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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재

신소재 新素材 new materials(영)

새로운 재료나 재질을 의미. 어떤 물질이든 미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고가 20세기 전반에 확립되었으며, 버려진 쓰레기나 산업 재료 나아가 생명체까지 미술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러한 발상은 조각*, 건축, 회화* 등 전영역에 있어 기법과 양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다양한 소재의 이용은 입체주의*의 콜라주*에서 시작되어 쓸모없는 폐품들을 재료로 한 정크아트*에 이르는 앗상블라주*에서 큰 발전을 보게 되었고,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회화와 조각에 대한 종래의 구분, 즉 장르 자체의 전통적인 개념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신소재로는 각종 금속들과 합성수지 및 전기를 사용한 기구 등이며, 재료의 확장은 용접,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등 미술기법과 형식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회화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신소재로는 아크릴* 물감과 플라스틱 페인트로서, 1950년대 말부터 사용되어 스테인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제작 방식을 가능하게 했다.
20세기 중반의 미술이 점차 구상적 또는 초기의 의미에서의 추상미술*에서 벗어나 개념적이거나 환경적인 작업들로 전개되면서 흙이나 동식물 같은 자연 재료들이 도입되었고, 물질, 시간, 공간과 같이 작품으로서의 확고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신수

신수 神樹

성수(聖樹)라고도 한다. 3대 성수는 무우수(無憂樹), 보리수(菩提樹), 사라수(沙羅樹 혹은 沙羅雙樹)이다. 무우수는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나무 아래서 탄생하였으므로 이를 상징하여 ‘아수가수(阿輸迦樹; 아쇼카)’의 번역어로 두과(荳科)에 속하고 붉은 꽃을 피운다. 보리수는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깨달음의 상징이 된다. 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본래 이름은 핍팔라 혹은 아슈바타이다. 사라수는 중인도의 쿠시나가라 부근에서 번성했던 나무로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열반의 상징이 되었다.

신안파사대가

신안파사대가 新安派四大家

→ 신안화파

신안화파

신안화파 新安畵派

중국 화파의 하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점강漸江(지앤 지앙, 곧 弘仁)을 선구로, 사사표査士標(츠아 스퍄오), 손일孫逸(쑨 이), 왕지서王之瑞(우앙 즈르웨이) 등을 일컬어 ‘신안파사대가新安派四大家’라 부른다. 점강은 흡현歙縣 출신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휴녕休寧출신인데, 두 현은 모두 휘주부徽州府에 속하고, 진, 당대(晋唐代)에는 신안군新安郡에 속했으므로 그렇게 명칭이 붙었다.
또한 ‘해양사가海陽四家’라고도 불렀다. ‘해양’의 본래 명칭은 ‘휴양休陽’으로 삼국시대의 오吳에 위치했는데, 휘자(諱字)를 피해서 ‘해양’으로 고쳐 불렀다한다.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휴녕현休寧縣 동쪽 30여리 지점에 있다.
이들 사대가는 예찬倪瓚(니 짠, 1301~1374),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을 본받아서 황산黃山의 운해송석(雲海松石) 같은 경치를 많이 그리면서, 먹을 많이 쓰지 않고 붓놀림이 간결하다. 이 파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정수程邃(츠엉 쑤에이), 대본효戴本孝(따이 번샤오), 정문鄭呅(즈엉 민) 등인데, 풍격은 침울하면서 고색(古色)이 창연하다.
현대의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도 이 파의 작품을 본받고 있다. 또 점강을 본받은 사람으로 강주江注(지앙 주), 오정吳定(우 띵), 요송姚宋(야오 쏭), 축창祝昌(즈우 츠앙) 등이 있어서 점강의 ‘사대제자(四大弟子)’라 불린다.

