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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卣

→ ‘이기’ 참조

유겐트슈틸

유겐트슈틸 Jugendstil(독)

‘청춘 양식’이라는 뜻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에서의 아르 누보* 운동 양식과 경향을 가리키는 명칭. 이 명칭은 1896년부터 뮌헨에서 발행되고 있던 미술 잡지 《유겐트Jugend》에서 유래한 것으로, 3~4년 후 그래픽 디자인으로부터 양식 전체의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종래 공예의 모방적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유겐트슈틸은 식물적 요소-꽃, 잎 등을 주로 하여 곡선의 리드미컬한 패턴과 변화에 의해 추상화, 양식화되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의 아르 누보에 비하여 중후한 양식이 되었지만, 이 같은 평면성에 대한 신감각과 디자인*의 의지는 현대 미술 탄생의 한 원천이 되었다.
그 선구자는 벨기에의 건축가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900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장이 됨)로, 그의 폴크 방크 박물관(1902) 설계가 독일의 공예계와 건축계에 준 자극은 컸다. 그 밖에 리에메르 슈미트,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 베른하르트 판코크Bernhard Pankok, 브루노 파울Bruno Paul, 오토 에크만Otto Eckmann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유기적 건축

유기적 건축 有機的建築
Organic Architecture(영)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의 건축개념으로서,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특성이 건물의 개별적인 요구에 따라서 자연과 흡사하게 성장하는 것과 같은 건축 형식을 일컫는다. 이 개념은 자연 형태의 모방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라이트의 건축철학의 진수는 “건축 문제의 내면적 형상은 항상 그 자체 속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건축문제에 심오한 통찰력을 갖게 하는 인식인데, 이 말은 건축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유도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라이트가 새로 만든 개념인 ‘유기적 건축’은 “모든 선입견과 적절함과 부적절함 및 단지 외관만을 위한 법칙과는 구별되는 각 개인을 위한 각 개인의 건축”을 말하며, 이와 같은 건축적인 전제에서 라이트는 1909년 이전에 주택들을 설계하였고 그것은 이와 유사한 방향을 추구하였던 유럽 건축가들의 표본이 되었다.

유기주의

유기주의 有機主義
organisme(프)

건축이나 조각*, 회화*, 디자인* 등에서 기능적 혹은 기하학적 경향에 대해 유기적 생명감을 중시하는 경향을 뜻한다. ‘유기적’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이미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가 페루치Baldassare Peruzzi(1481~1536)의 <빌라 파르네시아>를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탄생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평가했듯이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다. 근대에 와서는 미국의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가 유기적 건축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말하는 유기적 건축은 국제건축 양식이나 기능주의 건축에 비해 자연, 생물, 인간에게 보다 밀접하게 조화, 융합된 성격과 형태를 갖춘 건축이라는 의미이다. 산업주의, 혹은 경제주의 또는 기계론적인 근대주의에 바탕한 기술 편중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예술성, 사상성, 자연 재료의 사용, 환경과의 조화를 건축의 기본으로 간주한다.
CIAM(근대건축국제회의)*을 중심으로 한 분석적인 기능주의의 교리에 심하게 대립한 1930년대의 라이트 등은 《유기적인 건축을 지향하여》를 저술해 이것을 지지하고,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주의 건축의 대립 개념으로서 자주 쓰인다. 20세기 비평 용어로서 ‘유기적’이란 명백하게 정의된 의미는 아니지만, 예술 작품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생생하고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진 조화로운 전체임을 주장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유기체적 추상

유기체적 추상 有機體的抽象
organic abstraction(영)

