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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대 미술

요대 미술 遼代美術

요(遼, 916~1125)는 내몽골 동부에 살던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나라로, 건국 이전부터 당唐의 영주營州(현 요녕성 금주錦州의 조양朝陽 부근)를 통해 당의 문화를 숭상하고, 태조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후, 태종 회동 원년(會同, 938)에는 후진後晉으로부터 하북성, 산서성 북쪽을 할양 받아,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강국이 되었다.
건축: 궁성은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 남경南京 석진부析津府,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 서경西京 대동부大同府의 오경을 두었다. 상경과 중경은 내몽골에 있었는데, 현재 성벽의 흔적은 남아있고, 동경은 요녕성 요양 부근, 남경은 지금의 북경 서남 부근, 서경은 산서의 대동 부근에 있었다. 거란족의 고유한 건축은 후세의 몽골 민족과 같은 조립식의 궁려(穹廬)였는데, 주요한 궁로는 출입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중국계 건축은 당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했는데, 그것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 예는 하북성河北省 소현의 〈독락사獨樂寺 관음각觀音閣〉(984)이고, 그 외에는 요동성 의현의 〈봉국사 대웅전〉(1020경), 하북성 보저현寶抵縣의 〈광제사廣濟寺 삼대사전三大士殿〉(1025), 산서성 〈대동사 하화엄사의 박가교장薄伽敎藏〉(1038)과 〈해회전海會殿〉 〈보현전普賢殿〉, 하북성 신성현의 〈개선사開善寺 대전大殿〉, 하북성 역현易縣 〈개원사開元寺 관음전觀音殿〉 〈비로전毘盧殿〉 〈약사전藥師殿〉 등이 11세기부터 요의 몰락 직후인 12세기 초까지 목조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들이 독락사 관음각과 다른 점은 당양식을 기조로 하면서 다소 다른 경향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탑*으로는 산서성 응현應縣의 〈불궁사佛宮寺 석가탑釋迦塔〉이 있는데, 이 탑은 중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으로, 팔각오층석탑이다. 전탑은 팔각첨탑이 압도적으로 많고 팔각층탑(八角層塔)은 적다. 팔각층탑은 내몽골의 〈소오달맹昭烏達盟, 백탑자白塔子의 백탑白塔〉, 호화호특呼和浩特 동쪽 백탑역 남방의 〈만부화엄경탑萬部華嚴經塔〉, 하북성 탁현의 〈운거사탑雲居寺塔〉 등인데 각 층의 외벽에 조각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팔각첨탑의 예로는, 북경北京의 천녕사天寧寺, 탁현의 보수사普壽寺, 통현通縣의 〈연등불사리탑燃燈佛舍利塔〉, 요녕성 서부 금현錦縣의 광제사, 의현 가복사嘉福寺, 동부 심양의 〈무구정광사리불탑無垢淨光舍利佛塔〉(1044)등과 더불어 요의 상경성 유적과 중경성 유적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산재한다. 동서 쌍탑으로는 〈북진현北鎭縣 숭흥사崇興寺 팔각십삼첨쌍탑〉의 한 예가 전한다.
조각:불상*으로는 각지에 많이 남아있는 전탑에 장식된 것, 내몽골 영성현寧城縣에서 출토된 응력應曆 7년의 명문*이 있는 석조여래좌상, 하북성 소현의 계현 독락사 관음각에 있는 본존, 소조십일면관음상, 양협시보살상, 산서성 대동大同의 대화엄사大華嚴寺의 불상 등이 있다. 이 불상 등은 모두 균형이 잘 잡혔으며 얼굴생김이 온화하면서도, 단정, 엄숙하고 풍만하여 당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요소주의

요소주의 要素主義
Elemantarism(영)

요소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대 반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1883~1931)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신조형주의*Neo-Platicism의 변형이라 볼 수 있다.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이 화면에서 직각만을 고집한 반면 요소주의에서는 수직 수평의 관계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버렸다. 반 되스부르크는 사선이라는 불안정한 상태를 만드는 요소를 도입하여 화면에 운동감을 주고자 하였다.

