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워싱턴 색채파

워싱턴 색채파 Washington Color Painting(영)

1962년 워싱턴의 현대미술관에서 동명의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굳어진 명칭.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1912~1962), 케네드 놀랜드Kenneth Noland(1924~ ), 진 데이비스Gene Davis, 폴 리드Paul Read 등이 이 전시회에 참가했다. 따라서 막연하게 이들의 회화 경향을 가리킨다. 이들은 워싱턴에 거주한다는 점과 대부분이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을 뿐, 스타일과 취향은 다양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을 총괄해볼 때 본질적으로는 기하학적이며 하드엣지*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서 색채의 시각적 효과를 강조했다. 특히 아크릴 물감은 고유의 투명성과 반투명성 때문에 이 워싱턴파의 화가들로 하여금 표현적인 회화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들의 작품은 현대의 시각적인 하드엣지의 회화보다는 훨씬 로맨틱하고 직관적인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워크숍

워크숍 workshop(영)

대가를 중심으로 많은 제자들이 모인 집단 작업장. 때로는 작품이 대가 자신의 육필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가리키기 위해, 그의 ‘워크숍’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한 화가의 자필작품과 그의 조수나 도제들의 작품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15~16세기 대부분의 계약에서는 대가가 작품(alterpiece)의 주요부는 스스로 그릴 것을 서약하지만, 장식부나 프리델라(predella)는 워크숍의 다른 회원들을 시켜도 괜찮도록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진정성에 관한 논의에서 종종 행해지는, 예술가 자신의 육필 작품과 그 조수들에 의한 작품 간의 엄격한 분리를 초기의 대가-장인들의 관계에서보다는 19세기에 대두된 예술가의 개성의 개념에 좀 더 적합한 것이다.
워크숍의 조직은 지도 인물이 어느 단계에나 간섭할 수 있는 원활한 협동 작업을 목표로 한다.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가 칼턴 경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나 있듯이, 대가가 그림에 단지 끝손질만 했다고 하더라도 그 그림을 대가 자신의 작품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라파엘로Rafaello Sanzio(1483~1520)를 비롯한 과거의 위대한 대가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넬러Sir Godfrey Kneller(1646~1723)와 레이놀즈Sir Joshua Raynolds(1723~1792) 같은 초상화가들은 초상에서 장식과 의상을 그리는 조수팀을 따로 고용했다. 그 후 장인의식이라는 이상의 쇠퇴와 더불어, 비평가들은 예술작품이 한 조직팀의 산물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현대에도 이러한 유기적 협동 작업은 건축이나 산업디자인* 그리고 영화 등에서 좋은 결과를 낳고 있다. 예컨대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만화 영화는 협동 작업의 결과로서 탁월한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원과 사각형

원과 사각형 Cercle et Carré(프)

쇠포르Michel Seuphor(1901~)와 토레스-가르시아Joaquin Torres-Garcia(1874~1949)에 의해 1929년 파리에서 설립된, 추상미술*을 옹호하는 그룹 및 정기 간행물의 명칭. 쇠포르는 새롭게 전개되는 추상미술을 열렬히 지지하는 작가이자 비평가였으며,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화가 토레스-가르시아는 처음에는 퓌비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1824~1898)의 영향을, 그 후에는 클레Paul Klee(1879~1940)와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24년부터 1932년까지 파리에서 살았고, 그 후 몬테비데오에서 《세르클 에 카레》의 발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다소 신비주의적으로 추상미술 속에서야말로 인간이 육욕과 지식이란 방해물로부터 도피할 수 있으며, 완전하고 충분한 감각의 상태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파리에서 추상주의를 확립하고 선전하기 위해 시작된 원과 사각형 그룹은 몬드리안의 성명서가 포함된 동명 잡지(3호까지 출간)에 실리면서 등장하였다. 23갤러리에서 열린 1930년 4월의 전시회를 통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를 중심으로 기하학적 추상과 구성주의의 작가들이 집결한다. 그러나 반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1883~1931)와 엘리옹Jean Hélion이 구체예술*Art Concret을 주창하면서 분열되었고, 쇠포르가 병약해지면서 1931년에 활동이 중단된다. 그룹 자체의 존속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원과 사각형 그룹은 지배적이었던 구상에 정면으로 반발하였으며, 국제적인 추상파 결집을 기치로 한 ‘추상-창조*Abstraction-Création’ 그룹으로 이어지면서 이후의 추상미술 운동을 더욱 견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근법

원근법 遠近法 perspective(영)

