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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체

대각체 臺閣體

→ 관각체

대공

대공 臺工

목조 건물의 대들보 위에 설치되어 중종보나 마루보, 도리*(道里) 등을 받치는 짧은 기둥. 형태와 형식에 따라 동자대공(童子臺工), 접시대공, 화반대공(花盤臺工), 포대공(包臺工), 판대공(板臺工), 인자형대공(人字形臺工)으로 구별된다.

대구

대구 帶鉤 dai-gou(중)

고대 유목 기마민족의 복식용 혁대를 매는 데 사용한 갈고리로,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중기~말기에 중원지역에 전해져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재료는 청동이 많고 철, 연옥으로 된 것도 있다. 초기형식은 소형으로 주조*된 부조*의 훼룡문*(虺龍文)이 드러난 것이 있으며 하남성, 산서성, 안휘성에서 발견되었다.
성행기에는 형태가 점차 둥글고 길어지며 대구의 머리가 여러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갈고리는 항상 운문(雲文)과 와문(渦文)으로 장식되었다. 때로는 금, 은 또는 옥석 등의 상감*(象嵌) 및 도금(鍍金)으로 문양을 두드러지게 했다. 크기는 일반적으로 10cm 정도로, 긴 것은 50cm에서 짧은 것은 2cm 짜리도 있다.
한대(漢代)에서는 화려한 장식은 사라지고 실질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갈고리를 제외하고는 혁대 바깥쪽에 드러나 칼을 차고 경낭(鏡囊)과 인장*(印章), 전폐(錢幣) 등의 물품을 걸 때도 사용되었다. 낙랑의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타출(打出)과 누금(鏤金), 상감기법으로 세공된 금제대구가 유명하다.

대기원근법

대기원근법 大氣遠近法
aerial perspective(영)

눈과 대상 간의 공기층이나 빛의 작용 때문에 생기는 대상의 색채 및 윤곽의 변화를 포착하여 거리감을 표현하는 기법. 선을 이용하여 깊이와 회화 공간을 표현하는 선 원근법*과 비교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색채로, 흡사 대기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면서 색채들의 단계적인 변화를 통하여 회화의 깊이감을 산출해내는 방법을 ‘대기 원근법’이라고 이름하였다.
다 빈치는 대기원근법을 선 원근법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가 흐려지거나 상실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거리에 비례한다. 그러나 이는 동일한 고도에서 색채를 보는 경우에 한한다. 고도가 다를 경우, 이러한 규칙은 적용되지 않는데, 이는 공기의 밀도가 다르면 공기가 색채를 흡수하는 정도도 다르기 때문이다”. 대기 원근법은 이미 폼페이 벽화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또 10세기에 중국화에서도 대기 원근법에 대한 해석이 나타나는데, 송宋의 산수화*에서 가장 발달하였다.
유럽에서 대기 원근법은 1000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5세기초 플랑드르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대기 원근법은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의 치밀하게 계획된 풍경화, 터너William Turner(1775~1851)의 작품들에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공간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 ‘선 원근법’ ‘왜곡 원근법’ ‘원근법’ 참조

대련

대련 對聯 tui-lien(중)

판(板)이나 종이 등에 대구(對句)의 글을 써서 대문이나 기둥의 양쪽에 부착하거나 걸어 놓은 것. 많은 경우 기둥에 거는데 ‘주련(柱聯)’ ‘영련(楹聯)’ ‘영첩(楹帖)’ ‘대자(對字)’라고도 부르며 보통 색을 칠하여 글씨, 글귀가 돋보이게 한다. 문짝에 걸어 놓는 것을 ‘문련(門聯)’ 또는 ‘문심(門心)’, 문기둥 좌우에 거는 것을 ‘광대(框對)’, 새해에 쓰는 것을 ‘춘련(春聯)’이라고 한다. 영련은 중국 오대(五代)때에 후촉後蜀의 맹창盟昶이 학사 신인손辛寅遜에게 명하여 도부판(挑符版)에 ‘신년납여경, 가절호장춘(新年納余慶, 嘉節號長春)’의 대구를 쓰게 하여 침실 문위에 써 붙인 것이 시초라고 한다. 송대(宋代)에는 기둥 위에 붙이는 것이 널리 퍼져서 경사(慶事)나 조상(弔喪) 때 이를 붙이는 것이 널리 행해지고, 명明, 청淸 이후에는 일반화되었다.

