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준
절대준 折帶皴
산수화*의 암산이나 둔치를 표현하는 준법*. 모필의 끝부분을 뉘어서 먹을 적게 묻힌 상태에서 수평의 필선을 옆으로 그은 다음 직각으로 꺾어주는 수법으로 그린다. 예찬倪讚(니 짠, 1301~1374)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절대준 折帶皴
산수화*의 암산이나 둔치를 표현하는 준법*. 모필의 끝부분을 뉘어서 먹을 적게 묻힌 상태에서 수평의 필선을 옆으로 그은 다음 직각으로 꺾어주는 수법으로 그린다. 예찬倪讚(니 짠, 1301~1374)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절대회화 絶對繪畵
ultimate painting(영)
미국 작가 애드 라인하트Ad Reinhardt(1913~1967)는 자신이 1960~1967년에 제작한 회화가 ‘절대 추상 회화(ultimate abstract painting)’라고 주장했다.
이 그림들은 거의 같은 크기의 정방형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캔버스는 150×150cm의 9개의 정방형으로 나뉘어졌고 회색이나 검정색이 살짝 칠해져 있었다. 그는 추상회화의 가능성은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후기 작품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이젤 회화의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절로묘 折蘆描
수묵 인물화의 옷주름을 묘사하는 기법. 묘선(描線)이 마치 날카로운 갈대의 잎이 부러져 꺾인 듯한 형태로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국 남송南宋 이후의 도석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붓을 강하게 넣어 운필(運筆)을 하고 직선적으로 격렬하게 굴곡시키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도석화의 전형적인 묘법으로 양해梁楷(량 카이)의 작품에 잘 나타나며 명대(明代) 절파*에 계승되었다.
절지화 折枝畵
꽃이 피어 있는 가지의 일부를 그린 작은 화면의 화훼화*. 흔히 큰 줄기에서 잘린 가지와 꽃을 그렸다. 큰 화면에 꽃나무 전체를 그리는 형식의 화훼와 대립되는 것으로, 오대(五代) 남당南唐의 서희徐熙(쉬 시)도 그렸다고 하며, 북송대(北宋代) 조창趙昌(자오 츠앙)의 절지화가 특히 유명하다.
절차고 折釵股
필획을 전환할 때의 용필 방법 및 그 효과에 대한 비유. 필획이 바뀌는 곳에서의 용필은 원만하면서 힘이 있어야 하고 붓털은 고르게 펴서 붓끝이 휘어지면 안되는데, 이것이 마치 쇠로 만든 비녀의 끝이 둥글게 꺾인 것과 같은 것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절충주의 折衷主義 eclecticism(영)
창조력의 부족 때문에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하지 못하고 다른 작가나 과거의 여러가지 예술 동향들에서 양식적 특징을 차용하고자 하는 경향. 절충주의라는 표현은 어떠한 공인된 학파에도 속하지 않고 다른 학파에서 강령을 추출해내는 자들에 대해 철학계에서 사용되었다.
비평에서 절충주의의 강령은 고대의 수사학 교사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실제로 루시안Lucian of Samosata은 회화와 조각에서 절충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한 바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사가인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가 라파엘로Rafaello Sanzio(1483~1520)를 선조들의 예술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려 뽑는 솜씨를 가졌다고 칭송한 이래, 17세기의 문헌들에서 다른 미술가들이 찬사를 받을 때는 그런 기준이 동원되었다.
16세기말에 볼로냐에서 활동했던 카라치가(家)와 그 주변의 화가들-도메니키노Domenichino(1581~1641), 귀도 레니Guido Reni(1575~1642), 알바니Fracesco Albani(1578~1660), 구에르치노Guercino(1591~1666)이나 19세기 중반 이후의 건축에서 이러한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역사적 양식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유에서 역사주의(歷史主義)라고도 부른다.