어원인 라틴어의 아르스 페르스펙티바(Ars perspectiva)는 페르스피케레(perspicere, ‘투과하여 보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공간 중의 물체를 전체와 관련지어 포착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인데, 삼차원의 현실을 이차원의 평면(화면) 상에 재현하는 회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건축, 정원, 도시계획 및 무대장치 등의 시각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사용하는 개념이다.
서양에서는 사실을 지향하는 고전, 고대와 근세의 미술에 있어 원근법에 대한 관심이 특히 높아졌다. 측면시(側面視), 수족(手足) 교차와 단축(短縮) 등의 표현, 특히 배경으로 되어 있는 건축과 풍경의 묘사는 이미 폼페이 벽화(기원전 1세기) 등에 명확한 유례가 있고 비트루비우스Vitruvius에 따르면, 무대 장치의 원근법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화가 아가타르코스Agatharkos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양의 원근법은 회화를 구성하는 색과 선의 두 가지 요소에 따라 각각 발전했다. 그 중 ①색채 원근법은 색의 심리 효과를 화면에 응용해서 원근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적극성의 인상을 주는 빨강은 가까운 것에, 또한 소극적인 청색은 먼 것에 쓰인다. ②선 원근법*은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기하학적인 기초 위에, 법칙이라고 할 만큼 유일하게 체계화된 원근법이다.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 등에 의하여 개발되고 마사치오Masaccio(1401~1428)의 <성 삼위일체>의 화면 구성에서 비로소 미술에 응용되었다.
인간적 시각의 확립을 의미하는 원근법은 시민계급이 발흥하여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그 구조가 수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원근법은 회화에 적극 도입되어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 도나텔로Donatello(1382~1466),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1404~147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ro della Francesca(1415~1492),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 등에 의해 연구되었고, 또 작품에 응용되었다. 그러나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이를 너무 신봉하여 작품의 예술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정밀한 원근법은 인상주의*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고갱Paul Gauguin(1904~1948) 등은 작품 제작 의도 때문에 원근법을 무시하였고, 입체주의*에 이르러서 원근법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최근 젊은 작가들 간에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원근법을 되살리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선 원근법은 주관(인간)에 의한 객관(자연)의 지배라는 의미에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세계관과 철학이 완전히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성에 의해서 규정된 공간 중에 표현되는 근세의 종교 도상*은 예를 들면 정신적, 사회적 위계에 따라 근본적으로 대조적이다. 서양의 원근 표현은 동양화가 자연을 주된 관심사로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실내의 표현이 많으며, 풍경 묘사에서 원근감의 표현이 정확히 행해지게 된 것은 14세기 후반에 중경(中景)화를 그리게 되고 난 이후부터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의 화상석*(畵像石)에서 전후의 대상을 약간 떨어지게 하여 겹치는 방법과 기물, 깔개 등을 평행사변형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부감법을 쓰고 있으나, 일반으로는 원상근하(遠上近下, 상하법)를 약속한 원시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초보적인 투시 화법은 육조(六朝) 시대에 성립되었으나 주제에 대한 배경에는 역원근법과, 작은 산에 큰 수목을 세워서 주제가 되는 인마(人馬)를 둘러싸는 반사실적인 관습적 수법이 때때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원소근대(遠小近大)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투시화법이 당대(唐代)에 이르러 발달하였고 측천무후기에 성행한 정토변상도 등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으나 누각(樓閣)의 미를 그리는 계화(界畵) 등에서 먼 곳을 향하여 수렴하는 규칙은 반드시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 ‘대기 원근법’ ‘선 원근법’ 참조