신영국미술협회

신영국미술협회 新英國美術協會
New English Art Club, NEAC(영)

보수적이고 안일한 영국왕립미술원*의 태도에 반하여 1886년 런던에서 설립된 예술가 단체. 설립자들은 대개 프랑스에서 작업하던 작가들로 특히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그리는 방식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었다. 창립회원들로는 클로젠Sir George Clausen(1852~1944), 라 탕그Herbert Henry La Thangue,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 스티어Philip Wilson Steer(1860~1942), 튜크Henry Scott Tuke가 있었으며, 1886년 4월에 말보로 화랑에서 첫번째 전람회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50여명의 화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889년에 그룹은 1888년에 동참한 시커 Walter Richard Sicker(1860~1942)와 그의 동료들이 이끌었다. 그들은 인상주의*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1889년 <런던 인상주의자>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1897년에 시커가 물러나고 제1차세계대전 무렵까지는 브라운Frederick Brown(1945~ ), 통크스Henry Tonks(1862~1937), 스티어가 그룹을 주도했으며 이 기간에는 영국 최고의 화가 대부분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8년부터는 ‘연합예술가협회Allied Artist’s Association’와 ‘캠든타운그룹Camden Town Group’ 등 진보적인 집단에 비해 진취성이 희박해지게 되어 전후에는 아카데미*와 아방가르드* 그룹들의 중도에 위치하게 된다. 아카데미 전람회가 점차 자유로워지면서 그룹의 중요성은 감소되었으나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신인상주의

신인상주의 新印象主義
Néo-Impressionsme(프)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와 시냑Paul Signac(1863~1935) 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이론이자 운동.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인상주의*의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아스니에르에서의 목욕Baignade à Asniéres>을 보고 비평가 페네옹Félix Fénéon이 붙인 것이다. 당시 25세였던 쇠라는 여기서 후에 이 운동의 이론적 대변자 역할을 한 시냑을 만나 ‘앙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고, 22세의 젊은 비평가 페네옹은 같은 해 이 운동을 돕기 위해 《르뷔 앙데팡당Revue Indépendante》을 창간했다.
1885년에는 시냑이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를 운동에 참가시켰으며, 크로스Henri-Edmond Cross(1856~1910), 루스Maximilien Luce, 뒤부아-피에Albert Dubois-Pillet(1845~1890) 등이 뒤를 이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고갱Paul Gaugain(1848~1903) 등도 영향을 받아 한때 신인상주의적인 작업을 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서, 캔버스*에 색칠을 할 때 순색(純色)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팔레트*에서 뒤섞지 않고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므로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 효과를 거두게 된다.
사실 이런 방법은 와토Jean Antoine Watteau(1684~1721),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1798~1863),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 등이 이미 사용하였다. 인상주의자 중에서는 르누아르 Auguste Renoir(1841~1919)가 최초로 실행했고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 후드O.N. Hood, 쉬브렐Michel-Eugène Chevreul 등의 색 이론에 친숙하던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사용했으며 점묘주의라는 말 역시 르누아르와 모네에 관련되어 쓰이고 있었다. 따라서 신인상주의자들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점묘와 자신들의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점묘를 구별하고자 하였으며 ‘분할주의Divisionnisme’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시냑은 1899년 《라 르뷔 블랑시》에 발표한 ‘외젠 들라크루와에서부터 신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에서 터치의 체계적인 분할에 의거한 분할 묘법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분할묘법은 비잔틴 모자이크*의 작은 입방체들과 다를 것이 없는 단순한 점묘법*(pointillisme)과는 구별되는 것이어서 ‘분할한다는 것은 ①순수한 물감들(프리즘의 모든 색상과 모든 색조)의 시각적 혼합 ②각기 다른 요소들의 분리(고유색, 광선의 색깔 및 그 반사 등) ③각 요소들 간의 균형 및 비례(콘트라스트, 점차적인 변화 및 분산 등의 법칙에 의해) ④화폭의 크기에 알맞은 터치의 선택 등의 수단에 의해 밝은 빛, 화려한 색채 및 하모니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말한다.
1886년 이후 쇠라와 그의 동료들은 젊은 과학자이자 미학자인 앙리Charles Henry와 쉬브렐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했다. 앙리는 1885년 《과학적 미학 입문》에서 세련된 이론을 선보였으며, 1889년 재편집된 쉬브렐의 《동시적인 대비의 법칙에 관하여》는 이들에게 거의 교과서적인 저작이었다.
1886년 5월에 쇠라는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신인상주의의 회화적 선언인 <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출품하였다.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구조 안에서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르네상스 원근법*의 고전적 전통, 고전주의*의 엄숙한 질서, 빛과 색채 그리고 형태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을 종합한 것이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표현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회화적인 여러 요소들의 과학적 배치가 정서나 정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은 푸생에 의해 일찍이 표명된 바 있으며, 후일 아카데미의 기본학설로 받아들여지면서 르브룅Charles Lebrun(1619~1690), 펠리비앙André Félibien des Avaux(1619~1695)에 의해 유행되었다. 색채분할 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되고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했다.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인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조형주의

