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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스타일 soft style(영)
주로 현대조각의 하나의 실험적 성격을 나타내는 일종의 양식* 개념이다. 조각의 최종적인 형태를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경성재료(硬性材料)를 사용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연성재료(軟性材料)를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각의 전통적 속성인 보수성과 수구성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던 경향. 이 경향의 출발은 1963년 재료 자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제시한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 )의 ‘소프트 스컬프처(soft sculpture)’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는 이 부드러운 조각들의 촉각적인 효과를 통해 조각의 오랜 배타적이고도 관념적인 방식에 도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관중은 손을 통해 작품의 유연한 재질감을 즐김으로써 적극적인 의미에서 미술의 참여자가 된다. 올덴버그는 전통조각이 보였던 영속성의 허구와 번지르르한 기념비성 그리고 소비재로서의 내구성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고, 그 후 연질 재료를 이용해 많은 일상적 소재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의 이러한 개혁적 표현은 달리Salvador Dali(1904~1989)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그려졌던 연성 오브제*에서 이미 예시된 것이었다. 연성 조각의 흐느적거리는 유연성은 인간의 살이나 기관과 유사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몇몇 비평가들은 내장(內臟)의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 이후 비닐, 고무, 파이버글라스, 라텍스, 플라스틱, 깃털, 펠트천, 모래, 머리카락 등 부드러운 재료의 가능성을 찾는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조각의 영역도 그만큼 확대되었다.
소필 燒筆
먹붓을 대기 전에 구도*와 선*의 기초를 잡는 밑그림에 사용되는 목탄. 서양화에서 석고데생에 쓰는 부드러운 버드나무 목탄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소호 SoHo(영)
뉴욕 맨해튼의 남쪽, 휴스턴가(街)와 커널가(街) 사이의 화랑 밀집지대. 소호라는 명칭은 ‘South of Houston’의 약어로, 원래 공장, 창고 지구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전후의 맨해튼이 국제 무역도시로 성장하면서 무역 사무실이나 호텔 등에 비해 공장의 수요는 줄어들어 임대료가 낮아지게 되자, 1950년대부터 이 지역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불법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는 합법화되어 로프트(loft)라 불리던 창고 공간은 예술가들의 생활과 작품제작의 장소가 되었다. 특히 1950~1960년대의 추상표현주의*는 대형 작품을 제작, 수용, 전시할 공간을 필요로 했으므로 소호의 공장과 창고는 적절한 조건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1968년 폴라 쿠퍼화랑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 레오 카스텔리가 업타운에서 이전해 온 후, 무수한 화랑이 연이어 오픈했다. 메어리 분화랑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신표현주의* 회화가 대두되면서 소호에는 활기차고 감각 있는 화랑과 상점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그러나 점차 전문직종의 젊은이들이 이주해오고, 관광지가 되면서 임대료가 높아져, 역으로 예술가들은 소호를 떠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호는 예술의 거리로서 그 명성을 보존하고 있다.
소혼점 小混點
담묵(淡墨)의 점을 먼저 찍고 그 위에 농묵(濃墨)을 사용해 붓끝으로 작은 타원형의 점을 찍는 기법. 흐리고 진한 것을 뒤섞어 혼란스럽게 그린다. 비오는 경치의 산이나, 나뭇잎 등의 묘사에 사용된다.
손질된 사진 manipulated photography(영)
사진*의 기계적 공정 외에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교정이나 장식적 흔적을 가한 사진. ‘정통 사진*’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사진 위에 물감을 덧칠하거나, 이미지를 지우거나, 긁기, 새기기 등의 다양한 기법들이 1970~1980년대에 사진 작가들에 의해서 많이 행해졌다. 라이너Arnulf Rainer가 인화지 위에 그린 표현주의적인 자화상이나, 사마라스Lucas Samaras(1936~ )가 인화지 위에 핑거페인팅*으로 어지럽게 널린 패턴을 만들어 낸 것, 윗킨Joel Peter Witkin이 필름 원판 위에 아무렇게나 끄적거려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 등이 그 예이다.
사진에 인위적 손질을 가하는 것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에 회화적 양식을 추종하며 등장한 ‘회화주의 사진*’에서 이미 보여졌다. 회화주의 사진은 회화를 흉내냄으로써 사진을 예술의 위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진의 기계적 사실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고무 인화법이나 합성 사진 같은 기법을 사용하여 당시의 회화와 유사한 사진을 만들었다. 1970년대 이후에 등장한 손질된 사진들은 회화주의 사진과는 달리 회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사진의 사실적 기록 능력뿐 아니라 사진인 동시에 회화이기도 한 표현력있는 영상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발전되었다.
