륨

볼륨 volume(영)

→ 양감

볼트

볼트 vault(영)

→ 궁륭

봉니

봉니 封泥 feng-ni(중)

고대 중국의 간독(簡牘, 木簡, 竹簡)을 열어볼 수 없도록 진흙으로 봉인(封印)하던 것을 말한다. 간독을 겹쳐 놓고 편간(編簡)을 말아 마끈으로 묶어서 표면의 매듭 위에 점토를 붙이고 그 위에 도장을 찍는다. 주로 봉니만이 발견되어 한대(漢代)의 인장 연구에 도움을 준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와 사천성 성도, 섬서성 서안, 산동성 임치臨淄, 한국의 평양 등에서 발견되었다. 청대(淸代) 말기 이후 오식분吳式芬과 진개기陳介祺가 편찬한 《봉니고략封泥攷略》, 나진옥羅振玉의 《제로봉니집존齊魯封泥集存》, 오웅吳熊의 《봉니휘편封泥彙編》 등의 연구서가 나왔다.

부도

부도 浮屠

승려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봉안한 탑*으로 ‘불도(佛圖)’나 ‘부도(浮圖)’라고도 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했던 후한(後漢)시대부터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쓰인 용어로 원래는 ‘붓다佛陀’라는 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처음에는 불상*(佛像)이나 불교사원, 불탑(佛塔)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으나 점차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조소탑(石造小塔)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국에선 통일신라말기(9세기경)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크게 유행하였다. 즉 고승신앙의 한 형태로 전개된 것이다. 보통 부도의 형태는 석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7세기 전반인 신라 진평왕때 원광법사의 부도와 백제시대에 혜현의 부도를 각각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국시대 말기에는 부도의 건립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래된 부도는 844년(문성왕 6년)의 〈염거화상부도廉居和尙浮屠〉이다.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우리나라의 전형을 이룬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8각의 각 부재가 점차 원형으로 바뀌고, 부도 양식도 다채로워진다. 고려말기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석종형(石鐘形)의 부도가 가장 많이 조성되었다. 석종형의 부도는 형태가 매우 간략하고 탑신부만 있는 부도로서 인도의 복발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부르주아 리얼리즘

부르주아 리얼리즘 Bourgeois Realism(영)

1970년대에는 초기 근대 미술의 최대 적수였던 소위 살롱*화(salon painting)에 관한 책들이 다수 발표되고 이들의 전시회도 빈번히 개최되었는데, 이 때 부게로Adolph-William Bouguereau(1825~1905), 라이튼Lord Leighton(1830~1896), 들라로슈Paul Delaroche(1797~1856), 글레이어Gabriel-Charles Gleyre(1808~1874) 등과 같은 관변 화가들의 작품에 부르주아 리얼리즘이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절정기에 달한 중류 계급의 사회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용어는 사회적 사실주의*와는 대응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850년대에는 살롱화를 ‘소방수의 미술’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림 속에 묘사된 고대의 영웅들이 일반적으로 당시 프랑스 소방수들이 쓰던 헬멧과 닮은 투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벽

부벽 扶壁 buttress(영)

건물의 내외 벽을 받치기 위해 제작된 지지대. 외벽을 등지고 세워져 석조 건축을 지탱하는 돌출 부분으로 대개 안에 있는 궁륭*이나 아치*의 내리 누르는 추력을 견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벽준

부벽준 斧劈皴

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측필을 이용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준법*. 붓을 기울인 상태로 먹이 묻는 면을 넓게 하여 끌어당겨 그려서 수직으로 부서진 단층의 효과를 낸다. 붓자국의 크기에 따라 소부벽이나 대부벽으로 부른다. 북송北宋 말에 시작되었으며 남성적이고 힘찬 양강陽江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이당李唐(리 탕),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 등과 절파*화가들이 잘 썼고, 조선에서는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즐겨 사용하였다.

부브노브이 발레트

부브노브이 발레트 Bubnovyi Valet(러)

1910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화가 단체로 20세기초 미술계파*에 이어 러시아 화단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술계파가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이입하면서 장식적 양식화와 역사적 주제를 선호한데 반하여, 부브노브이 발레트는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나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848~1903) 등 후기인상주의*와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에 경도되었다.
이 그룹에 속한 대표적 작가로는 콘차로프스키Peter Petrovich Konchalovski(1876~1956), 마시코프Ilya Masikov(1881~1944), 그라바리Igori Grabari 등 비교적 사실적 성향을 지닌 자들과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1881~1962),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1881~1964) 등 서유럽 모더니즘*의 지지자들이 있다. 1910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전시회는 대담하고 격렬한 화풍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20세기초 러시아 현대회화의 진정한 출발을 알렸다.
이후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 부부가 탈퇴한 부브노브이 발레트는 조직을 재구성하고 명칭도 ‘회화전람회’라고 바꿔 1912년 1월 두번째 전시를 열었다.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펙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레제Fernand Léger(1881~1955),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 등 서구 작가들이 선을 보인 이 전시회를 계기로 러시아에서는 입체주의를 주제로 삼은 공개 토론이 활발히 벌어졌다.
이외에도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의 절대주의* 회화를 전시하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말레비치는 부브노브이 발레트에서의 전시에 맞춰 《미래주의와 입체주의로부터 절대주의로》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1917년의 마지막 전시회에서는 절대주의와 비객관적 추상미술*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엑스터Aleksandra Exter(1882~1949)는 절대주의 풍으로 장식을 한 극장을 기획하고, 여기에서 ‘살로메Salome’를 상연하여 추상미술*에 대한 대중의 찬사를 자아냈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 추상미술이 공식적으로 비판을 받게 되자, 그룹의 작업은 진부하고 보수적인 문화 복구에 이용되었고 후에는 ‘러시아혁명미술동맹(AKHRR)’ 결성과 더불어 해산되었다. 이렇게 부브노브이 발레트는 혁명 후까지 존속하여 초기 러시아 근대회화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다수의 작가를 배출하였다.
장식적인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혼합한 이미지를 공식적인 당의 역사 편찬 작업에 도입하는 이들의 작업은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