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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 墨

문방구(文房具)의 한 가지. 소나무나 식물기름 등을 연소시켜 그때 생기는 그을음을 아교와 섞어 고체화시켜 만든다. 벼루에 물을 붓고 묵을 갈면 탄소의 콜로이드 용액인 먹물이 생긴다. 은대(殷代)의 갑골문*에 묵서한 예가 있어서 이미 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영향은 분명치 않다. 고대의 먹은 칠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묵은 흑(黑)과 토(土)로 이루어진 상형문자로서 ‘검은 흙’의 뜻이 되므로 본래는 석묵(石墨)을 가리키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묵의 색은 그을음 혹은 석묵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대(漢代)에는 천연의 석묵이 사용되었다고 전하며, 인공의 그을음도 쓰였던 듯하다. 하북성河北省 망도에 있는 후한後漢때 무덤의 벽화*에 둥그런 벼루 위에 방추형의 먹을 놓은 그림이 있다. 당대(唐代)에는 먹 만드는 법이 정교해졌고, 이정규李廷珪(리 띵꾸에이)와 같은 명공(名工)이 있었다. 후에 송宋의 반곡潘谷(판 꾸), 원元의 주만초朱萬初(주 완추), 명明의 정군방程君房(츠엉 쥔황), 방우로方于魯(황 위루) 등의 묵공(墨工)이 나와 먹 제조 기술은 더욱 정교해졌다.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조소공曹素功(차오 써어꽁), 왕근성汪近聖(우앙 진성), 호개문胡開文(후 카이윈) 등이 나타나 안휘성安徽省에서 번성했으므로 ‘휘묵호필(徽墨湖筆)’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소나무 이외에 기름 그을음으로 된 먹이 성행하게 된 것은 실제로는 명대 이후이다. 묵 제조법을 기술한 저서로는 심계손沈繼孫(선 지쑨)의 《묵법집요墨法集要》가 있고, 먹의 생김새를 그림으로 그려 보인 것으로 방우로의 《방씨묵보方氏墨普》, 정군방의 《정씨묵원程氏墨苑》, 방서생方瑞生(황 뚜안성)의 《묵해墨海》 등이 있다.

묵란

묵란 墨蘭

→ ‘사군자’ 참조

묵매

묵매 墨梅

→ ‘사군자’ 참조

묵시록

묵시록 默示錄 Apocalypse(영)

성 요한의 계시록으로 알려져 있는 신약성서 중 가장 마지막 책.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 새로운 지복천년의 도래에 대해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섬에서 본 천계를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초현실적이고 극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기독교 미술의 많은 주제로 차용되었다.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는 1498년에 간행된 묵시록의 삽화에 강렬하고 극적인 목판화*를 제작한 바 있다. 묵시록 중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이탈리아 아사시에 있는 치마부에Giovanni Cimabue(c.1240~1302)의 프레스코* 벽화가 유명하다. 바로크 미술*에서는 성모마리아가 묵시록에 자주 묘사되었고, 이 주제는 특히 스페인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묵죽

묵죽 墨竹

→ ‘사군자’ 참조

묵화

묵화 墨花

수묵으로 매화, 부용, 난초, 국화, 수선, 연꽃 등을 그린 그림을 통틀어 일컫는 말. 특히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 세한삼도(歲寒三圖)와 매, 난, 국 죽 등의 사군자*(四君子)는 문인화* 가운데서도 문인의 정신이나 인격을 나타내는 묵화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

묶음기둥

묶음기둥 clustered columns(영) colonnes fasciculées(프)

굵은 기둥 주변에 다수의 가늘고 둥근 기둥을 부착시킨 기둥형식으로서, 종종 단일한 몸체의 기둥으로 간주된다. 서양에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성당 건축에 사용하였다. 가느다란 원주*는 석조 궁륭* 천장의 늑골*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수직성을 강조하여 굵은 기둥을 가늘게 보이게 하는 효과도 창출한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둥*도 일종의 묶음기둥이지만, 이것은 재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원시적인 형태가 잔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갑

문갑 文匣

한국 전통 목가구의 하나로 각종 문방구와 간단한 문서 등을 임시로 치워두기 위해 주로 사랑방에 비치하는 나지막하고 긴 가구로 문구갑의 준말이다. 높이가 30cm정도로 낮고 가로로 길기 때문에 전통가옥에서 문지방의 높이를 넘지 않았다. 서랍으로 칸을 나누는 시원한 면처리와 간결한 구조 및 기능상 자잘한 물건을 치워서 실내를 정갈하게 했다. 조선 후기의 것이 많이 전래되며, 배나무가 주재료이다.

문수보살

문수보살 文殊菩薩 Mãnjuśri(범)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 ‘문수사리文殊師利’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로 원어 Mānjuśri에서 ‘만주’는 ‘달다,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이므로 합하여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문수보살은 석가 입멸 이후에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서, 박학다식, 다재선변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표현된다. 또한 《반야경般若經》을 결집, 편찬한 이로 알려져 있고 또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요 부모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는 중국의 산서성山西省 청량산淸涼山(일명 五臺山)이고 일만명의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한다. 중국에서 가장 신격시되었던 4대 보살 가운데 하나이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보살이 해탈문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은 모두 문수의 힘이라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 혹은 석가모니불의 왼쪽 협시가 되며, 형상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에 지혜를 상징하는 칼이나 경권(經卷)을 들고,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때때로 정수리에 대일여래의 5지(五智)를 상징하는 오계를 튼 동자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좌*는 연화대좌가 일반적이나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다. 회화에서는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상대자로서 표현되는 예도 많다. 문수신앙은 신라 자장법사에 의해 한국에 전해졌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문수보살상〉, 조선시대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1466) 등은 대표적인 조각상이다. 사찰에서 문수보살을 모신 불전을 문수전(文殊殿)이라고 하며, 문수원(文殊院)과 같은 문수보살만을 신앙하는 사찰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신앙이 성행하였다.

문인화

문인화 文人畵

전문적인 직업화가가 아닌 시인이나 학자 등 사대부 문인이 여기(餘技)로 그리는 그림의 총칭. 처음 ‘문인의 그림(文人之畵)’이라는 말을 쓴 사람은 명대(明代) 말기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인데, 그 계보는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로부터 시작하여 동원董源(똥 위앤), 거연巨然(쥐 르안), 이성李成(리 츠엉), 범관范寬(환 쿠안),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원사대가*(元四大家),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 역시 직업화가의 화풍을 따라 그리기도 했으므로 신분상의 구분을 하나의 일관된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다. 따라서 근래에는 사군자*(四君子) 같은 사대부들의 교양으로 여겨지던 화제나, 사의*(寫意)에 중점을 둔 간일하고 격이 높은 화풍을 지닌 그림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서화일체 사상(詩書畵一體思想)과 정신세계의 표출을 중시한 문인화 이론은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을 중심으로 고취되었으며 명대 중기 이후 직업화가를 압도하여 화단을 독점하였다. 또한 직업화가의 양식을 북종화*(北宗畵)라 부르고, 그들 자신의 화풍을 남종화*(南宗畵)라 칭하였다. 그런데 동기창이 말하는 ‘문인의 그림’ 계보에 속하는 화가는 남종화의 화가들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문인화와 남종화의 혼동이 생겨나고, 문인화는 남종화와 같은 의미의 용어로 여겨졌다. 남종문인화라고 하여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구분을 하자면 남종화는 주로 산수화*에 국한하여 사용하는데 비하여 문인화는 산수화는 물론 사군자, 화조화* 등 모든 화과(畵科)에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