신조형주의 新造形主義
Neo-Plasticism(영)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의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 양식과 그의 작품으로 형상화되는 예술에 관한 철학적 사상. 그는 예술은 ‘탈자연화(denatralized)’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미술작품에서 자연의 재현적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한 추상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입체주의*와 신지학 등의 영향으로 화면에서 재현적 요소들을 점차 감축해가는 작업을 지속하다가 결국에는 조형요소를 수직선과 수평선,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 백색, 회색, 검은색의 삼무채색의 8가지로 환원하였다. 보편적인 리얼리티를 구현하고자 했던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가변적이고 특수한 것에서 탈피, 불변하고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신조형주의는 양차 대전 사이에 유럽 각지에서 등장한 추상의 개념 중에서도 가장 순수성이 중시된 경우였다. 몬드리안은 철학자이자 신지학자였던 쇤마커스 박사Matthieu J.H. Schoenmaekers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신조형(nieuwe beelding)’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으며, 이는 그의 첫 출판물이자 1917~1918년에 11회에 걸쳐 《데 스틸》 지에 연재된 ‘회화에서의 신조형주의De Nieuwe Beelding in de Schilderkunst’에서부터 사용되었다. 1921년에 발표한 소책자 《신조형주의, 조형적 등가의 일반원리Le Néo-Plasticisme, Principe général de l’ équivalence plastique》는 1925년에 바우하우스* 총서의 하나로 재간행된다. 신조형주의는 1920년대의 구축주의* 운동과 디자인 및 이후의 추상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중

신중 神衆

신중은 여래상이나 보살상과 같이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대상과 신앙인을 보호하는 의무를 지닌다. 신중은 정법을 수호하는 기능뿐 아니라 대승불교시대에는 호국의 기능까지 갖게 되었다. 신중은 원래 인도의 재래신들이 불타의 자비심에 감동되어 불교에 귀의한 후 불법의 유통과 옹호를 맹세한 성중(聖衆)을 말한다. 이후 불교가 각 지역에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토속신도 신중으로 유입되었다.
인도의 신으로는 제석천*, 대범천, 사천왕상*, 팔부신장 등이 있고, 중국의 도교적인 신인 칠성과 우리나라의 산신, 조왕신이 포함된다. 중국에서 신앙되었던 신중은 《금광명경金光明經》 〈귀신품鬼神品〉과 《재천의궤齋天儀軌》에 근거한 20천중으로 이들의 명칭은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帝釋天, 다문천왕多聞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금강밀적金剛密迹,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 산지대장散脂大將, 대변재천大辯才天, 공덕천功德天, 위태천*韋駄天, 견견지신堅牢地神, 보리수신菩提樹神, 귀자모신鬼子母神, 마리지천摩利支天, 일궁천자日宮天子, 월궁천자月宮天子, 사갈라용왕娑羯羅龍王, 염마라왕閻摩羅王이다. 명대(明代)에는 긴나라*緊那羅와 도교적인 신인 자미대제紫微大帝, 동악대제東岳大帝, 뇌신雷神이 추가되어 24천신이 신앙되었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화엄신중이 신앙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민간신앙과 밀교신앙이 결합되어 크게 신앙되었다.
이러한 신중신앙은 신중탱화(神衆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중탱화는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한 모든 불전에 봉안되는 필수적인 불화로서 불전의 내부를 향하여 오른쪽 또는 왼쪽에 모셔진다.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신중은 천부, 천룡부, 명왕부로 나눌 수 있는데, 천부(天部)는 제석과 범천, 마혜수라천을 비롯한 천(天)들이고, 천룡부(天龍部)는 위태천과 팔부중을 비롯한 무장신들이다. 명왕부(明王部)에 등장하는 신들은 예적금강과 4금강, 8보살 등이다. 이들을 표현한 신중탱화의 형식은 18세기에 정착되었고, 이후 다양한 형식의 탱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신즉물주의

