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뉴욕화파

뉴욕화파 New York School(영)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뉴욕에서 작업을 하고 대개 1947~1948년 사이에 개인적 양식을 확립했던, 주로 추상이나 표현주의*적인 혁신적 화가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룹이라기보다는 독자적인 스타일에서 유래하는 강력하고 개혁적인 개성적 표현이 그 특징이다. 뉴욕화파의 미술가들은 뉴욕이라는 도시 환경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과거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결국 광범위한 국제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고, 나아가 강렬하고 본원적인 미국 전위 회화를 창조함으로써 결합되었을 뿐이었다.
1940년대 초에 시작된 뉴욕화파 운동은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의 미술학교 설립,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조직한 전위 유럽미술 전람회, 그리고 특히 미국에 초현실주의*의 도입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고무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도입은 전람회를 통해서 또는 제2차세계대전 중 많은 유럽 화가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미로Joan Miró(1893~1983), 마송André Masson(1896~1987), 마타Roberto Matta(1911~ )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뉴욕의 화가들에게 오토마티슴*의 이른바 무의식적인 자발성과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불어넣어 주었다. 동시에 입체주의* 화가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등의 역할 및 활동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뉴욕 화가들은 이 모든 화풍을 소화하여 강력하고도 개성적인 표현으로 변형시켰다. 1940년대 초기에 주요 작업을 벌이기 시작한 화가는 호프만, 고르키Arshile Gorky(1904~1948), 마더웰Robert Matherwell(1915~1991),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로스코Mark Rothko(1903~1970), 스틸Clyfford Still(1904~1980),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등이며 이들은 뉴욕의 전위미술가들에게 가장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1947년을 전후해서 이 뉴욕파에 거스통Philip Guston(1913~1980), 톰린Bradley Walker Tomlin(1899~1953), 클라인Franz Kline(1910~1962) 등의 화가들이 가담하게 되어 방향의 전환을 이루었다. 이들은 큰 캔버스와 흑백 화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외에도 뉴욕화파에 포함되는 미술가로는 바지오츠William Baziotes(1912~1963), 고틀리프Adolf Gottlieb(1903~1974), 뉴만Barnet Newman(1905~1970), 트워코Jack Tworkow 및 라인하트Ad Reinhardt(1913~1967) 등이다.
이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폴록, 드 쿠닝, 클라인과 같은 소위 액션 페인팅* 작가들은 주로 몸짓의 효과와 붓 또는 페인트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고, 로스코를 비롯한 마더웰, 라인하트, 스틸 등은 색면과 소리 없는 암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가들은 대체로 구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커다란 캔버스를 가지고 작업하였으며 작품의 본질적인 국면으로서 그림 자체에 행동을 표현하는 것을 공통점으로 한다.
1950년대에는 뉴욕화파의 다음 세대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새로운 작품 대부분은 앞 세대들로부터의 파생적인 것에 불과했고 1950년대 말부터는 이 운동도 약화되어갔다. 뉴욕화파의 형성으로 종래 유럽 근대 미술*의 지방적인 아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의 미술은 폴록의 액션 페인팅 이래 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전후 미술의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뉴욕의 존재가 파리와 함께 혹은 파리를 대신해서 강화되기 시작했다.

뉴웨이브

뉴웨이브 New Wave(영)

원래 트뤼포François Truffaut, 고다르Jean-Luc Godard 등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프랑스의 신인 영화 감독들을 경멸적인 의미로 칭하기 위해 저널리즘이 붙인 명칭. 1970년대 중반에 뉴웨이브란 명칭은 미국 음악계에 등장한 팝 뮤직의 신세대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매우 극적이며 절충적인 성격을 띤 퍼포먼스*의 영향을 받은 많은 미술학도들은 ‘로미오 보이드Romeo Void’와 대성공을 거둔 ‘토킹 헤즈Talking Heads’같은 팝 음악밴드를 결성했다.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 등 캘리포니아 지방의 미술학교 졸업생들은 전시회는 물론 음악공연과 퍼포먼스도 보여주는 건물 정면에 위치한 대안공간*을 열었다. 표현주의*적인 유형의 광고 포스터도 뉴웨이브에서 발달하여 후에 등장한 신표현주의* 회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뉴웨이브는 부정확하게나마 시각예술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열린 두 건의 대규모 전시회는 뉴웨이브 미학이 미술에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번째 전시회는 ‘콜래보러티브 프로젝트Collaborative Project’와 대안공간인 ‘패션 모다Fashion Moda’에서 주최하여 1980년에 열린 <타임스 스퀘어 쇼>이다. 여기에서 사상 최초로 낙서미술*가들이 개념미술*의 반 대상적(anti-object) 경향에 반대하는 에이언John Ahearn과 오터니스Tom Otterness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화가와 조각가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모든 벽면이 하얗게 칠해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랑에 대한 대안(代案)을 제공하는 의미에서 이 서커스 같은 전시회는 화랑, 클럽, 길거리를 합쳐놓은 듯한 매력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1981년 9월에 두번째 전시회인 <뉴욕 뉴웨이브>가 P.S.1에서 열렸을 때 이미 뉴웨이브란 용어는 단순히 1980년대 전반기를 주도한 낙서미술, 신표현주의, 이스트 빌리지 미술이 혼합된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뉴웨이브는 단지 새롭고, 긁어 벗겨낸 표면을 보여주는 미술과 동의어로 사용될 뿐이다.