→ ‘정통 사진’ ‘회화주의 사진’ 참조
솔라리제이션 solarization(영)
사진*의 특수 기법 중 하나. 현상과정에서 필름이나 인화지 등의 감광재료에 극단적인 노광이 주어지면, 현상에 의해 최대 농도가 저하되어 밝은 부분이 부분적으로 반전(反轉)되어 보이는 현상. 솔라리제이션은 일종의 부조*같은 표현효과를 가지며, 특히 피사체에 강한 윤곽선이 나타난다. 만 레이Man Ray(1890~1977)가 1930년대 초에 제작한 사진작품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솔라리제이션의 정도는 사용된 필름, 인화지, 현상약품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사바티에 효과*와 혼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효과는 근사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과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솔라리제이션은 감광재료의 광화학 반응에 대한 특성 중의 하나인 반면, 사바티에 효과는 현상처리 방법에 의한 특수표현기법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 ‘사바티에 효과’ 참조
송강파 松江派
중국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을 대표로 하는 명말(明末) 문인 산수화파. 그 지파(支派)는 셋이 있는데, 조좌趙左(자오 쭈어)를 대표로 하는 소송파*蘇松派, 심사충沈士充(선 스충)을 대표로 하는 운간파*雲間派, 고정의顧正誼(꾸 즈엉이)를 대표로 하는 화정파*華亭派가 그것으로, 이들 모두 송강부松江府 출신이므로 송강파라 총칭한다. 송강파는 당시 오문화파*吳門畵派의 상업적, 절충적 문인화 양식을 비판하고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 동원董源(똥 위앤), 거연巨然(쥐 르안) 및 원사대가(元四大家)의 양식에 기반을 둔 남종화(南宗畵)를 제창하였으며 청초(淸初)의 화단을 지배한 정통파 화가, 즉 사왕오운*(四王吳惲)을 통해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송대 미술 宋代美術
959년 후주後周의 마지막 황제가 죽고 그 다음해 섭정하던 조광윤趙匡允장군이 추대되어 송宋이 시작되었다. 송은 1125년 여진족에 의해 수도인 개봉이 침입당하기 전까지를 북송(北宋)시대(960~1126), 1127년 이후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망명하여 항주杭州에 정착한 시기인 남송(南宋)시대(1127~1279)로 나뉘어진다.
송대의 중국은 평화를 지키며 이웃 나라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문화에 있어서 철학적 통찰력이 있는 위대한 시기로 만들었다. 이 시대의 중국은 참된 교양을 지닌 제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러한 지적(知的) 배경에 따라 인쇄술이 급속히 발전되었으며 932~953년 130권이나 되는 《사서四書》의 초판이 출판되었고, 5천권이 넘는 불교 대장경과 도교의 장경(藏經)도 이 때 간행되었다. 또한 주돈이周敦頤와 주희朱熹에 의한 신유가(新儒家)의 학설이 확립되었다. 유교의 부흥에 따라 복고적인 경향이 생겨 고대 예술과 공예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청동이나 옥으로 만든 고대 제기와 제구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식이 생겼다.
건축:북송의 목조 계통 건축 중에서 북방계라고 생각되는 것은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의 제427굴(970), 제444굴(976), 제431굴(980) 등의 굴첨 즉 각굴 전면에 부착된 낭(廊)이 가장 오랜 것이다. 이것들은 산서성山西省 태원 근처의 〈진사晉祠 성모묘聖母廟 정전正殿〉(1102),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숭악崇岳에 있는 〈소림사小林寺 초조암初祖庵〉(1125), 하북성河北省 정정현에 있는 〈흥륭사興隆寺의 산문山門〉 〈마니전摩尼殿〉 〈자씨각慈氏閣〉 〈전륜장전轉輪藏殿〉 등이 있다. 남방 계통으로는 절강성浙江省 여도현 안산향鞍山鄕의 〈보국사保國寺 대웅보전大雄寶殿〉(1013경), 복건성 포전현蒲田縣의 〈원묘관元妙觀 삼청전三淸殿〉(1015), 소주蘇州 녹직진 甪直鎭의 〈보성사保聖寺 대전大殿〉의 두공 세부 등이 있다.
탑*의 북방형은 전체를 전(塼)으로 쌓은 층탑으로 하북성 정현의 〈요적탑姚敵搭〉 즉 〈개원사탑開元寺搭〉(1001~1055) 〈개봉철탑開封鐵搭〉(8각13층탑, 1049경)이 대표적인 예이고, 남방형은 지붕부분만을 목조로 한 전탑이나 중심부는 벽돌로 쌓고 외벽이나 지붕은 목조로 한 탑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북송 말기의 건축 지도서로 이계李誡가 편찬한 《영조법식營造法式》이 있다.
