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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

낙관 落款

그림의 화면 일정부분에 도장이나 글씨 등을 쓰는 것.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로 낙관낙인(落款落印)이라고도 한다. 서화(書畵)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로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글이나 인장(印章)을 찍는 행위를 말한다. 제작연도나 계절, 일시, 제작장소 등이 첨가되는 경우도 많다. 중국 원대(元代)의 예찬倪瓚(니 짠, 1301~1374)이 자신의 그림에 도장을 찍었던 것에서부터 유래하며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 이래로 많이 사용되었다. 낙관을 하는 것이나 낙관이 유행하는 것 모두가 화가의 지위 향상을 반영한다.

→ ‘관’ 참조

낙랑 미술

낙랑 미술 樂浪美術

낙랑은 중국 한漢의 무제武帝가 원봉 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중의 하나다. 현재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하나, 설치 당시의 강역은 위만조선의 옛땅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로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단이 낙랑군의 영역이라고 추측된다. 낙랑군은 한사군 중에서 위치를 변동하지 않고 한곳에 줄곧 자리잡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동방군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한사군의 400여년에 걸친 통치는 낙랑 중심의 지배를 뜻하므로, 고조선 문화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대체적으로는 한문화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건축: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와 용강의 어을동 등지의 토성이 있다. 토성리의 토성은 길이 약 709m, 남북길이 599m의 소규모로서, 그 내부에는 약간의 건물지, 포도구지(鋪道溝址)가 있다. 어을동 고성은 토성의 가장 긴 면이 150m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의 읍성이다.
공예:금속공예로는 대동강면의 제9호분에서 출토된 박산향로*(博山香爐), 용호경(龍虎鏡), 금수경(禽獸鏡),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등 한대(漢代)의 대표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청동경 등이 있다. 또한 금지환(金指環), 은지환(銀指環), 금천(金釧) 및 순금제대구(純金製帶鉤)가 출토되었다. 이 중 제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대구는 순금판 위에 7마리의 용을 누금세공*기법으로 새기고 녹색 보석을 삭감한 작품이다. 목공예 유물로는 칠기*(漆器)류가 대량으로 출토된 바 있다. 칠기류에는 안(案), 반(盤), 배(杯), 우*(盂) 등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9호 묘에서 출토된 〈금동구칠반金銅鉤漆盤〉, 왕우묘王旴墓의 〈채화칠반彩畵漆盤〉, 채협총출토의 <채화칙협彩畵漆敎> 등을 들 수 있다.

낙서미술

낙서미술 graffiti art(영)

이탈리아어로 ‘긁기’라는 뜻을 지닌 ‘graffito’의 복수형. ‘graffiti’는 벽 표면을 긁어 만든 드로잉과 이미지를 의미한다. 사실 낙서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며 그것은 인류가 문화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행해왔던 생활의 한 흔적이기도 했다. 낙서가 갖는 잠재된 해방감과 제도화된 매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또다른 비공식 표현매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찍부터 예술행위의 본질과 어느 부분 연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낙서가 미술의 주제로 등장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부터이다. 톰블리Cy Twombly(1929~ )와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같은 미술가는 낙서의 표현방법에 관심을 보였고, 프랑스인인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는 아웃사이더 아트*로서의 낙서가 내포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스페인 출신의 타피에스Antoni Tàpies(1923~ )는 도시의 벽을 주제로 한 이미지에 낙서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낙서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960년대 말이며 특히 뉴욕의 거리에는 구석구석 낙서가 범람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흑인이나 푸에르토리코인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분사식 스프레이 페인트를 통해 극채색과 격렬한 에너지를 지니고, 속도감 있는 그림과 도안화된 문자들을 거리의 벽과 지하철 등에 뒤덮어 갔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낙서가 예술로서 평가받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아트 페스티벌>이 최초였지만, 그 밖에도 몇 개의 중요한 전시회와 획기적 사건들이 실마리 역할을 하였다. 1975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낙서 미술가 연합의 전시회, 1980년에 프레디Pab Five Freddie가 워홀Andy Warhol(1928~1987)의 캠벨 수프깡통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제작한 스프레이 페인트 작품, 1980년에 열려 뉴욕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던 <타임스 스퀘어>쇼, 뉴욕 브롱크스에 있는 대안공간*인 ‘패션 모다Fashion Moda’의 전시회와 직업상담같은 형식으로 한 꾸준한 지원, 그리고 해링Keith Haring(1958~1990)같이 미술 전문교육을 받은 미술가들이 발전시킨 낙서 양식이 바로 그것이다.
1983년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보이스만-반 보이닝겐 미술관에서 최초로 대규모 낙서미술전이 개최되고 시드니 재니스의 블루-칩 갤러리에서 <후기-낙서Post-Graffiti>란 전시회가 열려, 낙서미술이 절정기에 달한 해가 되었다.

낙선전

낙선전 落選展
Salon des Refusés(프)

1863년 프랑스의 관전 심사에 낙선된 그림들이 당시의 편파적인 심사의 결과라는 여론에 따라, 나폴레옹 3세가 살롱* 옆에 낙선작들의 전람회 개최를 허락하여 생긴 전시회의 명칭. 여기에 출품되었던 마네Édouard Manet(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Déjeuner sur l’herbe> 등 종래의 도덕 관념을 타파한 시민적인 작품들은 도덕적으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황제 자신도 이 전시회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아 단 1회로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마네가 추구한 종래의 전통적인 어두운 화면을 벗어나는 선명한 색조는 무명의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네 주변에는 많은 청년 화가들이 모여들었고, 그로부터 인상주의*가 탄생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또 이 전시회는 관(官)의 심사에 의하지 않은 최초의 살롱으로서, 오늘날의 앙데팡당*전의 효시가 되었다.

낙신부도

낙신부도 洛神賦圖

중국 동진東晋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가 그렸다는 산수인물화. 젊은 선비 조식曺植(차오 스, 192~232)이 낙수洛水의 선녀 복비宓妃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은 헤어진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위魏나라의 조식이 쓴 낙신부의 마지막 부분을 묘사한 것이다. <낙신부도>는 문학과 회화의 결합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결합은 이미 한대(漢代)부터 보이며, 고개지의 <여사잠도*女史箴圖> <경거시도輕車詩圖> 같은 작품도 문학작품을 제재로 하였다. <낙신부도>는 두루마리* 그림으로, 동일한 인물을 이야기의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등장시키는 연속적인 해설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화면 구성시 형상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공간이나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취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고개지가 그렸다는 모본만 전하고 있다(워싱턴 프리어갤러리 소장이나 대북臺北 고궁박물원 소장은 모두 일부분이며, 북경北京 고궁박물원, 심양瀋陽 요녕성 박물관 소장이 있다). 또 미인도의 하나로서 낙신만을 그린 것으로는 청대(淸代)의 고낙顧洛이 그린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