원대 미술

원대 미술 元代美術

몽골인의 왕조를 원元이라고 칭한 것은 세조(쿠빌라이) 연간인 지원 8년(至元, 1271)이지만, 태조(칭기즈칸)의 즉위가 1206년이고 1215년에는 수도 북경北京을 함락시켰으며 1234년에 금金을 멸하였기 때문에 원대(元代)의 상한은 적어도 1230년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1348년에 마지막 칸의 가혹한 학정에 대한 중국인의 불만은 광범위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20년동안 반란군과 군벌 사이에 피폐해진 국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거듭되었고, 몽골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368년 칸이 북경을 통해 북쪽으로 도주하자 짧고도 불명예스러운 몽골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원왕조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단명했고 불명예스러웠으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불확실한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고찰하였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양식을 부활하려는 그들의 복고적인 태도는 장식미술 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여러 고전 양식 중에서 이민족인 요遼와 금金의 지배 아래서 반쯤은 화석화되어 보존되어 오던 당唐 양식을 선호하였다. 원왕조는 이 밖에 몇 가지 점에서 혁신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전통들을 부활시켰으며, 몽골의 지배에 의해서 자신은 독립적인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문인들 사이에 침투되어 조정에 소속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지식인들 사이를 갈라놓은 구분이 생긴 것이다. 그 구분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회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왕조는 미술과 공예에서 많은 혁신을 이루었는데, 장식미술에서는 송宋의 우아미에 대한 반동으로 대담하면서도 찬란한 미술 경향을 보였다. 변화의 몇몇은 몽골 정복자들과 몽골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중국 땅에 봉건영주와 지주로 세워진 위구르인, 탕구트인, 돌궐인과 같은 비중국인 즉 색목인(色目人)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몽골인들은 정복당한 모든 종족의 미술가와 장인들에게 자신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하였으며, 이들을 군사조직과 비슷하게 편성하였다. 미술가와 장인 중에는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인, 심지어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미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중국 미술이었다.
건축:쿠빌라이가 세운 칸바릭Khanbalik의 원래의 건물지는 왼편 부분이 매우 조금 남아 있다. 현재의 북경은 본래 1421년 명明의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세운 것이며, 이후 명과 청淸에 의해 계속 건설된 것이다. 북경은 시 안에 시가 있고 다시 그 안에 시가 있게끔 구성된 구조이다. 즉 15마일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의 내부에 주위가 60.5마일인 황제시皇帝市가 있고 그 중심부에는 황제궁인 자금시紫金市가 있는 구조이다. 몽골 민족 고유의 가옥은 몽골어로 ‘게루’라 하고 궁려(穹廬)라고 쓰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버드나무 판으로 엮은 다각형의 골조를 억새로 덮은 것이기 때문에 매우 큰 가옥을 지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계 건축을 많이 수용하였다.
원대의 중국계 건축은 금과 남송 두 지역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대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지방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 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은 산서성山西省 남부의 영제현永濟縣 영락진永樂鎭의 도교 사원인 〈영락궁永樂宮〉이다. 북경 성안의 〈호국사護國寺〉는 거의 폐허에 가깝지만 비문과 현재의 상태를 통해서 당시 거대한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불탑*의 전대와 같이 남쪽에는 층이 있는 층탑, 북쪽에는 꼭대기가 뾰족한 첨탑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팔각 전탑(塼塔)보다도 육각 전탑이 더 많아지고, 그 규모는 작아진다.
조금 다른 형태의 예는 하북성河北省 순덕順德의 천녕사天寧寺 밖에 서 있는 〈허조선사명공탑虛照禪師明公塔〉으로 세 개의 육각첨(六角檐) 위에 복발*(覆鉢) 모양을 얹어서 상륜*(霜輪)을 세운 것인데, 다첨형 전탑과 라마탑의 복합형인 셈이다. 원대에 처음 나타나는 티베트계 라마탑은 북경의 묘응사妙應寺(일명 백탑사白塔寺, 1381)에 있는 백탑이다. 라마탑은 북경 호국사와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승상보탑勝像寶塔〉 등이 있다. 거기에 설치된 문 건축을 받침으로 하고 그 위에 라마탑을 얹은 것을 과가탑(過街塔)이라 부르는데, 북경의 북쪽 관문인 거용관居庸關 안에 있는 백석(白石)으로 된 문건축이다.