요철법

요철법 凹凸法

동양회화에서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먹이나 채색을 써서 명암의 단계를 번지듯 점진적으로 나타내는 기법. 서방의 지중해 지역에서 유래되어 북인도와 중앙아시아* 등을 거쳐 극동으로 전래되었다 하여 ‘태서법(泰西法)’이라고도 한다. 중국 육조(六朝)시대의 장승요張僧繇(즈앙 썽야오)가 금릉金陵(현 江蘇省 南京)에 있는 일승사一承寺에서 ‘천축법(天竺法)’을 써서 입체감의 효과를 강조한 그림을 그렸는데 멀리서 보면 요철처럼 빛나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제로는 평탄하다는 것이다. 장승요가 요철법의 전통을 확립한 이후 당초(唐初)에 위지을승尉遲乙僧(웨이츠 이썽)이 공덕, 인물*, 화조*를 그렸는데, 모두 외국의 사물들로서 현란한 염색에 음영이 있고 입체감이 강하여, ‘요철화파’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런 종류의 회화 작품을 ‘요철화’라고 간략하게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에서 요철법의 초기 단계를 볼 수 있다.

용 龍 nāga(범)

팔부중* 가운데 하나. 인도 신화에서 뱀을 신격화한 동물. 용에 대한 신앙은 아리아족의 침입 이전 고대 인도의 나가족 사이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나가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나가가 불교의 호법신으로 수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용은 인도 원주민의 사신(蛇神)숭배사상과 중국의 용신앙이 결합되어 전래된 것이다. 중국에서 용은 상상의 동물이자 상서로운 동물(靈獸)로서, 비를 내려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황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선승들에게 용은 선정(禪定)에 이른 자에게 나타나는 진리의 순간을 상징한다. 송대(宋代)의 목계牧谿(무 시)가 그린 용이 유명하며, 보스턴박물관 소장 진용陳容(츠언 르옹)의 〈구룡도九龍圖〉(1244)는 진필(眞筆)로서 송대의 역작이다.
한국에서 용에 관한 신앙은 신라시대부터 호법, 호국용(護法, 護國龍)으로서 신앙되었으며, 천령(天靈), 오악명산(五岳名山)과 함께 대천용신을 섬기는 팔관회(八關會)와 용왕도장(龍王道場)들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에 용을 그려 행했다는 기록을 볼 때 용신신앙이 뿌리깊었음을 알 수 있다. 신중*탱화에 표현되는 용왕의 형상은 제왕의 복식에 얼굴은 용눈썹, 용수염으로 덮여 있고, 불꽃이 올라오는 구슬이 있는 관을 쓰고 손에는 용뿔을 들고 있다.

용문석굴

용문석굴 龍門石窟
Long-wên(중)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남쪽으로 14km 정도 이수伊水를 따라 내려가면 동서 양안의 석회암 산허리에 위치한 불교석굴이 나온다. 그 암벽이 마치 우뚝 솟은 궐문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궐(伊闕)’ 또는 ‘용문(龍門)’이라 불렸다. 커다란 굴은 서산(西山)에 28개, 동산(東山)에 7개, 그 외에도 2,000여 개 정도의 작은 굴과 감실이 있다. 북위北魏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태화 18년(太和, 494)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 북송北宋 등 각 시대마다 계속하여 조성되었다. 서산(西山)에는 가장 오래된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선무제가 발원한 빈양동(賓陽洞)과 연화동(蓮華洞), 위자동(魏字洞, 제17동) 등 북위 말기의 석굴이 많다.
운강석굴*에 비해 탑굴이 없는 불상중심의 석굴뿐이지만, 불상은 중국식 복식을 한 상현좌*(裳懸座)가 발달했다. 빈양중동이 용문 북위굴 중에서는 최대이다. 빈양, 남북동과 약방동(藥方洞)의 건설은 북위 때 시작되어 북제, 수까지 계속되었다. 초당 전기에는 위왕태魏王泰(웨이 우앙타이)가 빈양 3동을 다시 보수했고, 재발동(齊秡洞)을 만든 후 그곳에 저수량褚遂良(주 쑤에리앙)이 쓴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를 세웠다.
초당 후기는 용문석굴의 최성기로, 경선사동(敬善寺洞), 쌍동(雙洞, 제7, 8동), 만불동(萬佛洞), 사자동(獅子洞), 혜간동(惠簡洞), 노용동(老龍洞, 제12동), 봉선사동(奉先寺洞)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당의 고종高宗이 발원한 봉선사동의 비로자나불*은 이 시기 최대의 것으로, 함형 3년(672)부터 상원 2년(675)까지 만들어졌다. 수, 당의 굴은 서산 북쪽 끝에서 시작되었는데, 측천무후 시대(690~705) 말기에 정토동(淨土洞), 극남동(極南洞) 등이 남쪽 끝까지 이르러 서산에는 더 이상 석굴을 뚫을 곳이 없게 되었으므로, 동산(東山)에 간경사동(看經寺洞), 뇌고대동(擂鼓臺洞) 3동 등 여러 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당의 석굴은 대부분 성당(盛唐)까지 만들어졌는데, 그 후로는 쇠퇴하였다. 그리고 북위의 석굴에는 불상 외에 불상 조성에 관한 글을 돌에 새긴 것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은 〈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 〈용문오십품龍門五十品〉으로 불린다.