신즉물주의 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독)

제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운동. 개인의 내부로 침잠하려는 표현주의*와 엘리트주의적인 추상에 반대하고, 전후 혼란상을 사회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며, 사물 자체에 접근하여 객관적인 실재를 철저히 파악하려는 사실주의적인 특성을 지녔다. 1925년 만하임 쿤스트할레의 관장 하르트라우프Gustave Hartlaub가 ‘적극적이고 만질 수 있는 실재에 대한 충성을 지속해왔거나 되찾은 예술가들’의 <신즉물주의>전을 개최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명확하고 숨김없이 일상의 타락과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던 1920년대 초 베를린 미술, 문학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주로 뮌헨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경향의 전원풍으로 돌아간 카놀트Alexander Kanoldt와 슈림프Georg Schrimpf 등도 신즉물주의자에 속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가들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로츠George Grosz(1893~1959), 딕스Otto Dix(1891~1969), 샤드Christian Schad(1884~1982) 및 베크만Max Beckmann(1884~1950)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딕스와 그로츠는 철저한 세밀묘사, 강한 색채와 과장된 캐리커처* 등의 방법으로 전쟁의 공포와 도시 사회의 퇴폐적인 면, 노동자들의 소외와 자본주의의 병폐, 성(性)의 폭력적 측면 등을 가차없이 그려냈다. 이들의 조형정신은 다다*, 초현실주의*, 이탈리아의 형이상학적 회화*와 연관되며, 사실주의적이면서 환상적인 이들의 표현방법으로 인해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신즉물주의는 현실의 객관적인 기록과 초현실적인 환상의 양극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지상(技術至上), 기계숭배, 소외와 물상화 현상을 긍정하기 쉬운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건축이나 공예* 분야에서 역사적 양식의 단순한 모방을 떠나 합목적성, 실용성을 추구한 1920년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쓰기도 한다. 신즉물주의는 1930년대에 현실 비판적이고 사회적 병폐를 신랄하게 드러내는 요소로 인해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았다.

신체미술

신체미술 身體美術 Body Art(영)

신체미술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술동향의 하나로서 인간의 신체를 표현과 조형의 매체로 사용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신체를 통한 행위가 미술 전개의 계기가 되므로 행위미술이나 행동미술*과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체미술은 개념미술*의 한 부류에 속하며 언어나 여타 재료의 개입 없이 육체적인 교감이나 감각을 통해 관람자에게 접근하게 된다. 이는 1960년대의 차가운 미니멀리즘*을 거부하는 한편,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하던 신체에 대한 경향, 즉 병적인 섹스나 마약과 같은 것에 대한 미술가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주로 공공장소나 사석에서 열리는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므로 비디오나 필름에 담겨진 기록의 형태로 보존되고 전시된다.
신체미술은 주로 자학적인 마조히즘이나 정신적 또는 심령적인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전개된다. 육체의 모습을 왜곡한다든지(주르니악Michel Journiac), 자기 몸을 계획된 패턴에 따라 면도날로 긋는다든지(판Gina Pane), 구토, 찌푸리기 등의 행위를 통해 신체를 변형시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를 공격하고 인체를 새롭게 재인식시킨다. 또는 영적 체험의 일환으로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우려고 시도하거나 근동의 고대 여신상 같은 자세의 자기 모습을 흙으로 재현하는 등 신체적 행위를 통해 정신적 구도에 이르려는 작업들을 행하기도 한다.
신체미술의 선례로는 1919년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별 모양으로 머리를 깎음으로써 보여준 다다*적인 제스처나 1960년대의 만조니Piero Manzoni(1933~1963) 및 클랭Yves Klein(1928~1962)의 인체 작업들을 들 수 있다. 신체미술 경향은 조각이 애초 인간의 신체에 특별한 관심이 있으며, 조각가들 또한 인체를 날카롭게 인식하는 한편 관람자와 작품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감정이입*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조각가들이 자신들의 신체를 미술의 직접적인 매체나 주제, 대상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