늑골

늑골 肋骨 rib(영)

건축 용어. 두께가 얇고 편편한 재료를 보강하기 위하여 재료 단면과 직각으로 설치한 보강재(補强材). 판상(板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형철근(異形鐵筋)의 표면에 만들어진 축방향의 가늘고 긴 돌기부를 가리킨다. 혹은 궁륭*의 안쪽에서 돌출하여 궁륭을 지탱해주는 가는 갈빗대 모양의 뼈대로서 이 경우의 늑골은 일반적으로 아치* 혹은 반(半)아치 형태를 취한다. 횡으로 궁륭 천장에 맞닿아 하중을 받으며 궁륭의 표면을 분할하는 늑골은 고대 로마 건축의 궁륭에도 이미 발견되며 고딕* 등 서양 중세 성당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후기 고딕 건축에서는 단순히 구조적 이유 뿐만 아니라 장식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늑재 궁륭*의 틀을 이루는 석조의 돌출띠인 늑골의 모양을 내는 장식으로 발전됐다.

늑재 궁륭

늑재 궁륭 肋材穹窿 rib-vault(영)

궁륭*의 한 종류로 ‘늑골 궁륭’이라고도 한다. 지지물들을 연결시키는 늑골*이나 아치*들의 뼈대가 있는 궁륭을 일컬음. 고대 로마의 궁륭에 이미 있었고 사산 조 페르시아에도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이슬람 건축에 있어서도 일찍부터 늑골 돔, 늑재 궁륭의 복잡하고 환상적인 사용례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늑재 궁륭을 가장 정연하고 조직적으로 사용한 예는 서구의 고딕* 건축이었다.

→ ‘궁륭’ 참조

능 陵

제왕과 후비의 무덤.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봉토(封土)에 호석(護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기고, 주위에 석난간(石欄干)을 두르며,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사자(石獅子)를 세우는 제도를 갖춘 신라능묘는 흥덕왕릉興德王陵대에 이루어졌다. 고려는 대체로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및 정자각을 세우고 봉분 주위에 석양, 석호를 배치하는 것 등이 다르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들이 북한에 소재하여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하나 공민왕恭愍王이 노국대장공주와 자신을 위해 조영한 정릉正陵(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봉명산, 1365)과 현릉玄陵(1374)이 조선시대 왕릉형식의 표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최초의 왕릉으로 조영한 태조太祖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자 태조의 수릉(壽陵)인 정릉貞陵(사적 제20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1397)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1408년(태종 8년) 태종太宗이 태조의 능을 현재의 건원릉建元陵으로 모시고 다음 해에 제왕의 능분은 도성내에 두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이를 동소문 밖으로 이장시킬 때 그 원형이 파괴되어 공민왕릉과 비교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정릉은 태조 건원릉 축조의 범본으로 알려진다. 건원릉은 능역 입구의 홍살문*으로 이곳이 성역임을 표시하고, 박석을 깐 참도(參道)로 이어진다. 이 입구 바로 오른쪽에 왕이 능행시 북방을 향해 네 번 절하는 통과의례를 치르는 장소인 정방형의 판위(版位)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의 정면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동쪽계단에 연결된다. 이것이 다시 정자각 후면 정중앙으로부터 능언덕 밑까지 이어지고 둥근 구릉으로 된 능원은 1단의 낮은 석축으로 보호된다.
능 전체의 구성요소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능상구역(陵上區域)과 능하구역(陵下區域)이다. 능상구역은 바로 봉분을 중심으로 곡담, 석물, 석계를 포함하며, 정자각 후면의 신문(神門)이 의미론적으로 바로 이 구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다. 능하구역은 제의식(際儀式)의 장소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이를 좌우에서 보완하는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 그리고 이 구역의 입구에 홍살문이 있으며 이들을 연결지어 주는 참도, 왕의 자리를 나타내는 판위가 있다. 능상구역에서 능원상에는 3단의 장대석을 쌓아 능전에 2단의 넓은 공간에는 문인석, 무인석과 그들이 탈 수 있는 석마(石馬)들이 각각 1쌍씩 있다.
첫째단에는 두손으로 장검을 빼어 들고 선 무인석이 있고, 둘째단에는 문인석이 두 손으로 활을 잡고 서 있다. 맨 윗단에는 봉분 앞 정면 중앙에 장방형의 두꺼운 판석 한 장으로 된 상석이 북모양을 한 네개의 돌로 받쳐져 있다. 그리고 봉분 주위로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각각 두쌍씩 밖을 향하여 능실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상석의 좌우로는 중국에서는 화표주(華表柱)라 불리는 석망주(石望柱) 두 개가 서있다. 석망주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상부에 연꽃이 새겨진 띠로 위, 아래를 받치고 그 사이에 긴 팔각주를 세운 모습이다. 12면의 석난간으로 봉분을 보호하고 하부에 12면의 병풍석(屛風石)으로 보호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제도를 보여준다. 각 면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전통이 된 십이지신상 조각이 문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관에는 각 동물의 모습이 장식되었다. 모서리돌에는 금강저*(金剛杵)가 호신의 상징으로 새겨졌으며, 이 금강저에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만물생성의 원리인 태극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능분은 다시 동서북 3면에 걸쳐 기와를 올린 담장 혹은 곡장(曲墻)에 의해 보호된다.

니치

니치 niche(영)

→ 벽감