용산문화

용산문화 龍山文化

→ ‘중국 신석기시대 미술’ 참조

용천요

용천요 龍泉窯
long-quan-yao(중)

절강성浙江省 여수麗水 지구 및 서강西江 연변에 위치한 도요*지. 그 중에 용천현龍泉縣의 경내에 가장 밀집했는데 용천현의 대요촌大窯村에서 제작된 도자기의 질이 가장 좋았다. 북송대(北宋代)에 성립되어 남송南宋, 원元, 금대(金代)에 이르기까지 흥성했고 명明 중기 이후에 점차 쇠퇴하여 청淸나라 중엽에 폐요됐다. 생산품은 청자*가 유명하다. 북송대에 유약이 현저하게 세련되어졌고 남송 후기 전성기에는 옥같은 유색(釉色)과 고아한 조형의 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인이 ‘침청자砧靑磁’라고 부르는 용천요의 방망이 모양의 청자는 벽옥(碧玉)보다 아름답고 밝은 유색으로 독특하게 아름다운 청록색을 보여준다. 원대(元代)에 들어서는 일변하여 장식이 많아지고 다양해졌고, 명대(明代) 성화(成化), 홍치 연간(紅治) 이후에 점차 쇠락했다. 용천요의 청자는 13~14세기경에 생산량이 상당히 많아져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수출되었다.

용호도

용호도 龍虎圖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용*과 호랑이를 그린 것이다. 용이나 호랑이는 상 주(商周)시대의 청동기 문양 속에 나타나 있을 정도로 오래된 회화소재이다. 예부터 용은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비유되어 왕(王)이나 물을 다스리는 용왕(龍王)을 뜻하기도 하는 등 숭배의 대상이었다. 호랑이 역시 삼재(三災)를 쫓아 주는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동양에서는 물에는 용왕이 있고 산에는 호랑이가 있어 자신들을 액운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용호도는 이러한 믿음이나 역술 시문(詩文) 등에서 벽사나 위력의 상징으로 다루어지던 용과 호랑이를 회화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용호도는 고대부터 단독으로 또는 사신*도(四神圖)의 하나로 그려졌다.
당대(唐代) 이후 감상화 위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용그림의 진용陳容(츠언 르옹), 호랑이 그림의 포가包家(파오 치아)와 같은 전문화가도 나타났다. 용과 호랑이를 함께 대치시켜 그린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남송南宋 목계牧谿(무 시)의 그림이 유명하고 두 폭의 나한도에 용과 호랑이를 나누어 그린 것도 있다. 한국의 용호도도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청동기의 문양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우 盂

→ ‘이기’ 참조

우미

우미 優美 grace(영)

우미는 종종 협의의 미(das Schöne), 즉 순수미와 같은 의미 내지 이에 가까운 개념으로 고찰되며, 그 의미도 한편으로는 숭고*와, 다른 한 편으로는 추*와 대립되는 미적 범주*이다. 또 우미와 미*를 각기 구별하기 위해서 우미와 숭고를 대립시키는 경우도 있다. 우미는 미의 개념과의 근사성 때문에 고전적 예술의 미적 특성으로서, 특히 조형예술에 입각해서 논해진 적이 많았지만, 이를 일반화하여 이후 우미론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쉴러Friedrich von Schiller이다.
쉴러는 우미를 우선 객관적이고 우연적인 운동의 미이면서도 인간 독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 있어서는 신체적 운동도 정신의 표현이며, 여기에서 표현된 미는 도덕성을 함유한 광의의 인간적 태도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견해로부터 ‘아름다운 혼(Schöne Seele)’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우미의 특성을 설명했다. 즉 쉴러는 이성과 감성, 의무와 경향의 완전한 조화*인 아름다운 혼의 현현에서 우미를 찾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미하다고 말해지는 미적 대상은 유려, 섬세, 조화적인 쾌를 그 특징으로 한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의 <마돈나> 등이 우미한 대상으로 자주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