추상*은 기본적인 양식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기하학적이거나 하드엣지* 같은 이성적인 추상으로 구축주의*나 구체미술*과 같은 미술운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유기체적(organic)’인 양식으로 알려진 보다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추상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추상 작품은 꽃의 형태나 남성과 여성의 성기(性器) 및 다른 생명체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생물 형태적(biomorphic)’ 추상이라고도 불린다. ‘유기체적 추상’을 행한 대표적인 사조로는 독일 표현주의* 중 청기사파* 화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의 작품들과 추상표현주의*를 꼽을 수 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é d’Habitation(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설계하여 건축한 마르세유에 있는 건축물.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이 건물은 1920년대 건축의 평평한 건물 표면의 미적 특성을 거친 시적 표면 특성을 지닌 ‘베통 브뤼(béton brut, 노출 콘크리트)’로 대치함으로써 새로운 건축 개념을 제시한 건물이었다. 이것은 또한 미래사회에 대한 르 코르뷔지에의 비전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 반면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그 자체상의 모습으로만 고찰된다면 그 요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도시 주변이 급속히 개발되어지는 대도시의 경우,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고층집합주거 블록을 건설하는 것이 적절한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대담성은 한 지붕 밑에 1,600명을 수용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인 기능 수행이라는 점에 있는데, 이 주거단위의 가장 흥미로운 시도는 구매시설을 가로나 지상면에 설치하지 않고 그 건물의 중앙층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보면 이 중앙상가는 2층 높이의 수직 루버에 의해 그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루버는 건물의 중앙부에 있는 계단실에 수직으로 나란히 있는 네모창과 함께 건물외관 전체에 활기를 주면서 스케일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17층에는 150인용의 육아실이 설치되어 있고 하나의 램프가 옥상 테라스에 직접 통해 있다. 거기에는 필로티* 위에 만들어진 휴식실이나 얕은 풀 등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는 여러 가지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24×165m의 넓이를 가진 옥상 테라스의 다른 부분은 성인의 사회활동을 위해 계획되어 있다. 일부 옥외 체육관이 있고 건물의 북쪽 단부에는 강한 북풍을 막기 위해 큰 장벽이 있으며, 이것은 야외 연극 공연때에는 배경이 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 건물의 특이하고 훌륭한 점은 설계기본 모듈을 사용한 그 조형적 특질에 있다. 르 코르뷔지에에 의해 노출콘크리트, 즉 베통 브뤼의 무정형적인 재료는 천연의 암석같은 특색을 갖게 되었다. 그가 이 건물의 개관사에서 ‘이 건물은 모든 부분이 일치해서 외치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콘크리트 형틀작업의 흔적이나 예기치 않은 흠, 조악한 작업솜씨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그 표면을 평활하게 손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콘크리트면에 생기를 주기 위해서 거푸집 그대로의 흔적을 그냥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우처럼 철근콘크리트가 자연석이나 목재나 테라코타*와 같은 자연재료에 비견될 만큼 그 질감을 살려서 철저히 사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수년 후 영국에서 이런 접근방법을 출발점으로 한 브루탈리즘*이라 부르는 건축적 경향이 일게 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의 현대건축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니트 원

유니트 원 Unit One(영)

1933년에 내시Paul Nash(1889~1946)에 의해 결성된 영국의 전위예술가 그룹. 건축가, 화가, 조각가 등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영국에 진정한 현대 미술을 보급할 의도를 가진 예술가들이 모여 1934년 런던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그룹에는 공통된 하나의 미학 지지자들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모인 장소라 말할 수 있다. 비평가 리드Herbert Read(1893~1968)가 그 이론적인 추진자로, 그는 예술가란 종래의 좁은 껍질 속에 갇히는 일 없이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제작해야 한다고 이 그룹의 입장을 대변했다. 즉 영국의 지리적 조건에서 보아도, 유럽 및 미국의 전위 운동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브리티시 카운슬British Council’이 1934년에 설립되었다.
1948년의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의 유럽 순회전은 이것의 성과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터너William Turner(1775~1851) 이후 약 1세기 동안 고립되어 있던 영국은 예술의 국제적인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11명의 멤버는 화가 내시, 니콜슨Ben Nicholson, 워즈워드Edward Wardsworth, 버러Edward Burra, 암스트롱John Armstrong, 헬리어Tristan Hellier, 존 빅John Bigge과 조각가 무어Henry Moore, 헤프워드Barbara Hepworth, 그리고 건축가 코츠Wells Coates, 루카스Colin Lucas였다. 유니트 원은 추상의 추종자들과 펜로즈Roland Penrose의 노력 덕택으로 런던에 알려지기 시작한 일군의 초현실주의 지지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로 인해 일년 쯤 지나 스스로 와해된다. 비록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유니트 원의 활동은 세계 대전 이전 영국의 미술계에서 급진적인 반(反)아카데미즘의 출현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유리질화

유리질화 琉璃質化 vitrification(영)

도자기 태토가 유리질로 되는 것. 한두 가지 물질을 녹는 점까지 열을 가한 다음 물이나 땅 속에 넣어 식힐 때 유리질화하는 것으로, ‘Fritting’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독성이 있는 납을 무독성으로 만드는 중요한 처리과정이지만, 유약을 마련하는 데에도 널리 사용한다.