대비

대비 對比 contrast(영)

이질적인 것은 대비나 대조를 하면 강조되고 변화하여, 유동적이고 강렬하며 자극적인 효과를 유발한다. 미술 작품의 경우에 주제, 제재나 색채, 구도 등에서 대비의 효과를 보여주는 예가 많다. 한편 콘트라스트는 사진의 원판, 네거티브 필름, 포지티브 필름 혹은 인화에서의 농담(濃淡)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대상성

대상성 對象性 objecthood(영)

미국의 평론가 프리드Michael Fried가 미니멀 아트*를 리터럴 아트*로 재규정하면서 그것이 갖는 비예술적 조건을 제한한 개념. 대상성을 옹호하는 리터럴리스트의 입장과 형태를 매체로 하여 대상성을 제거시키는 모더니스트 회화*는 서로 대립한다. 리터럴 아트가 대상성으로 몰입되는 이유는 형태를 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기본적인 속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성은 ‘연극성(theatricality)’과 관련되는데, 객체로서의 작품이 주체로서의 관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터럴리스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관객이 없다면 불완전한 것이 되며, 작품은 항상 관객을 기다리는 상태에 있다. 또한 프리드의 주장에 따르면, 연극적 조건에 접근할수록 예술성은 퇴보하는데, 그것은 음악과 연극, 회화, 조각 등 개별 미술들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성은 마치 연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와 같이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함으로써 무한정한 지속(duration)의 표출을 가져오며, 이러한 지속성은 순간성(instantaneousness), 현재성(presentness)이라는 모더니즘* 개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 ‘미니멀 아트’ 참조

대소이장군

대소이장군 大小李將軍

청록산수*(靑綠山水)의 창시자로 알려진 중국 당대(唐代)의 산수화가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이소도李昭道(리 사오따오) 부자(父子)에 대한 관용적 호칭.

대안공간

대안공간 代案空間
alternative space(영)

1969~1970년 뉴욕의 그린 스트리트 98번지와 112번지, 애플 스트리트 98번지에 등장한, 미술가들을 위한 미술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소규모 비영리조직. 독립적인 대안공간들은 대부분의 미술관과 상업화랑, 미술가협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실험적 미술이 확산되던 시대에 꼭 필요한 독립된 조직으로 간주되었다. 또 대안공간은 여성,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계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아트*와 다양한 민족미술을 옹호했다.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대안공간은 미국과 캐나다의 대도시에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고, 비록 적은 수이지만 서유럽의 주요 도시에도 등장했다.
1970년대의 다원주의*는 설치* 미술,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개념미술* 등의 전시장이었던 대안 공간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대안 공간의 성격이 더욱 다양해졌다. 여전히 미술학교를 갓 졸업한 미술가들의 비디오 아트나 퍼포먼스가 대안공간에서 행해지기도 했지만, 몇몇 대안공간은 많은 직원을 거느린 조직적 기관으로 발전했고 재단이나 시당국 및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으로부터 자금지원도 받게 되었다.
최근에는 대안공간보다는 ‘미술가 조합’이나 ‘미술가가 운영하는 조합’이라는 명칭이 선호되며, 미국내의 대안공간을 대표하는 기구로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립미술가조합연합National Association of Artists’ Organizations, NAAO’을 발족했다.

대안적 디자인

대안적 디자인 alternative design(영)

대기업에 봉사하고 있는 산업디자인*에 대한 대안의 디자인*을 의미한다. 대안적 디자이너들은 대량생산과 산업화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 관심을 갖고, 좀 더 나은 디자인을 통해 그것들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또한 사회 내의 혜택받지 못한 소수를 위해 디자인 하기도 하며, 제3세계의 미개발국에 무보수 디자인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산업 예술가 및 디자이너 협회(SIAD)는 대안적 디자인 그룹을 결성하여 1976년 영국왕립미술원*에서 ‘필요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모임을 가졌다. 점차 대안적 디자인은 ‘통합적이고 포괄적이며 앞을 내다보는 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주창자이며 실행자인 파파넥Victor Papanek은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특허권과 저작권을 거부하고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신의 디자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