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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

후광 後光 glory(영) gloride(프)

‘할로(halo)’ 또는 ‘님부스(nimbus)’라고도 한다. 성인이나 사람의 머리를 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신성한 빛 님부스는 아티카의 많은 꽃병에서 그리스의 신들, 특히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의 머리에서 화환 모양의 빛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이 빛으로 된 왕관으로 변형되어 이집트의 프톨레미우스 왕조의 왕들이 처음으로 신성의 상징으로 채용하였고 후에 로마의 황제들이 1세기경의 동전과 화폐에서 사용했다.
기독교 미술의 화가들이 사용한 단순한 원형 후광은 아마도 로마의 초상화*에서 유래된 것 같다. 폼페이의 프레스코*에서 이러한 단순한 후광이 몇몇 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기독교의 황제들은 이교도 황제 숭배와 연관된 이러한 왕관을 용도를 바꾸어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4세기 중반부터 황제에게나 쓰이던 이러한 상징이 그리스도에게 쓰여졌고, 4세기 말부터는 신의 어린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후광으로 장식되었다. 5세기경에는 천사들에게도 쓰여졌고 6세기에는 동정녀, 사도, 그리고 다른 성인들에게도 관습적인 상징으로 쓰여졌다. 이집트에서는 사각형의 님부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후광은 성자와 같은 등급의 사람만이 아니라 생존 인물에게도 쓰여졌으며, 그것은 그가 고매한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광은 중세 회화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는데, 장식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한 신분임을 나타내려는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15세기의 화가들은 이것을 크게 중요시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원근법*상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견고한 물체로 취급하였다. 이후에는 구성에 있어서 그 중요성이 훨씬 감소되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와 티치아노Tiziano(1485~1576)는 후광을 완전히 배격하였는데, 후에 반종교개혁 화가들이 다시 도입하였다. 1~2세기에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받던 간다라* 조각에서도 이러한 원형의 후광이 불상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와 극동지방도 이것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기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영)

영국의 미술평론가 프라이Roger Fry(1866~1934)가 1910~19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 개최한 전시회인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 그러나 특정한 예술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네Claude Monet(1840~1926),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누아르Auguste Renoire(1841~1919), 루소Henri Rousseau(1577~1640) 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904~1948) 세 명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3인 모두 초기에는 인상주의에 참가했으나, 세잔느는 인상주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주의*로의 길을 열었고, 반 고흐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써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주의*로의 길을 마련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서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의의가 있다.

후기형식주의 미술

후기형식주의 미술 後期形式主義美術
post-formalist art(영)

1968년 이래 잭 번햄 Jack Burnham이 사용한 용어. 형식주의*는 대상의 형식적인 속성, 물신숭배(fetishism)적인 기법, 그리고 광범위한 연금술적인 방식에 대한 강조로 설명될 수 있다. 반면 후기형식주의 미술은 대상보다는 체계에, 결과보다는 과정에, 그리고 세계와의 밀접한 상호교통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많은 작가들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영향이 형식주의 미술의 반동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후기형식주의 미술’이라는 말은 시스템 아트와 개념미술*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후기회화적 추상

후기회화적 추상 後期繪畵的抽象
Post-Painterly Abstraction(영)

‘회화적 추상 이후의 추상’으로도 불린다. 1964년 미국의 평론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스스로 기획한 전시회에 붙인 이름이 일반화된 것. 여기에서 회화적*이란 독일의 미술사학자 뵐플린Heinrich Wölfflin(1864~1945)의 개념을 원용한 것이다. 뵐플린은 ‘회화적’이라는 개념을 바로크 미술*에 대해서 쓰고 있으나, 그린버그는 이 개념을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등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해서 쓰고 있다.
탈회화적이란 색채의 명암의 대조*가 강하고, 터치*나 페인트가 뜨겁게 교차하는 추상표현주의의 다음에 일어난, 차가운 추상 계열의 작품을 가리킨다. 즉 ‘회화적’이었던 추상표현주의를 정리하고 초월하는 새로운 회화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폴록이나 드 쿠닝을 무조건 비판의 목표로 삼거나, 추상표현주의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는 액션 페인팅*을 부정적으로 승계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액션 페인팅이 지니고 있는 우연성을 미학적으로 순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루이스Morris Louis,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젠킨스Paul Jenkins, 올리츠키Jules Olitski, 놀랜드Kenneth Noland, 켈리Ellsworth Kelly, 스텔라Frank Stella, 영거맨Jack Youngerman, 핼드Al Held, 푼즈Larry Poons 등으로 대표되는 이 계열의 추상은 명확한 형태를 지니고, 명도 높은 맑은 색면에 의해 구성되며, 작가의 개성적 표현은 가능한 한 억제시킨 것이 특징으로 주로 하드엣지* 계열의 표현 경향이다.

후소회

후소회 後素會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생들이 1936년에 발족한 동양화 그룹. 후소회는 공자孔子의 《논어論語》 중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에서 유래하였다. 주로 김은호의 화숙에서 수학한 백윤문白潤文, 김기창金基昶, 장우성張遇聖, 이유태李惟台, 조중묵趙重顯, 한유동韓維東에 의해 정기적인 동문전 개최로 친목을 도모한 1930년대의 의욕적인 청년화가의 모임으로, 1943년까지 총 6회의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해방된 뒤에도 1950년과 1971년, 그리고 1984년에 총 3회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후스마에

후스마에 襖繪(일)

→ 장벽화

후지와라시대 미술

후지와라시대 미술 藤原時代美術

→ 헤이안 후기 미술

후진

후진 後陣 chevet(프)

고딕* 양식의 건축에 있어서 내진*, 애프스*, 회랑*과 함께 흔히 방사형 예배당을 갖고 있는 성당의 돌출한 동쪽 끝 부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