회화:원대는 오대(五代)와 함께 중국 회화사상의 전환기로 복고적인 태도를 지니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였다. 화원이 성했던 송대(宋代)와는 달리 원대에는 화원을 두지 않고 정부 기관인 공작서(工作署)에 화공을 배속하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화가로는 손군택孫君澤(순 쥔쩌) 등이 있다. 그 밖의 원체화가로는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 이후) 등이 있다. 전선은 온건한 방법을 취하면서도 혁신적인 면이 주목된다. 그의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는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가 거위를 바라보는 매력적인 두루마리* 그림인데, 고졸한 당양식으로 그린 그의 선택과 주제 그 자체는, 약점을 보이는 송문화에 대한 반동과 이후 문인 화가들의 중요 영역이 된 과거 미술에 대한 창조적인 재해석의 시작으로 조명된다.
원대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은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를 지내며 원의 왕실에 봉직했던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이다. 조맹부는 송의 정통 양식을 뛰어넘어,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동거파*董巨派의 강남 양식의 시문학과 필법을 재발견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할은 원사대가*를 비롯한 현재까지의 거의 모든 문인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문인 산수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또한 담담한 학자적 기지로서 당대(唐代) 산수화*의 예스러우면서도 고졸한 산수화 양식과 동원의 광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화시킨 점이 주목된다. 조맹부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반세기후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예찬倪讚(니 짠, 1301~1374), 오진吳鎭(우 즈언), 왕몽王蒙(우앙 멍)의 원사대가(元四大家)에 의해 그 완성을 보았다.
황공망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3년의 세월 끝에 1350년에 완성된 것으로, 여유롭고도 꾸밈없는 기법으로 다루어져서 고전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을 포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고결한 단순성은 예찬에 의해 한층 더 발현되는데, 먹을 금같이 아꼈던 그의 그림에 흐르는 정적은 텅빈 듯한 화면 속에 얼마나 많은 풍부한 내용들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왕몽은 고뇌에 뒤틀린 듯한 선과 다양한 준을 사용하여 화면을 빽빽이 연결된 직물 표면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외에 원대에는 묵죽*이 특히 애호되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우아한 줄기와 칼끝과 같이 날카로운 잎은 붓으로 그리기에 좋은 주제였던 대나무 그림은 가장 어려운 예술인 서예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육조(六朝)시대부터 그려진 묵죽화는 원대에 이르러 특히 예찬과 조맹부와 같은 위대한 문인 화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또한 문동의 화법을 배웠으며 아마추어 식물학자이자 화가로서 일생동안 묵죽의 연구에 매진하였던 이간李衎(리칸, 약 1260~1310)도 주목된다. 그의 저작인 《죽보상록竹譜詳錄》은 대나무에 관한 저술을 한 후대의 작가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간이 이룩해 놓은 것보다 더욱 자연스럽고 유려한 묵죽화가로는 오진이 있다. 그는 묵죽에서 주목되는 것은 간결한 필획으로 그림과 서예의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 점이라고 설파했다.
도자기:원대는 도자기에 있어서 혁신과 기술적 실험의 시대로서 유약 아래에 붉은 색이나 청색의 안료를 칠하는 새로운 기법이 생겨났고, 유약 밑에 부조*로 표현하는 옛 기법이 다시 부활되었다. 자주요*(磁州窯)와 균주요*(鈞州窯)를 제외한 나머지 북방요들은 요와 금, 그리고 몽골의 침입아래 거의 소멸되었고, 이에 따라 도자산업의 중심지는 중부와 남부로 옮겨졌다. 절강성浙江省의 용천*龍泉과 여수麗水에 위치한 가마들에서는 대규모로 자기가 생산되었다. 그리고 몽골이 이룬 대제국의 영항권아래 근동으로의 도자기 수출이 증가되었다. 원대에 속하는 도자기 형태들로는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접시들, 배 모양의 병들, 근동의 기형인 물병과 플라스크, 사발, 굽이 달린 컵 등이 있다. 장식 문양으로는 근동의 첨정 홍예문, 중국의 용, 연화, 소용돌이 모양의 국화, 잎으로 연결된 좁은 띠가 있으며, 이 중의 몇몇 문양은 이미 남송의 제주요(齊州窯)에서 나타난 바 있다.

