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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超現實主義宣言
Manifeste du Surréalisme(프)

다다*에서 발전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 운동인데, 이 조직적인 운동은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에 의해 결성되고, 1924년 그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이 출판되었다.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인간 상상력의 해방이며, 합리주의가 도달한 관념적인 막다른 길에 대한 반격과 타개였다.
그는 그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는 구두(口頭), 기술(記述), 기타 온갖 방법으로 사고의 참된 작용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심적 오토마티슴*이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한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1929년에 발표된 제2선언에서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거의 자각하지 않는 미*(美)나 애정, 재능으로 훌륭하게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표현되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미개척 분야를 밝히는 것이 초현실주의의 목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Freud의 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이성의 통제가 없는 초현실성을 인정하여 이를 상상력이나 환각력(幻覺力)에 의해서 무의식 속에 표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촐라왕조 미술

촐라왕조 미술 Cōla Dynasty Art(영)

850년경 남인도 타밀 지방의 중심부인 탄조르Tanjore를 정복한 이후 907년 파란타카 1세Parā ntaka가 팔라바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왕조로서 라자라자 1세Rājarāja(재위 985~1014)와 아들인 라젠드라 1세Rājendra(재위 1014~1044)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데칸과 타밀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동남아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했다. 그렇지만 12세기 중반에 세력이 약해져 13세기경 판디야 왕조*에 정복되었다.
팔라바 왕조를 계승한 촐라 왕조는 미술에서도 팔라바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건립된 힌두 사원*은 규모나 양식면에서 남인도 사원의 절정기를 잘 보여준다. 〈비자야라야 촐리시바라 사원〉 〈브라흐마푸리시바라 사원〉 〈코란가나타 사원〉 등은 9세기 중엽부터 10세기 초에 걸쳐 세워졌다. 1003년에 시작되어 1010년에 완성된 탄조르의 〈라자라제시바라Rājarājeśvara 사원〉은 촐라 시대의 대표적인 힌두 사원이다.
사원의 문인 고푸라(gopura)는 규모나 조각* 장식이 매우 크고 화려하다. 성소인 비마나*의 높이는 약 60m이며 상부구조인 시카라*의 무게는 약 80톤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성소 안의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가르바그리하(garbhagrha, 성소 안의 작은 방)에는 링가*가 모셔져 있다. 〈브리하데시바라Brhadeśvara 사원〉은 라젠드라 1세 시대에 만들어졌다. 촐라 시대에는 청동상 제작도 매우 활발하여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다. 힌두교의 신들인 시바*와 파르바티*, 크리슈나* 등이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춤추는 시바상인 나타라자*상이 유명하다.

추 醜 ugliness(영) laideur(프)

미학상의 용어로 추는 미*의 대립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미적 규범에 어긋나며 미적 관조를 방해하는 것, 즉 반(反)미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미에 대립하는 미적 범주*의 일부분이다.
미를 잃을 경우, 혹은 미의 반대 요소가 강한 경우의 미의식*의 내용으로 좁은 의미로는 예술의 표현 내용이 미적 형식을 파괴하고 나아가 숭고*, 힘, 비장(悲壯) 등의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킬 때의 미적 감정*을 말한다. 그것은 적극적인 가치를 가지므로 예술의 대상으로서는 형식적인 미보다도 그것의 미적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추는 그 자체로는 절대적 가치를 갖지 않지만 전체 속에서의 대비에 의해 미를 한층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서 중시된다. 그것은 현실의 자연 현상 및 정신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며 예술 작품에도 종종 혼입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고전적 예술은 추와 전혀 관계가 없거나 거리가 먼 미의 예술이며, 따라서 고전적 미학은 추를 미의 부정적 의미로밖에 다루지 않았다. 예컨대 헤겔Hegel이나 피셔Vischer의 미학에서는 추는 악(惡) 또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을 가져오며, 따라서 이념의 순수한 현현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배척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있어서는 바로크*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의 문예 및 미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추가 점차 예술의 세계에 침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학상에서도 추의 미적 의의를 찾으려는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헤겔학파의 관념론적 입장에서도 샤슬러는 소재의 추는 미가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의식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계기라고 했으며, ‘추의 미학’을 역설한 로젠크란츠는 예술이 이념의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것과 서로 뒤얽혀 있는 부정적인 것, 다시 말하면 추가 결여되어서는 안된다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립스T. Lipps의 미학에서도 추는 ‘소극적 감정이입의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미가 한층 돋보이게 하는 역할, 즉 미를 한층 인상깊게 두드러져 보이도록 하는 배경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미에는 직접적인 그 실현을 위한 조건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미가 그것에 대해서 항쟁하며 자기를 주장함으로써 그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추의 적극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추는 미적 대상*의 형식과 내용 및 이들 양자의 관계인 표현의 어느 쪽에 존재하는가에 따라서 구별된다. 로젠크란츠는 이것을 구별하여 ①부형태, 불균제, 부조화와 같은 ‘형식성’ ②표현의 부정확성 ③정신적 자유의 부정에 근거하는 왜곡이라고 구분하며, ③을 다시 비속한 것, 혐오스러운 것, 희화로 구분하고 있다. 이로써 어떤 종류의 숭고*는 그 몰형식성에 있어서 추의 요소를 포함하며, 비장은 종종 혐오스러운 것, 사악한 것에 대한 표현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골계(滑稽)는 비루하고 약소한 것에 대한 표현이나 희화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추와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특성미도 모종의 감각적 또는 정신적 특성을 일방적으로 고조시킬 때에는 추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미적 유형은 많든 적든 추를 그 구성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경우 추는 미적 인상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전체의 생동감을 높여주는 자극제로서의 힘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떤 예술 경향에 있어서는 두드러지게 추의 몰골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으로 일종의 미적 매혹을 불러 일으켜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다수 발견된다.
특히 현대의 실존주의 문예나 그 밖의 예술에는 이른바 ‘추한 미’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이러한 사례로부터 볼 때, 추는 그 자체가 미적 범주의 하나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의미의 추는 미적 범주의 체계에 있어서는 최대한 불쾌 및 불협화음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협의의 미, 즉 순수미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진다. 물론 추를 취급하는 방법은 미학설에 따라서 다양하게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미적 범주론에 있어서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의의는 특히 오늘날의 예술 상황에서 볼 때 경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추사파

