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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인상

공양인상 供養人像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현실의 인물, 즉 불상에게 공양을 바치는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것. 이것을 통해 신도들은 자신의 ‘공덕(功德)이 체현(體現)’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형식을 ‘예불도(禮佛圖)’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관료와 귀족이 많으며 일반 민중들도 있는데, 불단(佛壇)의 앞, 또는 석굴입구, 전문(殿門)의 양 옆에 배치된다. 대개 불상보다 크기가 작고, 단신 또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예불도’는 여러 사람들의 배역 또는 행진의 장면이다. 예를 들면 용문석굴* 빈양중동賓陽中洞의 〈제후예불도〉가 가장 대표적이다.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제123굴에는 북위北魏의 〈남녀동공양니소男女童供養尼塑〉가 있다. 그 모습은 두 공자가 공수(拱手)를 하고 어린아이의 복식을 하고 있다. 조각 수법은 세련되었으나 형상이 귀여워 종교적 색채는 별로 없다. 산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쌍림사雙林寺 천불전千佛殿의 남녀공양인 채소(彩塑)는 조각이 정밀하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워 명대(明代)를 대표할 만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공현석굴* 제1굴 문안 양쪽에 있는 공양인 행렬상은 구도가 간단하면서 세련되었으며, 형상도 생동적이고 현재까지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공예

공예 工藝 crafts(영)

실용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겸해서 가진 조형품의 총칭. 공예는 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제조하는 공업과 미를 창조하는 예술의 두 영역이 중첩되는 곳에서 성립된다. 근대의 예술 관념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공예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아, 예술과 공업은 미분화된 채 통일되었으므로 모든 조형품이 공예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공예가 새로 인식되게 된 것은 19세기로, 특히 영국의 미술과 공예운동에 의해서였다. 일반적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조형에 한정시켜 건축에 포함시키지 않는 공예는 도예, 금공, 염직, 글라스 공예, 가구 등 그 분야가 광범위하며, 전통적으로는 수공예에 의한 것이 주가 되지만, 근대 기계화에 의한 제품도 포함시킨다. 이러한 공업제품에 대해서 현대에는 산업 디자인*이라는 독립된 조형 활동의 분야가 있다. 한편 오늘날에는 공예라는 이름 아래 실용성이 전혀 없는 자유로운 조형이 시도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포

공포 栱包

→ 두공

공필

공필 工筆

동양화를 그릴 때 표현하려는 대상물을 어느 한 구석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기법. 가는 붓을 사용하여 상세하게 그리고 채색하여 화려한 인상을 준다. 주로 정밀한 묘사를 필요로 하는 화조화*나 영모화*에 많이 사용되며 사실적인 외형모사에 치중하여 그리는 직업화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사의*(寫意)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공현석굴

공현석굴 鞏縣石窟 Gongxian(중)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서방 약 50㎞, 공현에 있는 불교석굴군. 현성의 서북 2㎞, 낙수洛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대력산 산기슭에 있다. 원래는 정토사淨土寺로 불렸으나 현재는 석굴사石窟寺로 불린다. 동(東)에서 서(西)로 대굴 5개소가 남면에 늘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 제3, 4동(洞) 사이에 〈마애대상磨崖大像〉이 있다. 약간 푸른 기를 띤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양식과 제2동과 3동의 조상기(造像記)로 미루어 북위北魏 후기(6세기 초)의 조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석굴내외에는 동위~초당 시기의 소불감(小佛龕)이 200여개 남짓 있다. 제2, 3, 4 동은 탑주굴(塔柱窟)로서 탑주사면에는 좌불의 오존감(五尊龕)이 있으며 또한 제2, 3 동에는 귀인공양자 행렬의 부조가 있다. 지리적, 시대적으로는 용문석굴*에 가까우나, 용문석굴의 불상에 비해 공현석굴의 조상은 소박하면서도 밝아서 남조양식(南朝樣式)의 영향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