원사대가

원사대가 元四大家

원대(元代) 산수화*에서 대표적인 네 화가를 이르는 명칭. 명대(明代) 왕세정王世貞(우앙 스즈엉)의 《예원치언, 부록藝苑巵言, 附錄》에 보이는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 오진吳鎭(우 즈언),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왕몽王蒙(우앙 멍)의 네 명이라는 설과 조맹부 대신 예찬倪瓚(니 짠, 1301~1374)을 끼워넣는 동기창董基昌(똥 치츠앙, 1555~1636)의 설이 《용대별집容臺別集》 〈화지畵旨〉에 나온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후자의 설이 널리 통용된다. 또한 조맹부, 고극공高克恭(까오 커꿍),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을 합쳐서 ‘원육가元六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풍은 비록 각자의 특징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가 오대(五代)의 동원董源(똥 위앤), 북송北宋의 거연巨然(쥐르안)에 기초를 두고 발전하면서, 필묵*을 중시하고, 의취(意趣)를 숭상하며, 아울러 서법과 시문을 결합한 것이다. 이는 원래 산수화의 주류로 명明, 청淸 양대에 걸쳐서 모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원주

원주 圓柱 column(영)

원통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직립해 있는 건축상의 지주. 대개는 길고, 비교적 가는 주신, 주초(柱礎), 그리고 주두*로 이루어져 있다. 원주는 처음부터 대부분 건축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고전적 정신이 고양되던 시대에는 독립적인 기념 건조물로 쓰여졌다. 건축 기술이 단순한 벽면의 축조 이상을 요구하게 되면서 원주는 건축의 이차적 주제 가운데서 가장 다양한 특징들을 건축에 부여하였다. 결국 벽면과 원주 사이의 관계는 여러 시대 상이한 건축의 미적 특질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벽면은 연속적이고 평평하게 펴진 것이 특징인 반면, 원주는 불연속적이며 둥글다.
건축에서 원주를 대규모의 기능적인 용도로 처음 생각해낸 것은 이집트인들이었다. 이집트의 건축에서 가장 특징적인 원주의 사용법은 거대한 다주식 홀에서 볼 수 있는데, 원주의 열(列)이 사원의 신전에 대한 의식(儀式)적인 접근이 되도록 하였다(제 18왕조). 크레타와 미케네에서는 일반적으로 목재 원주가 사용되었다. 그 특징적인 형태는 정상적인 원주와는 반대로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면서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원주에 홈이 새겨져 있다. 미케네에서는 대리석에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장식적인 반(半) 원주가 사용되었다.
원주의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세련된 양식은 고전적인 그리스 건축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엔타시스*라는 곡선이 원주에 특징적으로 도입되었다. 원주를 건축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로 다루면서 원주를 형성하는 각 부분, 원주의 높이에 따른 두께, 홈의 수, 주간(柱間) 사이의 관계, 원주와 계단의 관계, 주랑(柱廊)으로 둘러싸인 내부 구조와 원주의 관계, 원주의 직경과 높이의 비율 등이 세심하게 다루어졌다.
로마시대의 원주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원주가 평평한 엔타블러처*를 일정하게 지탱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아치* 열을 지탱하는데 사용되었다. 중세 건축에서는 교회 건축의 발달과 함께 원주의 사용이 거의 대부분 내부에 제한되어 사용되면서 고전적인 정확성이 사라졌다. 따라서 그리스의 엄격한 원주 비율이 자유롭게 다루어지면서, 축소된 원주가 꼬이기도 하고 모자이크* 문양이 원주의 표면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다시 원주에 대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인 기본 원리에 관심을 두고 고전적인 전통을 계승하게 된다.

원체화

원체화 院體畵

궁정취향에 따라 화원(畵院)을 중심으로 이룩된 직업화가들의 화풍. 중국 궁정의 화원회화체를 줄인 말로, ‘궁체(宮體)’ 또는 ‘궁정풍(宮廷風)’이란 뜻이다. 따라서 확대 해석하면 당唐나라 이후 각 시대마다 원체화는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궁정의 유행은 계속 바뀌므로 당대(唐代)이후의 화원양식을 단일한 회화 양식으로 묶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남송南宋 시대 화원에서는 북송北宋과는 달리 일각구도*를 보이며 표현이 단순화되는 특수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이를 ‘남송원체화’라고 하며 대개 원체화라고 하면 남송원체화를 가리킨다. 산수화*의 경우에는 이당李唐(리 탕)의 영향 하에 소규모의 산수를 그리는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의 양식이 자리를 잡았다. 화조화*에서도 색채의 아름다움과 사의성(寫意性)을 추구하였다. 원체화는 명明나라 절파*(浙波)나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이후의 회화*, 조선 중기의 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지만 명나라 때 문인화* 우위의 계보가 성립되고부터는 화공, 장인의 그림으로 경시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원형 경기장

원형 경기장 圓形競技場
amphitheater(영)

이중 극장. 여러가지 공연을 하기 위해 설계된 타원형의 건축물. 자연적인 비탈을 이용하거나 계단식의 좌석에 둘러싸인 무대로 되어 있다. 평면 도상으로는 대개 타원형이다. 로마 제국 전역(특히 서구 라틴 지방)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월례노동

월례노동 月例勞動
Labours of the Months(영)

인간이 한 해 동안 전념해야 할 일들을 그린 그림 또는 조각*의 통칭. 1년을 12개월로 나누어 각 달마다 그에 어울리는 노동과 풍경을 연속적으로 재현한다. 일반적으로 그 달에 해당하는 별자리인 12궁의 기호(Zodiac)가 함께 표시된다. 주로 중세 고딕 성당의 정문 주위에 조각되며,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발견된다. 또한 기도서*(Book of Hours)에 실린 달력이나 도판 필사본*에도 삽화형태로 삽입된다. 이같은 월례노동의 12달 장면 그림을 ‘사계노동(四季勞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