조각:송대의 석굴조상으로 감숙성甘肅省 맥적산석굴*과 돈황 막고굴의 소상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천성四川省 대족현의 마애조각이 다수 존재하며 북송부터 남송의 재명상이 알려져 있다. 같은 대족석각의 보정산에는 남송 조상이 많으며, 불열반도*佛涅槃圖, 부모은중경변상, 관무량수경변상, 지옥변상 등의 이야기식 부조*조각도 많다. 또한 항주의 영은사 비래봉은 오대(五代)에 이어 내부와 암벽면에 조각된 석불이 있다. 또한 철불로는 산서성 교성현 현중사玄中寺에서 전래하는 철조불좌상이 대표적이며 북송 12세기초의 연대기준이 된다. 목조상으로는 좌상으로 한쪽 다리를 세우거나, 똑같이 한쪽 다리를 세우되 다른 한쪽 발을 내린 보살상들이 유형화를 보인다. 이런 상들은 인간적인 형태로 현실의 여성의 모습에 가까운데, 이런 자유분방한 자태에서 깊이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 송대 불상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송대에는 문인이나 승려와 같은 여기(餘技) 화가들이 이상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화원의 전문 화가들은 사실주의 입장을 취한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화원은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의 약칭으로, 궁정 회화를 제작하는 기관이며 휘종(재위 1100~1125) 때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북송 초기에는 도석인물, 산수, 화조 세부분이 정립하였지만, 그 이후 도석인물화는 선종특유의 회화에 새로운 측면을 보였을 뿐 쇠퇴하였다. 그러나 산수와 화조는 화단의 2대 조류로 계속하여 발전하였다. 특히 산수화*는 평탄한 산과 들의 전개를 그리는 평원산수(平遠山水)를 대성한 이성李成(리 츠엉)과 웅장한 암산을 높이 솟게 하여 화면에 가득 그리는 환관范寬(환 쿠안), 강남의 습윤한 풍토를 그린 동원董源(똥 위엔)과 그의 제자 거연巨然(쥐 르안),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지었으며 북방계 산수화의 양식을 종합했던 곽희郭熙(구어 시)에 의해 많은 발전을 보았다.
그리고 북송 중엽 경인 11세기 후반에 문인들의 예술적 의지를 담는 문인화*가 발흥하였으며, 이들은 사의*(寫意)를 실현하기 위해 수묵화*를 취하였다. 북송 후반기부터 남송 초반기의 문인 화가로는 묵죽(墨竹)에 문동文同(원 통)과 소식蘇軾(쑤 스, 1036~1101), 묵매(墨梅)에 선승 중인仲仁(쭝 르언)과 양보지楊補之(양 후즈), 조방한 필치의 미불米芾(미 후, 1051~1107)과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 부자, 또 백묘화*(白描畵)로 〈오마도五馬圖〉를 남긴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 등이 있다. 13세기 중기 이후 남송말이 되면 목계牧谿(무 시), 옥간玉澗(위 지앤) 등 일격(一格)의 화승(畵僧)들에 의해 수묵화가 완성된다. 이들은 자연의 형태를 충실히 그리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의사를 표출하는 가운데 자연의 외형을 넘어서서 자연의 진실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서예:북송 전기에는 당말 오대 이후의 서예풍이 계승되고, 순화 3년(992) 칙명에 의해 판각되었던 〈순화각법첩淳化刻法帖〉 10권이 서법의 규범을 보이고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게 된다. 이윽고 후기에 들어서면 독자적인 서풍을 확립한 새로운 본격적인 서예가 발생한다. 채양蔡襄(차이 르앙, 1012~1067)이 선구자가 되며 소식, 황정견黃庭堅(후앙 띵지엔, 1045~1105), 미불 등 북송 4대가가 나타난다.
공예:9~10세기 도자기는 둥글고 큰 기형에서 부분적인 특색을 살린 단정한 기형으로 변화한다. 문양면에서도 당대에는 조각을 하듯이 파낸 문양 및 덧붙인 문양이 두드러지나 송대에는 부조식으로 깎아내는 선조(線彫) 등으로 예리하고 얕게 파내어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문양을 드러낸 것이 많다. 제작기술도 현저하게 발달되고 특히 유약이 아름다워지며 생산지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각기 다른 작풍이 드러난 도자기가 제작된다. 화북에서는 형주요의 뒤를 이어 정요의 백자가 두각을 나타낸다. 화남에서도 푸른빛을 띤 영청(影靑)이라 불리는 예리한 백자가 경덕진요景*德鎭窯 등에서 생산되었다. 섬서성陝西省의 요주요에서는 올리브색 유약아래 깊은 부조로 새긴 당초문*양이 새겨진 북방청자가 제작되었다. 화북의 자주요*磁州窯에서는 흰바탕에 칠흑의 문양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박지기법*(剝地技法)이 적용된 도자기가 제작되어 민간의 일상 생활용품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절강성의 용천요*龍泉窯에서는 벽옥처럼 아름답고 밝고 맑은 빛을 띤 청자*가 제작되었으며, 궁정 어용품인 세련되고 정교한 관요청자를 만든 남송관요도 주목된다.
그리고 송대 도자기로 당시 말차를 다시는 풍습과 더불어 제작된 흑유완黑釉碗, 소위 천목*(天目)찻잔이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것은 복건성 북부의 건요*建窯찻잔이다. 그 밖에 빛이 통과할 수 없는 유약을 사용한 균요鈞窯가 있다.
송설체 松雪體
원대(元代)의 문인화*가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의 서체. 그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 해서*의 균형 잡힌 균정미와 행서*의 유려함을 조화시킨 서체로서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유입되어 조선 후기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