절파 浙派
명대(明代)의 화파. 오파*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출신의 대진戴進(따이 진, 1388~1462)을 시조로 하여 명말(明末)의 람영藍瑛(란 잉)에 이르는 직업 화가의 계보에 부여된 유파의 명칭이지만, 유파라고 부르기에는 화가의 사승관계(師承關係)가 매우 희박하다.
명말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의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 행리가론(行利家論)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화법상의 포괄 범위는 광범위하여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 이성李成(리 츠엉), 곽희郭熙(구어 시), 미법산수*, 원사대가*에 미친다.
이들의 공통되는 화법상의 특색은 필묵이 거칠고 자유분방하며, 사생(寫生)보다도 점경(點景)의 형식이나 묵면(墨面)과 여백의 대비, 율동감 등을 강조하는 것을 지향하는데, 절강 지방의 전통적 수묵 화법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대진이 화원(畵院)에 들어오자, 화원 회화의 방향은 절파적인 것으로 되고, 동시에 영향의 범위도 복건福建, 광동성廣東省으로부터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어 오파에까지 미쳤다.
대표적 화가로 대진戴進(따이 진), 중기에 오위吳偉(우 웨이), 후기에 장로張路(즈앙 루)를 들 수 있지만 종종 문인적 소양을 지닌 화가도 절파에 포함된다. 절파는 서서히 ‘광태사학*’이라고 혹평받는 화풍으로 변모했는데, 가정 연간(嘉靖, 1522~1566) 말부터 쇠퇴하여 오파, 문인화*와 동질화되는 경향도 보였다.
점묘법 點描法 pointage(프)
점 또는 점과 유사한 세밀한 터치로 묘사하는 회화 기법의 용어. 동양화에서 자연을 인상적으로 해석하는 미법산수의 미점(米點), 인상주의*의 경우에는 프리즘에 의해 분해된 색의 병치에서 색점 배치의 묘법 등이 대표적인 점묘의 예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는 것은 지양하고 순수한 빛을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과, 화면은 미세한 점으로 분할되고 색채도 순수한 색으로 분할되었다. 이 수법은 일찍이 콘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의 풍경화*에서도 부분적으로 쓰였으며,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도 의식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점묘법을 제작의 기본 원리로 삼은 것은 모네Claude Monet(1840~1926)와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특히 신인상주의* 화가인 쇠라Georges Seurat(1859~1891)는 이것을 이론화하였으며, 그 이론은 시냑Paul Signac(1863~1935)의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1899)에 의해 일반적으로 보급되었다. 회화의 구성 요소로서 가장 중요시되어 온 선을 쓰지 않고 점으로써 형상의 실체를 표현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비약적인 것이었다. 원색의 미세한 점들로 그려진 신인상주의 작품은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라고 불렸다.
→ ‘분할주의’ ‘점묘주의’ 참조
점묘주의 點描主義 Pointillisme(프)
균일한 필촉으로 작은 색점을 찍는 표현 기법을 말하며, 페네옹Félix Fénéon이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의 1886년 작품 <라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 대해 ‘점 그림 peinture au point’이라 칭한 데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이는 순수한 색점들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이 색채를 물리적으로 혼합하는 방식보다 더욱 강렬하게 색채의 시각적 진동 효과를 창출한다는, 광학과 색채혼합에 관한 과학적인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다.
쇠라와 시냑Paul Signac(1863~1935) 등 신인상주의*자들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분할주의*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작 신인상주의자들은 점묘주의라는 용어가 자신들의 과학적이고 지적인 태도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보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 ‘신인상주의’ 참조
점태 點苔
수묵 산수화*를 그릴 때 점을 찍는 기법의 한 가지. 바위나 나무줄기 및 가지에 생긴 이끼나 작은 식물의 생략된 표현으로, 붓의 끝을 수직으로 내려서 찍는다. 또 채색화에서는 하나하나 윤곽을 만들고 그 내부를 녹청으로 채우는 일도 있다. 남송南宋 이후 화면의 요소요소에 찍어서 화면 전체의 조화를 잡고 분위기를 정비하거나 악센트를 가하는 효과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