추사파 秋史派

조선말기에 활약한 선비화가인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중심으로 한 화파. 조희룡趙熙龍, 허유許維, 전기田琦, 권돈인權敦仁, 이하응李昰應 등이 추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기(文氣)와 사의*(寫意)를 존중했던 이들 경향은 조선말기 화단에서 남종 문인화*를 성행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조선 후기에 풍미했던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쇠퇴시키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추상-구체 보고서

추상-구체 보고서 Abstract-Konkret(독)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알리안츠Allianz 그룹의 두 전시회 사이에 오-비브Eaux-Vives 화랑이 주요 작가를 소개하면서 로네오 타이프로 제작한 보고서. 1937년부터 마지막 전시회가 열린 1954년까지 알리안츠 그룹은 구체미술*의 노선에 속하는 스위스 작가들을 재결집해 취리히에 세운 단체로, 뢰피 Léo Leuppi, 보드머Walter Bodmer, 에르니Hans Erni, 쉬에스Hans R. Schiess 등이 창설하고 빌Max Bill(1908~1994), 그래저Camille Graeser, 로세Richard Rohse(1902~1988), 뢰벤스베르그Verena Loewensberg 등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1944년 10월부터 1년간 11호가 출판되었다. 토론과 이론적 반영의 장을 표방했던 이 보고서는 구체미술 작가들의 주요 기사들, 플라톤Plato과 헤겔Georg W. F. Hegel 등의 철학서, 판화의 원본, 다양한 경향의 작가들의 텍스트 등을 수록하였다. 단기간 존재했으나 구체미술의 정의와 응용 가능성을 알리는 다리 역할을 했다.

추상-창조 그룹

추상-창조 그룹 Abstraction-Création(프)

1931년부터 1937년까지 파리에서 결성된 추상 예술가의 그룹. 제1차세계대전 전후에 유럽 각지에서 싹튼 추상미술*은, 1920년대에는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을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와 데 스틸* 그룹,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에서 볼 수 있는 서정적, 표현주의적 경향, 들로네 부처(夫妻)나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로 대표되는 음악적 추상주의 등 여러가지 경향과 그룹을 낳았지만, 그러한 서유럽 각국의 추상 예술가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우선 1930년에 그룹 ‘세르클 에 카레*’가 결성되었고, 이어서 1931년에는 ‘추상-창조 그룹’이 만들어져 매년 국제적인 규모로 추상 예술가의 작품을 모은 앨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앨범은 1932년 제1회가 간행된 이래 5년정도 계속되었으나, 그 후 서유럽의 정치 정세의 급변에 의해 중지되었다.