유미주의

유미주의 唯美主義
Aestheticism(영) Esthétisme(프)

미(美)가 인생에 있어 가장 높은 단계의 것이라 하여 미를 위한 미,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입장. 미와 예술은 오직 자족적이며 자율적이고 자기 목적적으로서, 사회, 정치, 종교 등 어떤 기준들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탐미주의’라고도 하며 원리적으로는 순수주의에 통하는데 영국, 미국에서는 순수 미학, 순수 유미주의라고도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도 미를 예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귀족적인 유미주의의 실천이다.
부르주아적으로는 향락주의 생활 조건의 미화(美化)를 가리키며 종교적, 도피적이며 자연적 인간의 소박미에 안식과 구원을 구하는 것 등 일률적인 것이 아닌데, 인간이 노력할만한 최고 목적은 순수미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인상주의*, 상징주의*에서 볼 수 있는 세기말적, 악마적, 관능적 유미주의나, 와일드Oscar Wilde, 페이터Walter Pater 등과 같은 엑조틱한 것, 또는 북유럽 신화, 슬라브 정신, 켈트 정신과 결부된 민족적 신비주의 또는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심리적 상징주의 등도 포함된다.
미술에서는 날카로운 색채보다는 파스텔조의 음영을, 문학에서는 정확한 말의 사용보다는 암시적 사용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예술적 기준의 자율성은 미적 판단 기준을 도덕적 선이나 유용성, 그리고 쾌락으로부터 구별한 칸트Immanuel Kant에 의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이어 괴테Goethe, 쉴러Friedrich Schiller, 셸링Friedrich Schelling과 영국의 콜리지, 카알라일Thomas Carlyle, 미국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포Edgar Allan Poe 등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소개, 강조되었다. 에머슨은 그의 시 <로도라Rhodora>에서 ‘눈이 보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아름다움이란 있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스탈 부인, 철학자 빅토르 쿠쟁V. Cousin과 그 제자 테오필 주프로아가 있다. 쿠쟁은 소르본 대학에서 진, 선, 미에 대한 강의(1818년, 출판은 1836년)를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티에Théphile Gautier는 《모펭양》(1835) 서문에서 ‘예술이란 그 미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더라도 미적인 것 외에 여하한 가치를 위해 진력해서는 안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보들레르C. Baudelaire로부터 말라르메Stéphane Malarmé에 이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역시 의도적으로 미적 가치를 중시했다. 그렇지만 보들레르는 ‘도덕을 벗어나는 데 있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유치한 유토피아적 이상’에 반대했다. 공쿠르 형제Edmund & Jules de Goncourt들은 ‘회화란 눈과 감관(感官)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신경의 즐거움 그 너머의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1870~1880년대에는 라파엘전파*의 특정 요소들에 의해 고취된 초감수성이 페이터에 의해 공식적 재가를 얻었다. 그는 《르네상스*》(1873)의 결론에서 ‘시적 열정, 미에의 열망,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사랑’ 등 감수성을 고취시켰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1891) 역시 미적 체험의 우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반동은 모리스William Morris와 레다비William Richard Lethaby의 공예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러스킨John Ruskin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난 예술에 반대했으며, 휘슬러James Whistler(1834~1903)와의 예술지상주의에 관한 논쟁은 유명하다. 이어서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도덕 기준과 일상인으로부터 유리된 이른바 순수 미술을반박하였다.
예술이 종교나 정치, 사회 등 어떠한 다른 동기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편향성은, 시각 예술의 가치를 그 형식적 속성에 두는 클라이브 벨Clive Bell이 주장한 ‘형식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에서 그 잔영이 엿보이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거의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미적 기준이 자율적이며 아름다운 예술의 창조 및 감상은 자기 보상적 행위라는, 보다 완화된 형태의 유미주의는 20세기 미학적 견해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유보

유보 遺寶 klad(러)

구소련 고고학에서 주인이 숨겨 놓은 물품을 뜻하는 말. 대개의 경우, 이 유보는 땅 속에 묻혀 있다. 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 시대에는 의식용, 무기, 장신구 등이, 철기 시대에는 주로 귀금속이나 보석, 화폐 등이 은닉 대상이었다. 사회적으로 큰 변란이 있을 경우에 자주 나타나며, 러시아에서는 1230~1240년대 몽골 침입기나 17세기 대혼란시대의 것이 특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