추상미술

추상미술 抽象美術 abstract art(영)

비대상미술(比對象美術), 비구상미술, 비재현적 미술이라고도 하며, 때로는 구체미술*이라고도 불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묘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미술을 가리킨다. 자연의 구체적 대상을 거의 재현하지 않고 색, 선, 형 등의 추상적 형식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미술을 총칭하는 것으로,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류의 하나를 이룬다.
모든 미술은 형태, 색채, 질감, 화면의 크기, 테마의 크기 및 넓이 등 추상적인 제요소로 성립되고 그 양식도 주로 이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들 제 요소가 신들을 찬미한 인간의 모습이나 사상(事象) 등을 나타내려는 기술적, 묘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 표현보다는 설명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추상 미술은 19세기에 시작된다. 이 시대에는 고대 신화나 중세 이야기에서 화제(畵題)를 취하여 극명한 묘사를 주로 하는 미술이 성행하였고, 그와 동시에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가 ‘회화란 이름의 음악’이라 불렀던 방향으로 회화를 발전시키고자 한 화가들은 자연주의*의 전통에 의문을 품고 주관과 회화 쌍방의 시각적 사실을 접근시키고자 했다.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화가들은 모방과 이상화를 강조했던 고전주의*를 부정하고 상상력, 무의식, 그리고 우연성까지도 본질적인 창조의 요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0년 드니Maurice Denis의 “회화는 전쟁터의 말이나 또는 나부(裸婦)와 같이 이야기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선택된 색채로 덮인 평면이다”라는 말이 당시 진보적인 화가들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선, 색채, 표면 등의 비묘사적, 표현적인 성질을 근거로 한 아르 누보*의 대담한 실험적 디자인은 회화와 밀접한 분야에서 처음으로 추상의 영역을 확대시켰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의 십수년 간에 걸쳐 주요한 운동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지 미술과 자연의 외관 사이의 균열을 강조했다. 한편 영화는 그 자체로 이야기적 형식을 지니기 시작했다. 또 표현주의*의 여러 가지 형식은 원시 미술에 고무되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상을 왜곡, 변형하여 표현함으로써 강한 감정을 전하고자 했다.
야수주의*에서는 이미 고갱Paul Gauguin(1904~1948)이 주장해 온 색채의 해방을 추진했다.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를 선구자로 하는 입체주의*는 본질적으로 회화적인 구성을 목표로 자연의 사물을 단편화하여 화면에 재구성했다. 또 미래주의*는 20세기 역사의 급속한 전개에 합치하는 속도감을 표현함으로써 일종의 시각 언어를 창출해 냈다.
미래주의의 발라Giacomo Balla(1871~1958)는 대담하게도 미래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렸으나,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경우, 적어도 구도란 목적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계의 단편에서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설사 화면의 형상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구상적이어도 형상에서 추상하는 것과, 볼 수 없는 내적 세계를 그린 비묘사적 형태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4, 5년 전에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몇몇 화가들, 즉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 타틀린Vladimir Tatlin(1885~1953) 등은 근본적인 추상 미술을 추구했으나, 전위적인 예술가가 되어 일체의 묘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직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대전 중에 네덜란드의 데 스틸*의 멤버였던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과 반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1883~1931) 등과 취리히 다다* 그룹, 특히 아르프Jean Arp(1887~1966)가 출현, 추상미술의 영역을 한층 확대시켰다.
추상미술은 요소주의*Elementalism와 자유 추상, 두 가지로 나뉜다. 특히 러시아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말레비치와 신조형주의*의 창도자였던 몬드리안은 작품의 표현을 최소한도의 기본적인 형태와 색채로 한정시켰다. 다른 작가들도 구도를 결정하는 데에 기하학적 또는 수학적인 계산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요소주의 작품이 합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강조하여 그것을 자연과 대립시켰다. 요소주의 예술은 미술 이외의 영역, 특히 타이포그래피(인쇄술)와 건축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919~1933년 활동한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요소주의의 제원리를 좇아서 미술 교육과 디자인 교육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한편 자유 추상은 표현주의자(1910~1920의 칸딘스키)에 의해서든 서정주의자(아르프)에 의해서든 모두가 감정과 직관을 근거로 했고, 그 까닭에 발상이 주관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칸딘스키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1912)과 잡지 《데 스틸》(1917~1919)은 이 양 방향의 기본적인 철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추상미술은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사이에는 그렇게 성행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정치와 초현실주의*와 같은 심상(心象)을 새롭게 강조하는 예술 운동이 성하여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세르클 에 카레*’나 ‘추상 창조*’라는 전시회나 출판을 했던 파리의 그룹이 수개국의 추상작가를 위한 세력 만회의 거점을 제공해 주었고, 또 1930년대에는 조각에서 약간의 진전을 보였다. 알렉산더 칼더가 최초의 모빌*을 만들고 또 무어Henry Moore와 헤프워드Barbara Hepworth가 처음엔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에게서, 뒤에는 구성주의자인 가보Naum Gabo(1890~1977)에게서 영향을 받아 영국 조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추상 작품을 만든 것도 이 시기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에서 활발한 추상미술 일파가 나타나 큰 영향을 주었다. 회화에 있어서는 가장 정열적인 표현주의의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에서, 보다 비개성적인 작품의 로스코Mark Rothko, 뉴만Barnett Newmann, 또 차갑고 억제된 기법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는 빌이나 바자렐리Victor Vasarely 등이 요소주의의 원리를 추구했고, 또 폰타나Lucio Fontana 등은 자유 추상, 혹은 유럽에서 앵포르멜*이라는 예술을 새로운 극한까지 이끌어갔다.
추상미술이 너무 눈의 감각에만 호소한다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이 감각적인 어필은 음악에 있어서와 같이 지적이고 분석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확실히 추상미술은 미술 일반의 추상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되게 하였고 또 설명적 묘사에 따르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에의 이해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 또한 추상미술이 현대 건축이나 공예 디자인에 미친 커다란 영향은 금세기에 있어서의 추상미술의 결정적인 역할을 입증한다.

추상표현주의

추상표현주의 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영)

일반적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 화단을 지배하던, 미국 회화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회화의 한 양식을 가리킨다. 본래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말로, 미국의 평론가 바Alfred Barr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중이던 칸딘스키의 유동적인 초기 작품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 후 1940년대에 《뉴요커》의 기자 로버트 코츠가 이 용어를 미국의 젊은 작가들, 특히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과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의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부적당하다는 견해도 있어서 비평가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하였고, 또 막연히 뉴욕파*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라는 말 속에는 이 회화의 성격, 그 예술적 원천 등이 잘 나타나 있어 가장 빈번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추상표현주의는 서구 근대 미술*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야수주의*, 표현주의*, 다다*,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한 계보와 인상주의*, 입체주의*,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 미술은 유럽의 새로운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초 미국 화단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지방주의*가 지배적인 형식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의 영향으로 추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미술은 새로운 계기를 맞이했다. 전쟁을 피해 도미한 유럽의 전위작가들이 미국 미술에 큰 자극과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뒤샹Marcel Duchamp(1887~1968), 모홀리 나기László Moholy-Nagy(1895~1946), 앨버스Joseph Albers(1888~1976),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 가보Naum Gabo(1890~1977), 샤갈Marc Chagall(1887~1985),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이브 탕기Yves Tangui(1900~1955), 달리Salvador Dali(1904~1989), 마타Roberto Matta(1911~ ), 마송André Masson(1896~1987),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한편 현대미술의 파트롱*이며 컬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도 도미하여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이라는 화랑을 경영하였는데, 이곳은 미국 전위미술의 중요한 산실이 되었다. 여기에서 유럽의 작가들과 미국의 젊은 미술 지망생들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 후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3~1946년에 폴록, 호프만, 마더웰Robert Motherwell(1915~1991), 로스코Mark Rothko(1903~1970) 등의 개인전이 이 화랑에서 계속해서 열렸다.
추상표현주의는 회화에 있어서 무의식성을 강조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에서 특히 강한 암시를 받았다. 추상표현주의자들, 특히 폴록의 경우 이러한 자동기술법의 강조는, 전면균질적(全面均質的)인 공간 구성, 드립 페인팅*의 개발, 또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 액션적인 제작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추상표현주의는 이 점에서 추상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추상과 동일하지 않다. 즉 전통적인 추상을, 구상 회화의 경우처럼 인간, 사물, 풍경 등을 표현 대상으로 삼지는 않지만, 삼각형이나 원 따위(기하학적, 무기적, 차가운 추상), 부정형(비기하학적, 유기적, 뜨거운 추상)한 점(點)이나 선, 또는 면에 의해 생성되는 형상(形象, figure)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것은 현대 회화의 한 특성으로서, 화면은 원근감을 잃고 평면화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시 그라운드(後景, ground)와 피겨(前景, figure)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자동기술법에 힘입어 이러한 형상성을 초월하고자 했다. 무의식이란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간에 지시성과 방향성을 가진 형상을 거부하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자동기술법을 거의 무시하고 형상을 비롯, 형식적인 측면을 지니는 추상이란 구상예술의 연장 내지는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추상회화, 조각전>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미술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51년부터 1961년 사이에 이 운동은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 중에서도 이 경향으로 화풍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본래 추상표현주의는 그 애매한 내용 때문에 일반화되었고, 작가도 다양했으나 진정한 의미의 추상표현주의자는 폴록, 뉴만, 로스코, 스틸뿐이다. 이에 비해 호프만, 고르키, 드 쿠닝, 클라인Franz Kline 등은 다른 경향의 작가들이다. 왜냐하면 로젠버그가 지적했듯이 형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1960년을 그 정점으로 폴록, 뉴만, 라인하트Ad Reinhardt(1913~1967) 등이 차례로 작고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드 쿠닝, 마더웰, 필립 거스통, 고틀립, 스티르 브룩스, 마카렐리 등은 그들의 이미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특히 라인하트, 뉴만, 로스코, 마더웰 등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일어난 색면파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축수도

축수도 畜獸圖

→ ‘영모화’ 참조

춘련

춘련 春聯

→ 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